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었으면 했고, 구원을 위해 그렇게 싸웠고, 그러나 끝내는 구원이 아님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길고 긴 여정이었는데. 오늘의 그가 모든 것에 안식을 주었다. 그래. 구원일 수 없다. 구원이어서도 안 된다. 이제 나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일곱째의 당신을 뿌리까지 사랑할 수 있다.
고마워요.
*
오늘의 도리안 그레이. 10월 15일의 회한이었다. 울음으로 어여쁘게 빚은 노래는 '도대체 누군가'에서 격정을 맞아 침몰했다.
초상화를 더듬더듬 매만져 올라가는 손끝이 아팠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종이를 뜯어내어서라도 얼룩진 죄악의 생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의지처럼 보였으므로.
푸른 핏줄 심장을 뚫고 날 깨운다
오랜만의 C. 평소와 달라진 각도 때문이었을까. 다른 날보다 유난히 푸르러 시린 조명이었다. 그것도 그를 향하여 곧장 쏟아지지 않고, 그의 눈앞으로 눈 시리게 쏟아져 내린. 안식조차도 그를 피해가는가 싶어, 그를 비켜간 푸른 빛에 눈이 쓰렸다. 그런데,
그가 기어왔다.
자신을 외면한 푸른빛ㅡ조금씩 황금의 따스한 빛으로 번져가는 안식의 그늘을 향하여 안간힘을 다하여 기어왔다. 구원에의 의지를, 참회에의 의지를 표출하는 것 같은 그 무릎 걸음이 심장을 타격했다. 눈앞의 그가 따가워 견딜 수 없었다.
황금 빛깔 천국이 내게 펼쳐진다
엉금엉금 가까스로 그 빛 안에 몸을 뉘인 육신이 멈추어 서서 정면을 보았다
조금씩 웃음 번지기 시작하는 얼굴 위로 차갑디차가운 하얀빛이 무정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 그의 말대로라면 그 순간 보고 있었겠지. 그 눈앞에 펼쳐져 있었겠지.
아름다운 소년이
아름다웠던 그 자신과,
나를
모두가 나란한 허황의 낙원을.
한껏 뻗어진 손이 공허한 허공을 그러쥘 듯 오므리려 하였으나, 손동작은 움찔거림에 그쳤다. 죽음에 잠식된 육신에 차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부른
허황의 낙원은 끝까지 그에게 머물었을까. 아니면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그를 떠났을까.
다
끝내 울음으로 되돌아가 스러지는 얼굴에서는.. 꼭 부정의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아, 남겨진 나의 마음이 처창해질 수밖에 없었다. 끝끝내 혼자 되어 어둠으로 묻혀가는 웅크린 몸이 참으로 작디작았다.
*
1. 등장
오늘 왜 이렇게나 첫 순간의 그가 애틋하였을까. 직전에 너무도 오랜만의 시아준수를 만났기 때문에? 시아준수이되 시아준수가 아닌, 또 결국에는 시아준수인 그가 두 눈에 선연하여? 나조차도 전부 알 수 없는 격랑 속에서 순백의 나비처럼 팔랑이는 그를 맞이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 시리고 벅찬 감각이었다.
2. 배질의 화실
시아준수로서 말하는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었기 때문일까. '가지 마세요 헨리. 따분하거든요.'의 어조가 유난히 살그러워, 무척 도리안답다 여겼다. 살랑살랑, 나른나른. 모 이로케 예뻐?
예쁨도 예쁨이지만 목소리의 톤이 평소보다 밝고 높아, 천진했다. 소년스러움 한 가득. 그래서인지 헨리 워튼의 나쁜 영향에 곧장 물드는 그가 더욱 안타까웠다. 그 곁의 사람들은 왜 지켜주지 못하였나. 그는 왜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까.. 싶어서.
3.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무대 끝까지 나와 하얀 조명 아래 반짝이는 그가 정말 아름다웠다. 늘 생명력 넘치게 빛을 내는 눈동자에서 반사되는 경이에 조명이 더해져 더욱 반짝반짝. 그러하니 오늘의 경탄은 촉촉한 눈망울과 촉촉한 콧방울, 그리고 향기롭게 젖은 입술에.
