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싱그러웠던, 나 밝게 빛나던ㅡ울음으로 웃음하는 소절에 아주 오랜만에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가사대로의 순수를 되살려보고자, 맑고 여린 음성을 애써 내어보지만 그것으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가냘프고 여리어 앳된 목소리에서 서글픈 저음으로 차츰차츰 되돌아오는 음성에서 흐느낌이 증폭되었다. 최면에 머무르지 못하고 끝내 현재의 망가진 자신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그가 가여웠다.
생을 그어낸 얼굴에서 마치 연기처럼 숨결이 튀었다(낮공). 눈부신 조명을 가르고 투명하게 발포된 숨방울이 두 눈에 박혔다. 심장에 담긴 생명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
심지어. 생의 모래시계가 뒤집혀 얼마 남지 않은 죽음 직전의 얼굴이 비틀리며 웃었다. 한숨처럼, 짧게. 바람 새는 웃음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명확하게 웃음을 그렸다. 생의 속박을 끊어낸 얼굴로 서글픈 듯, 개운한 듯 그렇게.
아, 그건 자살이라 할 수 없었다. 멈추는 법을 몰랐던 죄악의 인생. 타락을 위한 길 이외에는 삶의 방법을 알지 못했던 생을 스스로 끊어낸 그것을 도피라 할 수는 없었다. 제 생의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모든 죄악에 종말을 고한 그 행위를 어떻게 도망이라 할까. 그건 해방이었다. 자신의, 자신이 쓰러트린 사람들의,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파멸의 올가미에서 불행해진 모두를 위한 해방의 행위였다.
모든 매듭을 끊어버린 채 자유로워진 육신이, 이제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스러진 육신이 기었다. 무너지는 다리로 안간힘을 써서. 겨우 한 발치 나아간 몸이 보았다. 눈앞의 황금 빛깔 천국을. 마중 나온 아름다운 소년을.
아스라이 뻗은 한 손의 끝에서 그가 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울음 고인 얼굴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픔 맺힌 얼굴이 끝내 울음으로 되돌아가는 찰나까지 잔잔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죽음이 선사한 해방이었다.
*
오늘은 AC의 종일반. 종일반의 경우 다양한 시야를 선호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아쉽게도 드문 AC 조합. 그래서 더욱 열심히 보았당. 낮과 밤이 서로를 채워주는 오늘의 교차된 시야를 기억해야지.
1. 등장
C의 낮공. 오늘의 아름다움은 피아노에 맡긴 얼굴. 살짝 모인 미간으로 보드랍게 미소 짓던 볼.
2. 찬란한 아름다움
낮공의 대사는 '가지 마세요, 헨리.' 보드랍고 촉촉하고, 유한 목소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백색의 음성이었다. 태어나서 거절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것만 같은 사랑스러움이 묻어났어.
남기로 결정한 헨리 워튼을 보면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가 들려줄 이야기가 기대된다는 듯이. 그리고는 배질을 잠시지만 분명하게 흘긋였고.
오늘따라 귀에 박힌 소리는 '저게 바로 나쁜 영향이라는 거야'에서 묻어나던 웃음기. 모든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도리안에게 나쁜 영향이 되리라고는 조금의 상상조차 하지 않은 웃음 묻은 평화로운 문장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아주 약간의 미래만 알았어도. 혹은 배질이 그림이 아닌 그에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어도 그렇게 웃지는 못했을 텐데 싶어서.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밤공. 피-할/거/야/의 약 스타카토. 어느 때보다 갈구하던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였다.
4. 당신은 누구일까
헨리 워튼에게로 총총 다가서기 전 앙다물리는 야무진 부리를 보았다. 심지어 밤공에서는 헨리 워튼의 책 위로 살며시 손을 얹어 온전한 주의를 끌고자 했다. 그 사랑스러운 앙큼함이 너무도 귀여웠다.
