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도리안 그레이에 다시 깃발 하나. 막공이었어도 좋았을, 그런 공연이었다.
 
 
쨍그랑, 손에서 미끄러진 칼이 날카롭게 처박히며 내는 소리였다. 제법 크게 울린 파열음이었으나 그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추어올린 고개 그대로 멎은 몸이, 하이얀 조명 속에서 질끈 감은 눈으로 죽음의 감각을 삼키고 있었다. 하늘을 향한 시선 끝 눈가에서 한줄기 눈물이 떨구어졌다. 빛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물 줄기가 하강선을 그리는 그의 생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육신이 비틀비틀 걸었다. 엇갈려 걷는 다리 끝에 쓰러지기 전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한 곡선을 품는다 싶더니 풀썩, 바스러지는 낙엽과 같은 웃음을 잠시 머금었다.
아, 다시 만난 해방의 웃음(10-08). 제 생을 종결해낸 이의 소진된 웃음이었다. 모든 것을 끝내고 개운해진 얼굴의 웃음에 시야가 단박에 흐려졌다.
 
기어코 빛 속으로 기어온 몸이 상체를 똑바로 일으켜 앞을 보았다. 한 곳에 멎은 눈은 '황금 빛깔 천국'을 보면서도 고요했다. 늘어진 두 팔은 평소와 같이 천국을 품지 않았다. '아름다운 소년' 앞에서야 겨우겨우 들어 올린 팔은, 그러나 역시 그 소년을 매만지지도 잡지도 못했다.
알고 있었다. 오늘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허상임을, 자신에게 펼쳐진 최후의 잔상이 허황된 낙원임을. 하지만 그래서 웃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웃지도 울음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얼굴은 주저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웃을 자격도 없기에. 눈 앞에 펼쳐진 소망을 향해 웃어 보일 조금의 권리도 없기에.
그래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허상임을 알고 있던 오늘의 눈은,
나를 부른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울음 속에 무너졌다.
 
차마 웃지 못하던 얼굴이 완연한 울음으로 번지는 찰나에 그를 스쳐 간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웃을 자격도 없지만 울음할 자격도 없는 자신을 아는 얼굴. 죄책감에 소리죽여 몸서리치던 눈.
마치, 이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자문하는 것 같던, 그 깊이를 모르고 나락이었던 눈동자.

그의 구원을 빌어줄 수 없는 나임에도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었던 그 얼굴을, 어떻게 다 이를까.
 
 
*
 
0.
오늘의 음향은 넌 누구, Against Nature, 또 다른 나.
오늘의 소리는 사라진 아름다움과, 10월 8일의 고조를 따른 도리안 그레이.
 
1. 배질의 화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에서 정확한 타이밍의 찡긋. 오랜만이야.
 
2.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음향의 기복에 영향받지 않는 유일한 넘버. 오늘의 음향은 양호한 편이었지만, 애초에 음향과는 상관없이 정말로 좋았다. 특히 헨리 워튼과 마주한 소절부터 마지막까지는 숨을 쉴 수 없었어. 그의 심장처럼 쿵쾅대는 소절이 직격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3. 최악의 줄리엣
세상에. 오페라글라스 군단의 깜짝 등장. 심지어 앨런은 돋보기를 들고 있었다. ㅋㅋ
아니 그런데 시아준수, 왜 오페라글라스를 그렇게 멀찍이 떼고 보는 거지요? 그럼 뭐가 보이나요? 세상에 오페라글라스에 웃고, 그것을 든 자세의 매글스러움에 또 웃었다. 시빌 베인이 대사할 차례가 되자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그녀에게로 움직이는 오페라글라스들에도 웃었어. 단단히 벼르고 나온 것 같은 네 사람이었다.
 
뿐 아니야. 시빌 베인의 발연기 후에는 뭔가를 잘못 보았나, 연신 오페라 글라스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다급한 마음이 오페라글라스를 후다닥 내려서 맨눈으로도 보아보고, 팔꿈치로 닦아서도 보았다. 퇴장 직전까지도! 암전된 후에도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오페라글라스를 눈으로 한껏 붙여서 그녀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꿈이 아님을 확인받은 순간엔, 평소처럼 격하게 난간을 쾅! 몸을 팽! 묻어버렸고.
 
