오늘의 넘버는 또 다른 나. <도리안 그레이>가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푸른 핏줄 심장을 뚫고 날 깨운다ㅡ주저앉은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 생의 마지막 헐떡임처럼. 마지막 맥박에 요동치듯이. 부르르 분명하게 떨리는 몸에서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처음 보는 모습에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온몸으로 죽음을 표현해내는 그를 물기 없이 볼 수 있을 만큼 나는 단단하지 않다.
 
이미 앞서 울음 어린 호흡에 먹혀버린 두 번째 '나'에서 한 차례 침몰했고, '더 이상 기억이 안 나'에 격침당한 상태였다. 생을 긋는 손목의 또렷한 움직임이 비수가 되었고, 그어낸 목 위로 찬연히 쏟아지는 순결한 조명에 분격해버린 후였다.
 
그런 그가 내 심장에 최후의 못질을 하듯 몸을 떨었다. 덜컹이는 몸에서 생명이 마치 젖은 낙엽처럼 떨구어졌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여린 어깨가 대지에 뿌리를 내린 듯이 늘어졌다. 죽음이 임박한 눈에서 흐른 눈물이 콧날을 타고 옅게 질린 입술에 가 맺혔다.
생명이 한 줌이나 남았을까 싶은 얼굴이 우는 듯 웃는 듯 손을 뻗어 눈앞의 환각을 매만졌다. 황금 빛깔 천국. 아름다운 소년. 가까스로 웃음의 형태를 띠었다 싶은 입꼬리에 끝내 울음이 번져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이 연기라면 오늘의 당신은 너무나 잔인했다. 죽음에 스러지는 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이런 건 너무했다. 남겨진 이의 깨진 마음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
 
1. 등장
별무리를 쓸어담으며 웃는 얼굴이 어제보다도 훨씬 또렷했다. 입 주위를 부드럽게 감싼 저 사랑의 곡선에 무장해제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더없이 선량하며 순수한 얼굴. 그 얼굴에서 피어난 반짝이는 웃는 눈. 결심했다. 별을 헤아리는 저 눈동자를 보기 위해 위층으로 외유갈 것이다.
 
2. 찬란한 아름다움
말소리에 반응할 때의 그. 배질의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와 같이 불현듯 치고 들어오는 소리에 반응할 때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고풍스러운 자태가 좋다. 시선이 먼저 가고 턱이 시선을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맵시가 아름다워. 우아한 교양, 세련된 매너 그 자체.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실의에 흐려진 눈동자가 꿈결이라 너무도 아름다웠다. 슬퍼하는 데 좋아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웃으면 웃는 대로 상심하면 상심하는 대로 다 아름다운걸.
 
4. 당신은 누구일까
예쁘구나? 네! ㅡ는 그 언젠가 들었던 사근사근한 긍정의 톤이었다. 확신에 차서 서둘러 긍정하는 목소리 하나, 오늘과 같이 사근사근한 소리 둘. 이 각자의 소리를 구분하여 모아 보고 싶어졌네.
 
눈물 나도록 예뻤던 오늘의 장면은 사랑을 품은 걸음걸음의 그. 콩콩콩 계단을 단숨에 밟아 오르는 걸음. 구름을 밟듯 사뿐사뿐 뒷걸음질하여 되돌아오는 뒷모습. 사랑에 흠뻑 빠진 그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마음을 간지럽게 했는지 몰라.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워. 어떻게 이렇게 살랑살랑 예쁜 나비일 수 있어요?
그 얼굴로, 그 걸음으로 웃음이 그렁그렁하여 두 손을 가슴께로 모으면 아아. 사랑이 넘실대며 흐르는 순간. 사랑이 사랑에 만개한 그림.
 
헨!리! 플라토닉 사랑이거든요! 쏘아대는 목소리는 위풍당당하여 무척이나 귀여웠다.
 
5. 최악의 줄리엣
꾸벅꾸벅 조는 앨런을 발견한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나의 그녀의 차례인데 감히, 에잇ㅡ하는 것처럼. 그런 그녀가 꿈에도 생각 못한 연기를 선보이자 파들파들 떨리는 눈동자가 절망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낭패감 깃든 두 눈이 오늘은 화를 내기보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했다.
변명 아닌 변명ㅡ'시빌 베인이 아픈 것 같아요'도 어찌나 다급했는지. 하지만 수긍의 기색이 전무한 일행들ㅡ심지어 브라보!를 외치는 일행들의 반응은 더한 좌절감을 주었다. 황황한 얼굴로 난간을 탁 내려치며 깊이 절망하더니, 결국에는 체념한 등이 등받이로 축 늘어졌다. 어둠 속에서 멀어지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헨리 워튼의 손길은 위로 반 놀림 반이었다.
 
6.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오랜만에 피아노와 나란한 화음과도 같았던 촉촉한 '헨리'를 들었다. 여기 이 '헨리'의 물 먹은 발음 정말 좋아해.
 
'시빌 베인은! 여배우로서의 품위있는 죽음을 선택한 거야. 오필리어처럼.'
아직 완전히 경도되기 전의, 양심의 고통을 품어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헨리 워튼을 바라볼 때. 물기 머금은 채 흐려진 안개 같은 눈빛이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적은 적이 있나. 서리 내린 듯 어렴풋한 눈동자가 가늘게 이지러지며 헨리 워튼의 궤변을 좇아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처연한 사슴이다. 솔깃함과 아리송함을 한꺼번에 품은 채 서서히 생기를 되품는 눈동자는 또 얼마나 예쁜지. 끝내는 '찬란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헨리 워튼의 주위를 위성처럼 맴돌다 함몰되는 그가 또 얼마나 애색한지. 이 장면의 그가 선사하는 애통함 그 이상으로 좋아해.
 