노래적으로는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밤공에선 소리적인 변화도 있었다. 부드러워졌어. 사랑의 격정을 지나쳐 녹신하고 달콤한 향기가 흐르는 음성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귀여운 발음을 들려주는 오브 콜스.
낮공에서는 아, 이게 바로 배질이 말한 나쁜 영향..? 쓰뤠기.
밤공에선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울먹울먹).. 배드보이!
5. 최악의 줄리엣
밤공. 조는 앨런을 발견하고 오늘도 속상함과 시무룩함 혼재된 얼굴로 깨우려고 일어섰는데, 어머나. 느닷없이 번쩍 눈을 뜬 앨런과 눈이 마주친 그가 깜짝 놀라버렸다. 심장 부근을 지그시 쓸어내리며 놀란 가슴을 달래는 얼굴이 매우 귀여웠다.
마찬가지로 밤공에서, 시빌 베인이 연기를 딱 시작하는 순간의 첫 얼굴이 평소와 살짝 달랐다. 당혹감을 넘어, 타인 보는 듯한 왜 저래? 의 느낌이 생생했다.
퇴장 시에는 낮밤 모두 난간을 있는 힘껏 내려친 분노를 보여주었다. 왕자님 손바닥 아프면 안 돼.. 물론 무엇도 그 마음만큼 아프지는 않겠지만.
낮공. 혼자만의 꿈결에 있는 시빌 베인을 보는 눈 밑이 파르르 경련했다. 깨진 사랑에 쐐기를 박아버린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았다. 분노가 치민 절망 어린 마음이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구분 지었다. 현실의 그저 그런 여배우뿐일 시빌 베인과, '내가 사랑했던 시빌 베인'을.
밤공에선 시빌 베인의 머리카락이 다시 그의 마이크에 걸렸다. 고개를 한껏 뒤로 하여 걸린 머리칼을 빼내기 위한 동작이 또 시빌 베인을 외면하는 고갯짓처럼 보였지. 절묘하게.
그리고 밤공의 새로운 애드립. 연기가 아니라 구원동화 하는 줄 알았어요. 언젠가는 랩하는 줄 알았어요ㅡ도 나오려나.
6.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시빌 베인은!
겨우 울음을 그친 얼굴이 헨리 워튼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마다 심장이 쿵해. 코끝에는 아직 촉촉함을 달고 젖은 눈망울이 슬며시 귀 기울이는 모습이 너무도 길 잃은 어린 사슴이라. 아름다운 건 물론이고 위태로운 순수에 마음이 아리다.
7. 패션쇼
코트 자락을 뒤로 차르륵 젖히며 의자에 앉는 맵시는 정말이지 왕자님이다♡
더는 웃지 않는 얼굴. 하나하나 샅샅이 스캔하는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도톰한 입술을 앙, 다물고 손가락으로 윗입술을 지그시 쓸면서 바쁜 눈으로 탐색해. 다가오는 헨리 워튼을 향하여 인사를 겸한 눈짓을 보내는 순간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분석적이고 진중한 눈이었다.
밤공에선 유난한 분홍빛의 입술이 투명하게 아름다워 시선을 빼앗겼네.
8. Against Nature
낮공의 아름다움은 포복하여서의 비릿한 미소.
밤공의 아름다움은 날 깨우는 감'각'의 파동.
그리고 밤공. 뼈무대 위에서. '외면마소서'와 함께 한 손으로 큰 반원을 그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로 너무도 예쁘게 너무도 아름답게 웃었다. 노려보는 얼굴이었으나 그 눈동자에 스민 웃음이 형형하여 눈부실 정도였어.
9. 넌 누구
오늘의 아름다움은 두 눈에 번지는 위선. 낮공에서는(밤공도) 넘어지지 않았는데, 균형을 잃고 휘청이다 헛디디는 발이 아름다웠다.
더불어 새로운 강세가 생겼다. 초상화 앞에 주저앉은 채로 현실을 부정하는 대목에서. 결코 현실이 아냐, 인정 못 해. 격음절마다 악센트를 주어 음을 콕콕.