4.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피-할↗거↗야↗에 약 스타카토가 도입된 이래 그 어미가 이렇게나 처절하게 아름다웠던 적이 있던가.
아, 그리고 오늘 '나의 얼-굴' 직전 초상화에게로 뛰어가면서 배질과 그만 다리가 엉킬 뻔하였는데, 그가 순간적으로 두 발을 폴짝 높이 뛰어 충돌을 피하는 순발력을 보았당.
아니 그런데 헨리 워튼은 그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잔인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한담.
5. 최악의 줄리엣
오늘의 줄리엣이 정말 좋았다. 정확히는 버림받는 순간의 줄리엣이. 대사 하나하나의 호흡이 좋았고, 그 안에서 요동치는 그의 좌절감이 좋았다. 운명 같던 사랑이 한순간에 조각 나버린 상실감에, 눈앞에 있는 그 '사랑의 대상'에게 마구 상처 주는 그가 잔인하게 아름다웠어.
또 '배질에게 미안하고, 시빌 베인에게 미안하다'는 그의 언어를 육성으로 들었기 때문일까. 이어지는 꿈속에서 만나요에서도 평소 이상으로(혹은 처음으로) 마음이 일렁일렁했다. 삶을 저버리는 시빌 베인은 물론, 그녀로 인하여 그가 걷게 될 앞으로의 일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기에.
6.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오랜만의 C. 그래서 오늘 헨리 워튼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동자ㅡ제가 시빌 베인을 죽였어요ㅡ를 볼 생각에 두근두근 했는데 어머나. 헨리 워튼을 바라보지 않았다. 피아노의 텅 빈 악보대에 놓인 시선이 움직임조차 잊은 채 그대로 멎어 있었어. 찰나의 아쉬움도 잠시, 그 길 잃은 시선의 옆얼굴이 쓰렸다.
'이어서' 부르는 찬란한 아름다움의 차례. 왼 어깨에는 주홍빛 조명이, 오른 어깨에는 헨리 워튼의 손이 드리워진 그는 보아도 보아도 심장을 어그러트린다. 그의 양어깨에 드리워진 죄악이 마음을 무겁게 해. 앞으로 그가 지고 가게 될 죄악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므로 늘 안타까움을 동반하지만, 요즘은 심장을 콕콕 쑤실 정도로 조여와. 오늘도 마음이 너무 따가웠다.
7. Against Nature
개인적으로 오늘의 음향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와, Against Nature에서는 가히 최고였다. 헤어날 곳 없는, 출구 없는 사운드의 폭포. 황홀했다. 수없이 쏟아지는 음의 향연에서 가장 짙고 가장 처절한 그의 음성이 귀에 내리꽂히는 감각. 최고야. 가히 중간 박수가 나올 법한 아름다운 소리의 향연!
그리고 뭐양. 오늘 양손을 활짝 내뻗고 고개를 돌리면서 사르르 웃었다. 타락의 질주에서 그것을 음미하듯이! 으앙. 얼굴만 본 나 잘했어. 역시 얼굴이 최고다.
또, 오랜만에 호흡에 박자를 허락했다. 떨려오는 붉은 '내 심-장.' 내쉬고 들이쉬는 숨으로 음을 상쇄시켰어. 아, 이 소리가 너무도 절묘하였던 게 마치 타락에 몰두하여 자신의 순수를 놓아버리는 순간의 그를 형상화해낸 바로 그 소리 같아서. 짜릿했다. 동시에 그렇게나 가속도에 오른 그의 타락이 안타까웠고.
초반의 스모그는 오늘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조금 더 자제해주세요. 죄-악의 황홀한 절!정!에서 이글거리는 그 눈동자를 선명하게 보고 싶어요. 여기서 쩨일 좋아하는 가사란 말이양.
8. 무엇이 기다릴까
손을 떼고 입술로만 담배를 문 얼굴이 고개를 한껏 뒤로 하여 나른-나른해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그는 알까.
배질을 향하여 웃는 듯 마는 듯 부드럽게 풀린 얼굴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로 연기를 내뿜는 자세가 또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까. '후우' 내뱉는 한숨결에 살랑거리는 듯한 음성을 실으면 또 얼마나 위험한지는!
