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생을 그어내는 순간이었다. 작으나 명료하게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삶을 저버리는 순간을 목을 긋는 것으로는 물론, 생이 끝내 부러지는 듯한 소리로도 표현해낸 것만 같은 감탄도 잠시. 동시에 쏟아진 시청각적 죽음의 행위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소리로도 죽음을 확인받은 건, 오늘로 두 번째.
 
무릎걸음의 의지조차 잃은 채 쓰러진 그 모습 그대로 파들파들 떨리기만 하는 웅크린 몸을 보았다. 죽음에 잠긴 채 숨이 온전히 멎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 같던 얼굴에는 흐느낌조차 없었다.
푸른 핏줄 심장을 뚫고 날 깨운다
분명 입술이 움직이는데, 입술을 타고 나는 음성 같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 안 깊은 곳 어딘가에서 비집고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의 텅 빈 심장에서부터 고동치며 울리는 듯한 소리가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황금 빛깔 천국이 내게 펼쳐진다
한없이 잠겨있던 동공이 별안간 반짝였다. 화들짝 부풀었다가 금세 흐느낌을 머금기 시작하는 눈동자가 글썽였다. 놀람과 후회, 사무침과 슬픔으로 범벅된 얼굴이 눈앞의 허상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소년이 나를 부른다
아스라이 뻗어보는 한 손은 끝까지 목적에 닿지 못했다. 허공에 남겨진 손을 마주 잡아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글썽임이 끝내 가득 번진 얼굴이 회한의 울음이 되었을 때, 그의 남은 생이 멈추었다.
 
결국 어제에 이어 또다시. 레퀴엠이 현실이 되지 못한 채 그의 바람에 머무르는 것만 같은 엔딩이었다.
구원이기를 바라는데. 구원을 주고 싶은데. 어제도 오늘도 그 언저리에서 소망할 뿐인 그였다.
 
*
 
1. 등장
오늘은 피아노를 두드리는 얼굴을 가장 정면에 가깝게 보았다. 건반에 맡긴 채 살짝 기울인 고개. 사르르 웃는 얼굴. 예쁜 얼굴.
 
2. 최악의 줄리엣
오늘도 한순간에 표정이 사라지는 얼굴. 지우개로 지워내는 것처럼 분명한 표정의 변화.
 
3.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헨리, 제가 시빌 베인을 죽였어요. 피아노 앞에서의 눈동자를 또렷하게 보았다. 한곳에 고정되지 못한 채 고개를 따라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 공허한 빛.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아무것도 담지 않고자 애쓰는 텅 빈 동공이었다.
 
신선한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싶어요. 충격을 애써 소화해보고자 하는 대사가 아닌 듯 떨렸다. 버거운 듯 오르내리락하는 가슴에서도 그의 동요가 보였다. 그 아래로 달걀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손까지.
 
그나저나 오늘의 배질은 왜 이렇게 강했지. 장례식에 가야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잖아! 언쟁을 넘어 주먹싸움이라도 불사할 것 같았던 단호한 목소리.
 
4. 패션쇼에서 생글 웃어 보이곤 하던 아름다운 입매는 이제 사라진 걸까. 어제오늘의, 평가하는 예민하고 고고한 미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어느 것이든 아름다워.
 
5. Against Nature
목소리가 특별할 정도로 좋았다. 귀를 사로잡는 타격감. 최고야. 19일을 떠올리게 했다. 기쁘고 고무적이었던 건 19일보다 훨씬 좋았던 공연장의 음향.
무엇보다 죄악의 황홀한 절정ㅡ에서 끝음을 한없이 끌어올리는 소리가 좋았다.
 
6. 넌 누구
오늘의 얼굴은 죄악과 회개. 타이를 고쳐매는 얼굴에서 빛났던 예민한 아름다움이 그 두 번째.
문닫힘의 소리는 다시 오랜만에 깔끔했다. 의외로 깔끔하게 매듭되는 날이 드물어서 그날마다 적어둬야겠어.
 
7. 무엇이 기다릴까
오늘은 계단을 내려온 직후 배질을 등진 채 소리를 흘려보냈다. 연기와 함께, '후우'.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번득이는 이 눈, 찡그려진 채 배질을 아래위로 순식간에 훑어내는 이 눈의 정면 정말 오랜만. 그래, 이렇게 바짝 다가서서 코앞에서 번득이는 눈이었다.
 