10. 무엇이 기다릴까
오늘도 난간에 기대어 아름답게 연기를 흘려보냈다. 무엇이 두려워'서'의 한숨결 역시 아름다운 포물선을 이어갔고, 담배를 정리하는 손가락도 계속 귀엽다. 여기까지가 초반의 동일했던 점.
달랐던 부분은 '가만 있자아, 가만 있자아-아-아아!' 두 번째 문장의 어미를 길게 늘여 탄성으로 끌어갔다. 생각의 끝에 방향을 찾은 음성을 표현해내기에 제격이었다. 낮밤 모두.
낮공에서는 배질의 고백에는 오랜만에 소리 낸 웃음을 들려주었다. 낭창이는 고개가 오랜 시간 품어온 무거운 마음을 너무도 가벼이 다루었다. 잔인한 만큼 모질었고, 그만큼 아름다웠다.
당신이 만든 '나'는 어제보다도 강해져 기뻤다. 낮밤 모두! 그 언젠가의 치는 듯한 소리도 다시 들을 수 있었으면.
내 영혼의 비밀 역시 근래 중 가장 강했다.
찬란한 아름다움은 28일의 퇴폐였다. 아름다웠어. '후회 없으라'는 말 그대로 찬란하게 아름다울 정도로.
유혹의 대사. 오랜만에 왼손이 어깨를 벗어나 배질의 뒷목을 그러쥐었다. 마치 갈퀴처럼 감싸 안은 손.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밤공에서는 고개가 충분히 마주하지 않았던 탓에 배질의 목덜미를 재차 움켜쥐어 끌어당겨 입맞춤했다.
11. Life of Joy
낮공. 오늘처럼 계단을 내려오는 걸음이 아름답게, 마치 팔랑이는 꽃잎같던 적이 있던가. 날개 달린 잎사귀처럼 계단을 딛는 무중력의 걸음에 와, 감탄을.
안-개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거죠. 약간의 변화. 전 문장에서 바로 이어가지 않고 몸을 틀어 어둠 속의 헨리 워튼을 바라보다, 톡 뱉어냈다. 마치 헨리 워튼의 모습에서 이 대사를 이끌어내는 것처럼.
모두가 널 떠나갔어! 네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배질의 외침에 그가 질색하며 웃었다. 바람 새는 소리로 흘려진 헛웃음이었다. 기가 찬 듯. 그래서 어쩌라는 듯. 그래도 소용없다는 듯.
삶의 두 얼굴ㅡ로 헨리 워튼과 마주하고 있던 몸이 배질에 의해 팽개쳐진 후, 팽그르르 온 힘을 다해 돌아서선 배질을 쏘아보았다. 노려보는 눈동자가 독하게 반짝거렸다. 신경질적으로 배질을 등진 후에는 피곤하기 그지없다는 투로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번잡스럽다는 듯. 그리고는 옷깃을 착 내려 잡으며 혀로 입술을 쓸었어.
밤공에선 오랜만에 배질이 닿았던 팔을 툭 털어냈다. 곧이어 낮공에서와 같이 앞머리를 살짝 넘겼고, 배질을 등진 채 무대 끝까지 성큼성큼 멀어져 가서는 온 얼굴로 웃었다. 일그러진 비소였다.
낮공. 최근대로라면 그의 손목을 잡아야 하는 배질의 손이 오늘은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두 사람이 너무 밀착하여 대치한 탓에 손목을 잡아채어 저지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리고 낮공에서 살짝 엉켰기 때문일까. 밤공에선 합을 조율하고 나온 것처럼 매우 알맞은 타이밍에 정확하게 손목을 잡아챘고, 밀쳐냈다.
절창부. 첫 life of joy 직후 웃음에 소리를 섞어 넣는 것이 맞다. 숨결처럼 확 꽂혀 드는 소리가 작지만 존재해.