심지어 오늘은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꽂아넣고, 마치 항복하듯 활짝 핀 손바닥을 안녕~ 하듯 좌우로 장난스레 살랑이기까지 했다. 살짝 꺾인 고개에서 흐르는 나른한 미소와 함께. 와아, 내가 배질이었으면 쓰러졌을 거야.
오늘의 소리는 내 영혼의 비'밀'. 잔뜩 긁는 소리를 섞어 걸어 잠근 어미에서 갈퀴가 느껴졌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면 너 또한 이 진실의 나락으로 떨어트려 주지ㅡ하는 듯한 기세로. 곧장 찬란한 아름다움의 아지랑이를 흩뿌리며 배질을 몰아가는 그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배덕하게, 잔인하게.
그리고 오늘도 보았네. 침실 조명하에서 자켓을 벗기기 전 배질의 턱을 사르르 쓸어내리는 손끝. 배질의 머리 꼭대기에 선 듯한 미소와 함께.
9. 또 다른 나
내 속죄는 진실로 내 뜻인 걸↗까의 밀당이 돌아왔다. 만세. 심지어 들은 중 가장 길고 아름다워서 울먹울먹. 우리 다시 헤어지지 마요.
10. Life of Joy
인간을 매혹하는 건 불확실성이에요ㅡ깔깔깔 웃음 속에서 대사를 짜내며 배질에게 우습다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배질을 짐짓 안타깝게 여기는 듯한 음성이었다. 얄밉고도 쓰렸다. '고통? 난 행복해요.' 하던 그 음성에서 묻어나는 그의 속사정을 모를 수 없기에.
따라 와! 배질이 손목을 움켜쥐고 끌고 가는 순간, 몸이 돌려지기 전까지ㅡ끝까지 헨리 워튼에게 머무는 시선을 보았다. 뭐랄까. 배질이 아무리 다그쳐도 결국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life of joy의 그를 전부 축약하여 보여주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자신의 죄악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것으로부터 한사코 떠나려 하지 않는 끈질긴 시선. 묘했어.
소리적으로는 긁는 소리의 향연. 오늘따라 금속성의 파열음이 매우 거셌는데, 무엇보다 찬란한 아름다움 직전의 소절들이 특히. '눈물이 없는 성공이 무슨 소용 있을까↗' 곧이어 배질에게 잡힌 손목을 뿌리쳐내며, 있는 대로 성을 낼 때도 엎드려 날개를 펼쳐내듯이 '고통이 없는 환희가 무슨 소용 있을까↘' 번갈아 상하의 대칭을 이룩한 긁는 소리가 그 자체로 배덕하여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다.
첫 번째 life of joy 후엔 무엇이 그리 맺히는지, 흐힛ㅡ하는 선명한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여기서 단말마처럼 내뱉는 웃음이 점점 짙어진다. 그끄제보다 그제, 그제보다 오늘.
11. 악의 꽃
오늘 눈에 박힌 건 계단을 내려오는 그. 사뿐사뿐 구름을 밟는 것 같은 걸음이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얼굴을 보는 것도 잊을 만큼 향기로운 걸음이었어.
12. 천사의 추락
오늘 레퀴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었으니, 이다음에는 천사의 추락에서 헨리 워튼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무감하던 눈에 얼핏 스치는 허망함, 고통처럼 일그러지던 빛, 끝내의 처창한 웃음. 알 듯 말 듯 하여 종잡을 수 없어.
13. 너를 보낸다 reprise
그의 방 뒤편. 창틀에 가득 번진 초록빛 테두리. 그가 샬롯 베인의 죽음이 남긴 잔상에 잠식되어 있음을 드러내어 주는 죽음의 그림자. 시빌 베인의 죽음 이후에도 그랬지. 그때는 그의 금빛 머리칼과 떠는 어깨 위로 죽음의 초록빛이 쏟아져 내렸었다. 그때 그는 온몸으로 그 초록빛을 맞으며 영혼의 고통에 떨었었다. 2막에서도 죽음을 겪은 그에게로 초록빛이 되찾아오지만, 같은 듯 다르다. 2막에서는 그의 육신 위로는 결코 닿지 못해. 여기 샬롯 베인의 죽음에서도, 배질의 죽음 후 앨런과 마주할 때도. 그저 먼 뒤편의 배경에만 머물 뿐인 죽음의 그림자는, 그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동시에 1막에서와같이 고통에 떨던 순수한 영혼은 더는 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오늘도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의 소리 없는 웃음을 '보았다'. 사르르 만면에 스민 웃음이 꼭 네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되묻는 표정이었다.