7. Against Nature
늘 그다음이 있는 그이지만, 오늘의 백점프는 내일이 없을 것만 같은 격정이었다. 심장이 쿵쾅댈 정도였어. 와아, 감탄에 거듭 감탄.
 
새로운 장면은 '꿈틀대는 푸른 핏줄 너머'로 브랜든 부인과 앨런이 보였던 것. 놀라운 건 그를 보는 그들의 표정이었다. 흥미와 경멸이 뒤섞인 얼굴에 명치를 맞은 듯했다. 그가 어떤 죄악의 문을 열고 어떤 타락을 일삼는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는 방관자적 태도가 역력한 얼굴들. 배질과는 너무도 다른. 헨리 워튼과도 또 다른. 일말의 연민조차 없는 무정한 눈길. 저런 사람들 투성이인 그의 곁이 서글펐다.
 
8. 무엇이 기다릴까
오늘의 대미는 두말할 것 없이 찬란한 아름다움. 12일 이상의 진폭이었다. 정제된 듯 아닌듯 한 강세가 어절마다 튀어 올랐다. 날선 할큄음으로 두 팔을 벌려내면서는, 마치 저공비행을 하듯 비잉 날아 배질에게로 달려들었다. 독거미가 그물에 잡힌 먹이를 포획하듯이, 순백의 허물을 벗어낸 코브라가 새까만 본색을 드러내듯이. 세상에. 내 심장이 다 긁히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짜릿하여 손끝의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귀와 심장을 이렇게까지 한꺼번에 뒤흔드는 소리는 세상에 당신이 유일하다.

배질을 향하여 내뿜은 연기가 사그라지고도 입맞춤을 보내는 모양으로 그대로 멎은 입술은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이 여전히 아름답다. 여전히 유혹적이고.
입맞춤의 소리는 신성할 정도로 작았다.
 
9. 넌 어디로
넌 어디로의 빚은 듯한 아름다움을 찬양합시다. 샤멘.
 
10. 또 다른 나
'이씨' 하는 얼굴에 치미는 예민함, 참 매력적이야. 계속 보여주세요. 계속 보고 싶어요.
어제와 같은 '이-십-년 전?'의 웃음은 없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나는 개막 이후 첫 절정을 이루었다(개인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 한 절정인데, 그것이 가능했다. 현장감의 감퇴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만들어낸다.
 
11. 너를 보낸다 reprise
'난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의 운을 떼기 전 소파에 늘어진 몸으로부터 처음 듣는 소리를 만났다. 흐으으으으으- 뱀이 숨을 쉰다면 이런 소리이지 않을까, 싶은 기이한 음성이었다. 호흡 같기도 하고 신음성 같기도 한, 완벽하게 처음 듣는 소리. 조금의 익숙함도 느껴지지 않는 소리. 처음에는 그의 소리가 맞나 싶어 의심하였을 정도로 낯선 것이었다. 일그러진 정신을 표상하는 것과도 같은 기이한 음성이 비인간적이기까지 했다.
 
오늘의 장면은 계단을 내려오는 그와 배질이 한눈에 담기는 시야에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배질의 얼굴 뒤로 두 눈을 부릅뜬 그가 보였다. 어때, 아름답지 않아? 섬뜩하게 날선 웃음 앞으로 비통에 잠긴 얼굴이 비추어졌다. 그 장면의 이미지가 잊혀지지 않는다. 고통의 치부가 파헤쳐진 채 웃는 한 사람과 그것이 제 자신의 치부인 것마냥 아파하는 또 한 사람. 서글플 정도의 현격한 온도 차가 심장을 조였다.
 
배질을 찌른 직후, 칼을 든 손으로 떨어진 눈동자가 화들짝 놀랐다. 오늘의 칼은 떨구기보다는 소스라친 나머지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도저히 이 내 손이 한 일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13. 사라진 아름다움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소리내어 웃음 같은 호흡을 뱉더니, 혀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충격이 끝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웃는 모습은 최근의 그대로인데 묘하게 잠긴 얼굴에 위화감이 들었다. 꼭 약에 취한 사람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는 그렇게나 철철 흘렀던 비정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잊기 위해 약에 몸을 맡긴 채 모든 죄악감으로부터 애써 해방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 같았어.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약에 의지해 이성을 놓고서라도 해방되고 싶었던 죄악감은 도대체 어떤 무게일까.
그러나 초상화에 대해 캐묻는 헨리 워튼 때문에 온전히 그리하지도 못했지. 떨쳐내려 해도 조여오는 심장을 꼭 닮은 다그침. 자신이 저지른 죄악으로부터 끝내 분리해낼 수 없었던 영혼.
막다른 길로 몰리는 그가 오늘따라 왜 그리 아이 같던지. 곧게 펴지 못한 둥그런 뒷모습이 어찌 그리 어리게만 보이던지.
 
헨리 워튼의 악력에 의해 돌려 세워지는 상체는 또 너무도 지쳐있어,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 또한 지친 채로 젖어 있어 숨이 턱 막혔다.
모든 진실이 드러난 후 떨군 얼굴에서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린 눈물 또한.
 
그 음에서 피어나는 도리안 그레이는, 무자비한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