오랜만의 정면에 가까운 얼굴이었어서일까. 그 눈의 날카로운 빛들이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하나. 소파에 앉아, 배질의 고백을 어거지로 받아낸 얼굴이 옅은 조소와 함께 날카로운 눈웃음을 그렸다.
둘. 네가 느끼는 고통, 나도 느끼고 있으니까. 배질의 호소에는 눈썹마저 한껏 이지러트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떠서 노려보았다. 진실을 안다는 것인지, 안다면 어디까지 아는지. 샅샅이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셋의 대미는 '후회 없으라'의 쐐기를 박은 눈. 배질에게 밀착하였던 몸을 떼어내며, 뒷걸음질하던 얼굴에서 희번덕였던, 동시에 필사적이었던 눈. 입으로는 매혹의 미소를 그려도 눈동자로는 절대 웃지 않던 그 눈.
 
창문 너머, 침실에서의 그도 비교적 가림없이 보았는데 특히 배질을 감싸 안는 양손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꽃잎이 말리듯 아지랑이처럼 배질의 등으로 안착하였던 두 손. 이렇게 섬세하게 아름답기 있나요?
 
그나저나 무릎의 새로 생긴 상처와, 어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무엇이지..
 
8. 또 다른 나
Against Nature에 버금갈 만큼 좋았던 사운드. 내 속죄는 진실로 내 뜻인 걸까는 변화를 이어갔고♡, 숨겨진 '나' 역시.
 
9. Life of Joy
헨리 워튼의 강세가 계속 떨어진다. 그런 상대방에 화응하는 그 역시 보조를 바꾼다. 이건 의도한 변화인가? 무슨 의미지? 배질과 대립하던 그가 찬란한 아름다움에서 헨리 워튼을 만나 날갯짓하는 것 같던 소리가 다시 나지 않아. 대신 끝없는 나락이 된다. 훨씬 어둡고 절망적인 노래가 되었다. 출구 없는 논쟁, 빛없는 암흑.
 
10. 악의 꽃
1막 배질의 화실에서의 그가 아도니스라면, 무도회에서는 아폴론이나 에로스여야 한다. 아도니스의 순결로는 무도회의 신성을 전부 이를 수 없다. 어스름한 새벽 조명 아래 계단을 타고 인간세계로 강림하는 그를 담아낼 수 없어. 그렇게나 아름답고 고결하다.
 
11. 너를 보낸다 reprise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는 계속하여 변화 중이다. 오늘은 27일의 한숨에서 조금 더 나아간 변형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한숨으로 시작하여 안으로 말려드는 맺힌 음성으로 마무리된 문장.
 
난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ㅡ로 시작하는 그리스 신화의 가장 이상적 인간. 은 오늘이 감히 제일 좋았다고 말해본다. 바라던 완벽한 인간상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음을 토로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고, 그런 절망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C에서 오랜만에 본 것은 배질을 찌른 직후의 얼굴. 화를 담아 파르르 떨리는 턱 위로 자신이 찌른 이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날카롭고도 부들부들 요동쳤다. 쌕쌕 들이쉬는 숨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또한.
 
배질의 대사는 처음으로 하강했다. 넌 구원받을 수 있어↘ 도리안.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하여, 올려 보였던 끝음절이, 안간힘을 다하여 도리안의 구원을 빌어주는 것 같았던 그 소리가 사라지자 더할 수 없는 허망함이 밀려왔다.
 
12. 앨런의 죽음
다락으로 앨런을 내몬 후, 쓰게 웃었던 얼굴. 핫, 핫, 소리 없는 웃음을 토해내는 육신이 좌우로 중심 없이 흔들렸다. 퇴장하는 걸음걸이에서도 평정은 없었다.
 
13. 사라진 아름다움
슬픔을 그린 그림처럼 심장이 없는 얼굴ㅡ자신의 심장 부근으로 다가간 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차마 움켜쥐어볼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 같은, 오므려지지 못하는 그 손이..  자신의 텅 빈 가슴을, 심장이 없는 가슴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움켜쥐지도 닿지도 못하고 그저 심장 부근에 머무르기만 하는 그 손이 가여웠다.
 
헨리, 만약에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의 울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 대사가 의문문이 아닌 고백문이 된 지는 오래되었으나, 이렇게까지 울음이 번져든 건 처음이다.
 
할 수 있는, 그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죄악의 고백을 다 하였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외면. 실패작에 그친 자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나 아무 가능성도 없는 자기 자신이 사무치는 그 얼굴을 하염없이 보았다.
 
14. 도리안 그레이
오늘은 다시 칼배로 목을 그었다. 찰나의 안도.
 
 
(+)
헨리! 아, 이게 배질이 말한 나쁜 영향.. 쓰레기.
세상이 바뀐 시간. 도리안 그레이를 응원할 거야ㅡ는 역시 추가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앨런에게 기습 볼뽀뽀를 받아 깜짝 놀란 브랜든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