배질을 찌르기 직전에 보여준 오늘의 얼굴은 대체 뭐라 해야 할까.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는 얼굴에 고통의 울음이 모여들다, 폭발하는 순간ㅡ배질을 향하여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격정으로 돌진했다. 아, 이 영혼을 대체 어찌하면 좋아.
넌 구원받을 수 있어, 도리안.
온몸은 그에게 의지하여 무너진 채로, 생의 남은 힘을 짜내어 그를 도닥이는 죽어가는 자의 손이 눈에 박혔다. 평소보다 두어차례 더해진 토닥임이 그의 팔에 톡톡 닿아 가라앉았다.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같던 목소리와 도리어 그를 위로하는 것 같던 도닥임. 그것이 불러일으킨 감각은 대단히 기묘했다. 그에게도 그랬던 걸까. 자신이 스러트린 생명을 보는 눈에 언뜻 끔찍한 자기염오가 스쳐갔다. 손안에 쥔 칼을 떨쳐내는 팔이 질색했다. 자기 자신의 죄악을 털어내려는 듯이 다급한 동작이 처창했다.
14. 사라진 아름다움
혹시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물음을 던진 얼굴에서 눈동자가 번득였다. 헨리 워튼만을 향하여 고정된 눈동자가 깜빡임조차 거의 잊은 채 집요하게 대답을 좇았다. '샌프란시스코'라는 아무 말을 얻어낸 얼굴이, 바로 그걸 원했다는 듯 어렴풋한 웃음을 그린 것을 보았을 때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그러나,
헨리, 만약에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결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얼굴이 멍하게 굳어갔다. 선을 넘어버린 자신을 끝내 확인받은 얼굴에 떨림이 번져 들었다.
허상이라 외면했어도
헨리 워튼에게 매달리듯 다가서서, 바짝 들어 올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았다. 그 눈이 꼭 자신을 송두리째 허상으로 칭하는 것만 같아 쓰렸다.
조여오던 내 심장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하여 제 심장을 감싸 안는 손으로는 스스로를 끌어안는 듯했다. 그 순간의 그가 헨리 워튼에게 바라는 것이 딱 그런 포용이었을까 싶게.
깊은 고통
통각을 형상화해내는 것 같은 파열음의 '고통'과 함께 거의 헨리 워튼의 멱살을 쥐듯 매달리는 육신은, 그럼에도 끝내 그 어떤 동정도, 어떤 공감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멀어져가는 헨리 워튼의 얼굴에 그의 두 눈이 있는 대로 흔들리다 떨구어졌다.
최후의 순간. 넌,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 턱 끝에 달려 달랑이던 눈물이 꼭 끄트머리에 몰려 간신히 서 있는 그를 닮았다 여겼다.
15. 레퀴엠
글로스터와 악수하는 오른 볼에 또르르 흘러내리던 눈물 한줄기. 시빌 베인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한 손으로 가린 얼굴. 가까스로 마주한 오른 볼에 흥건하게 흘러내린 눈물. 그 미소를 보여달라는 노랫소리에 애써서 지어 보인 아름다운 미소.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배질의 목소리에 사르르 떨리며, 조심조심 날아가 안기던 등. 헨리 워튼과 나란히 보며, 울음으로 웃던 얼굴.
오늘도 다시, 당신의 걸음 하나에 나의 눈물 하나.
(+)
오늘은 다시 칼날면으로 목을 그었다.
최악의 줄리엣. 배질이 안 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걔 왔으면 싸움 났어.
그리고 오늘도 새침하게 검지를 가져다 대며 '노코멘트.'
조명 안으로 그가 비척비척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것은 지난주 즈음부터 생겼던 변화라 한다. 타이밍은 매번 일정하지 않지만 꾸준히 변해왔다고. 그간 '얼굴'만 보았던 나는 오늘에서야 보았다. (그리고 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잘 보지 못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