12. 너를 보낸다 reprise
밤공에서 샬롯이 시빌이 되었다. '시빌 베인, 아주 위험한 여자였어요.'
너다운 말이네. 양심이 느껴지지 않는 냉혹한 그 말. 배질을 돌아보는 눈에 언짢은 기색이 확연했다. 살짝만 접힌 한쪽 미간에서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되레 캐묻는 것 같은 눈이었다.
난 그녀를 용서해주었어요. 낮공. 배질의 어깨 부근에 닿았던 손이 옷깃을 살그머니 움켜쥐었다. 내 말에 동의해.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에는 급기야 웃음이 스몄다. 기가 찼던 걸까. 네가 날 떠날 수 없도 떠나서도 안 된다는 걸 잊었나? 하는 것 같았어. 밤공에서는 다소간의 정색에 가까웠다.
난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ㅡ는 또 변했다. 오늘은 길을 잃은 목소리였다. 한땐 그랬는데, 지금 난 어디에 있는 걸까. 되묻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어때, 이십 년 전 내가 그린 그대로야. 에서도. 왈칵 치밀어오른 알 수 없는 감정이 배질을 타격했다.
여전히 아름다워. 하지만 네 영혼은! 그 말에 살의를 띈 눈동자가 급하게 좌우로 고갯짓을 했다(낮공). 무언가를 찾는 듯이. 의지할 무언가를 수색하듯이.
낮공. 오랜만에, 칼을 놓친 것이 아니라 떨쳐냈다. 끔찍한 것을 떨구어내는 것처럼 저 멀리로. 밤공에서는 이전처럼 망연자실해진 손안에서 흘러내린 칼이 맥없이 바닥에 박혔다.
13. 앨런의 죽음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도. '그러면 경찰에게 넘길 거예요.'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질린 미간에서 비통함이 묻어났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얼굴이 무엇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앨런을 위협했다. 다급하면서도 비통한 협박. 인간적이었다.
앨런을 다락으로 내몬 이후 이마를 짚는 손등이 휘청거렸다. 마침내 한숨 돌리겠다는 듯. 혹은 지친 듯. 질끈 감아 내린 눈에서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비밀은 꼭 지켜주세요. 터덜터덜. 절뚝이는 것만 같은 비틀대는 육신이 어둠 속으로 몸을 맡겼다.
14. 사라진 아름다움
햄릿의 대사는 점점 더 쫓긴다. 초상화에 잡혀먹히지 않기 위해 한껏 달아나는 것만 같아.
심장이 없는 얼굴에 이르면, 제발 구해달라는 얼굴이 된다. 자신의 심장 부근을 이제는 아프게 움켜쥐어 보이면서까지 고통을 호소한다.
헨리, 만약에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오늘은 고백조 이상의 의문문이었다. 헨리, 내가 배질을 죽였어요. 나는 어떻게 되는가요?
피할 수 없는 숙-명. 밤공에서는 오랜만에 헨리 워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헨리 워튼에게는 늘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감정이 든다.
15. 도리안 그레이
A에서 바라보는 '모두가 사랑했던 도리안'이 닿을 듯 닿지 않는 서글픈 아름다움이라면, C의 도리안 그레이에서는 초상화로 다가가는 뒷모습이 아픈 그림이었다. 터덜터덜. 두려운 걸음으로도 멈추지 않고 무채색의 지워진 얼굴을 향하여 다가서는 뒷모습이 아렸다.
(+)
세상이 바뀐 시간. 브랜든 부인은 오랜만에 쿠션을 베고 그대로 누웠다. 낮밤 모두. 낮공에선 심지어 쿠션을 든 채로(ㅋㅋ) 일행들과 합류했다.
배질의 애드립. 낮공. 잠깐잠깐잠깐. 나는 그냥 배질이라고 불러.
밤공에선 그레이와 워튼. 인사 그만하자! 제일 웃겼당. ㅋㅋ
가능하다면 오늘 낮공의 도리안 그레이를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