4.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오필리어의 죽음 앞에서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가 웃는가 싶다니 그대로 벌려져 경악했다. 제 눈 앞에 펼쳐진 신세계에 두 눈이 출렁이며 요동쳤다. 헨리 워튼을 회전축 삼아 코너를 돌며 부풀던 그 눈이, 헨리 워튼의 시선이 멎은 어딘가의 지점을 좇아 움직였다. 마치 시선을 이어받듯이 헨리 워튼에게서 그로 옮겨진 소실점이 블랙홀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자석처럼 이끌리는 걸음으로 그가 주홍빛 조명 속으로 찬찬히 걸어 들어갔다. 어깨 위로 불온한 빛을 가득 머금었을 무렵ㅡ곧 그가 마침내 헨리 워튼의 노래를 '이어서' 부르는 순간. 기묘하게 웃음 번진 입가에 어그러진 아름다움이 찬란했다.
 
5. Against Nature
오랜만에 '음향'이, 정말로 짜릿했다. 1막에서 이대로 막을 내려도 좋을 것만 같은 폭발음들. 아, 최고야. 특히 신이'시'여에서의 파열음! 이렇게 귀를 할퀴는 소리는 정말 오랜만. 반가웠다. 눈으로 다가오는 것보다 소리에 황홀하여, 짜릿하여 주체 못 할 감각이 얼마 만인지(얼빠는 늘 시각에 약하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신이'시'여만큼 특히 좋았던 소리는 꿈틀대는 푸른 핏줄의 고동. 심장박동을 형상화한 것 같은 소리에 내 심장도 덩달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고동 그 자체인 소리였다.
 
6. 무엇이 기다릴까
'요즈음' 너무 힘들어요, 시작부터 그을린 목소리. 그래, 힘들다. 빈말이 아니다. 웃고 있지만 잔뜩 일그러진 채다. 다시, 새삼스레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를 몰아가기 시작하는 배질을 멈추어 세우고 싶었다. 그렇게 궁지로만 몰지 말고, 그렇게 몰아세우지만 말고 그를 봐 줘. 꾸짖음보다 보듬는 손길이 필요한 그를 부디 알아줘요.
 
꾸짖음은, 염려는 역시 그를 스쳐 갈 뿐이다. 배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얼굴이 허공으로 연기를 뿌렸다. 제 앞으로 몽글몽글 피어난 연기를 몽롱한 눈이 좇았다. 구름을 헤치듯 깜빡이는 눈이 흐렸다. 그 모습에 배질의 표정이 더욱 굳어진 건 말할 것도 없지.
 
날 사랑했던 당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의 시선 처리는 가장 정석적으로 아름다웠다.
'날 사랑했던,'
고개를 살짝 올려, 배질이 아닌 허공 저 멀리로 던진 시선이 꿈꾸듯이 선포했다. 곧이어 사르르 배질 쪽으로 향한 고개가ㅡ하지만 배질을 보지는 않는 시선이 말했다.
'당신의 마음을,'
마지막 어절ㅡ'들킬까 봐'에서는 얄궂게도 배질의 눈을 정확하게 마주한 그가 있었다. 자신이 던진 주사위에 배질이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보겠노라는 듯한 짓궂은 시선이었다. 살그머니 웃음 그린 입꼬리에는 배질이 간직해온 수세월의 마음에 대한 그 어떤 진지한 배려도 없었다. 상대를 자유자재로 농락하는 그가 잔인한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후회 없으'라'의 강함은 거짓 없는 '환희'로 옮겨간 지 여러 날째. 오늘은 그간 중 가장 강했다. 마치 거짓 없는 환희를 강제할 기세로 소리가 음을 찍어냈다. 호흡할 수 없게 몰아세웠다. 배질을, 듣는 이를.
 
그리고 각도상 정말로 오랜만에 가림없이 본 침실 안쪽에서의 얼굴. 그렇게 새하얗게, 또 그렇게 새까맣게 웃었구나. 입꼬리를 사르륵 말아 올려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배질을 보며, 쏘아보듯 강렬하고도 살그러운 눈으로 그렇게 웃었구나. 아름다웠다.
 
7. 또 다른 나
사랑하는 '내 속죄는 진실로 내 뜻인 걸↗까'의 미는 박자는 없었지만, 가히 최고의 소리였다. 소리가 좋았고 그 소리를 받아내는 음향이 좋았다. 좋았어. 너무 행복했어. 가득한 울림, 공간을 채우는 진동, 끝없는 진폭. 바라던, 상상하던 막 없이 퇴장 없이 온전한 또 다른 나라면 이런 소리이지 않을까 싶은 그런 소리였다.
 
