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바뀔 것 같다.
"죄송해요. 국장님을 모욕할 생각은 없었어요."
발바닥이 보이도록 반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거꾸로 든 사탕 머리를 비스듬히 들여다보며 고분고분 대답하는 나긋한 목소리. 첫공에서부터 자꾸만 나를 흔든다. 솔직하고 곧이곧대로인 대답이 엘의 성격과 고스란히 닮아있는 것도, 게임에 몰두하였을 뿐이지 딱히 악의는 없다는 듯이 나긋한 음성인 것도. 전부 다 좋아. 최고양.
물론 초연의 가장 좋아했던 대사ㅡ"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어요, 야가미 국장님." 역시. 재연에서는 비웃음이 문장 속에서 느껴질 정도로 강하다. 비소로 시작하여 정색으로 매듭짓는 대사와 날카로운 눈빛의 조화,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도 바뀔 것 같은데, 첫공에서부터 죽음의 게임 인트로ㅡ일명 '브라우니 신'이 좋아서 주체되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등장하여 "조울증이 있는 나르시스트라고도 하죠."로 대사를 열어,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어요, 야가미 국장님."으로 맺는 순간까지 그의 연기에 감탄, 또 감탄을 해.
어떻게 이렇게 엘이지? 하는 생각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디테일, 그 디테일을 완성해내는 연기의 섬세함. 나무랄 데가 없다.
특히 속사포 대사는 정말 백미. 빠르고 강한 대사가 정확하게 귀에 꽂혀들 때의 쾌감이란, 아아, 너무 좋아요. 어떡하죠?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 "모르겠어"로 시작하여 "너에게 필요한 건 내 얼굴"로 끝나는 추리. 게임의 시작에서도 노래가 곧 엘의 추리이듯, 비밀과 거짓말에서도 이 장면이 곧 엘의 추리다. 소이치로와의 듀엣이 살아나서일까? 수사팀과의 불협화음이 돋보이고, 그런 것쯤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자신만의 추리를 계속하는 엘의 비인간적인 면모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수사팀이 자신을 의심하든 말든, 의심과 비난이 쏟아지든 아니든, 그들 사이로 정확하게 비집고 서서 "너에게 필요한 건 내 얼-굴-" 고집스레 추리에만 골몰하는 순간의 엘은 정말이지 이 장면의 꽃.
난간 위 소이치로와의 대치도 초연에서보다 훨씬 서슬 퍼렇게 진화했다. 눈먼 부정의 소이치로를 통렬하게 비웃어준 후, 미사를 내려다보는 어둠 속의 얼굴은 심지어 화가 난 것 같았다. 소이치로에게, 미사에게. 사사로운 잔정에 휩쓸려 게임의 승패에 방해되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것 같은 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첫공에서부터 일관되게 가장 좋은 장면은 '마지막 순간'. 운명의 초침을 피해 라이토를 향해 최후의 총구를 겨누는 의지는 정말 엘답지 않은가. 최후의 말이 자기확신의 희열인 것까지 전부, 엘이야.
무엇보다 엘답다 여겨 마음이 파르르해졌던 순간은 자신의 공허한 왼손을 내려다보다 꽉 움켜쥐는 그를 보았을 때. 사신의 노트가 정해둔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능동적인 수용의 주먹이라고, 꼭 그렇게 비추어졌기에.
무엇보다 엘답다 여겨 마음이 파르르해졌던 순간은 자신의 공허한 왼손을 내려다보다 꽉 움켜쥐는 그를 보았을 때. 사신의 노트가 정해둔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능동적인 수용의 주먹이라고, 꼭 그렇게 비추어졌기에.
그리고 꼭 이야기해야 하는 오른 얼굴의 잘생김. 세상에. 놈의 마음 속으로 직후 캠퍼스에 방문한 미사를 바라보는 각도의 얼굴. 제2의 키라가 들이닥친 위기일발의 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그새 찾아내고는 침착을 가장하며 미사에게로 성큼, 성큼 다가서는 각도의 얼굴. "에이틴 3월호에 나왔었죠?"로 캠퍼스의 이목을 끌며 미사와 라이토를 떼어놓는 데 성공하는 순간, 마치 계-획-대-로 되었다는 듯이 허리를 곧게 세우며 쫓겨가는 미사의 뒷모습을 흘긋이는 각도의 고개. 여기, 정말 이렇게 잘생겨도 되나요.
참 오늘의 개사 세트. 한 공연에서 이렇게 많은 개사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게임의 시작에서 한 번(인정할 수 없는 게임!), 변함없는 진실에서 또 한 번(진실은 무엇인가(?) 혹은 허상인가), 그리고 놈의 마음 속으로 솔로에서 다시 한번(나밖에 없잖아, 양심을 버리자).
변함없는 진실의 개사 이후에는 좋아하는 그 특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어 기뻤다. 실수가 집약시키는 고도의 집중력, 그것으로 고스란히 빚어내는 힘. 그가 집결시켜 노래화하는 에너지가 얼마나 좋았는지. 가끔 이 모습이 보고 싶어 그의 실수가 기다려지기도 하는데, 오늘 원 없이 봤네. 오늘의 변함없는 진실은 꼭 잘라서 다시 들어야지.
(+)
혼자만 먹어서 삐졌나요?
레몬, 레몬.
에이틴 3월호.
약간 다른 소리인데 오늘 "조울증이 있는 나르시스트라고도 하죠."를 듣는 순간 마음이 쿵.
우리 리안이도 나르시스인데, 엘도 그렇구나? 싶어서.
역시 엘 안에 도리안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