8. 너를 보낸다 reprise
베/푼/거/예/요ㅡ마이크가 꺼지고도 선명하게 들리는 고통의 웃음소리가 처창했다. 끅, 끅, 목구멍을 긁어 내뱉는 웃음이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떠난다는 말에 그가 발을 쿵, 박았다. 이어 터져 나온 웃음이 어처구니없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배질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침묵의 추궁조로 그가 빤히 보았다. 기울인 고개가 벼르듯 어르듯 배질을 향한 채로 멎었다. 그러나 평소와 같이 그의 시선으로 배질이 찾아오지 않았다. 푹 떨군 고개로 그늘을 드리운 채, 차마 그를 마주하지 못하는 배질이 혼잣말 같은 이별을 고했다.
네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워. 이렇게 떠나는 나를 용서해줘.
고개 숙인 배질이 가까스로 얼굴을 들어 그를 마주하였을 때는 그의 시선이 배질을 떠난 후였다. 이 엇갈린 시선이 너무도 비극적이었다. 그를 되돌리려 하였던 배질과, 어떤 방식으로든 배질을 필요로 하였던 그였느나, 끝내 빚어진 비극을 상징하는 듯한 엇갈림이었다. 끝끝내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한 두 사람의 운명과도 같았다.
 
이십 년 전 네가 그려준 그대로야.
마른 혀를 축인 입술이 으르렁댔다.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멱살을 쥐어 잡은 그가 소리쳤다. 절박한 얼굴은 이미 울고 있었다. 온몸으로 '제발'이라 외치는 듯한 그였다.
여전히 젊고! 여전히 아름다워! 전문은 절규, 후문은 흐느낌. 원래대로 돌아온 배질의 대답에 그가 뒷걸음쳤다. 화들짝 질린 얼굴이 빠르게 좌, 우를 찍었다. 이렇게 분명하게 두리번거리는 고개는 오랜만. 그 쫓기는 기색이 아팠다. 도망치듯 어둠 속으로 몸을 맡긴 그의 등을 향해 배질이 소리쳤다.
넌 어디로 사라진 거야!
 
마지막 말. '넌 구원 받을 수 있어, 도리안.' 의 어미가 실로 오랜만에 아랫곡선을 그렸다. 끌어올리고자 애썼으나 차마 그럴 힘을 내지 못한 음성이었다. 상승하지 못한 마지막 음절이 또 그렇게 사무쳤다. 구원을 바라도 구원을 얻지 못할 그를, 이렇게 소리로 확인하게 되면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9. 사라진 아름다움
가장 서슬 퍼렜던 오늘의 사라진 아름다움. 울었고, 소리쳤고, 애원했다. '깊은 고통'이 이렇게까지 미어지는 쇳소리였던 적이 있었나. 그 순간의 짓이겨진 소리 자체가 그였다. 상처로 얼룩진 날개를 늘어트린 채 헨리 워튼의 멱살을 붙잡아 흔드는, 바로 그였다. 귀를 타격한 금속성이 심장을 쳤다. 안 그래도 늘 아픈 지점에서, 급작스러운 홍역에 걸린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회한의 듀엣ㅡ우리가 가지려던 삶의 환희 무엇이었나ㅡ는 마음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언젠가부터 회한이 울음이 된 그였는데, 오늘은 완전하게 동그랗게 말린 울음의 소리였다. 먹먹한 음성이 꾸역꾸역 울음을 삼켜가며 노래했다. 눈가로는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으며, '우리'라 부르는 상대를 마주한 얼굴로, 하지만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시선을 나누며.
끝내 그를 돌려세우며 '그 초상화'를 찾는 헨리 워튼은 쐐기였다. 돌려 세워진 몸으로 그는 차마 눈을 뜨지도 못하고 울었다. 눈앞의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운 듯 감긴 눈이 또 그렇게 아팠다. 조심조심, 살피는 눈동자로 힘겹게 눈을 떠보였을 때는 헨리 워튼이 모든 진실을 파헤친 후였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선 그가 다락 위에 우뚝 선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헨리, 헨리.
붙잡는 음성이 여리고 작았다.
헨리, 헨리..
통, 통 날갯짓하듯 두 팔로 허공을 헤치며 그가 다가서 보려 했다. 하지만 멀어져가는 이가 더 빠르고, 단호했다. 텅 빈 공간, 텅 빈 심장. 그에게 남겨진 것은 눈물뿐이었다.
 
 
10.
당신은 누구일까. 순수의 결정체잖아요! 문란함의 결정체!
Life of Joy. 계단을 내려오는 비틀비틀한 옆걸음.
악의 꽃. 오늘도 문을 열며 샬롯 베인을 향하여 까딱이는 고갯짓의 근사함을 보았다. 왕자님이셔.
 
배질. 둘이 안 어울리게 잘 어울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