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내린 토드. 보랏빛 섀도우. 

 

베일. 오블에서는 그의 등을 보게 된다. 엘리자벳을 애틋하게 어루만지는 손과, 그녀에게 올곧게 멎어있는 뒷얼굴만을. 그의 등에서 시선을 조금만 올리면 그의 시야가 보인다. 그가 바라보고 있을 얼굴. 엘리자벳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눈물을 글썽인 채, 환희에 찬 표정이 숨김없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죽음의 표정으로 생각이 옮겨가자 마음이 무서운 속도로 갑갑해졌다. 죽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오직 다가올 자유만을 바라보고 환희에 찬 그녀.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등. 

그런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유를 위한 죽음을 선사하는 그..

 

홀로 남은 그가 안쓰러웠다. 백 년이 지나도록 심장을 뜨겁게 하는 존재를 잃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그가 아팠다. 

 

*

 

〈론도〉에서 불현듯 그의 손가락에 시선을 빼앗겼다. 엘리자벳의 시간을 멈추어두며 웨이브를 타는 손이, 마주한 엘리자벳의 손보다 한눈에 보기에도 작아서 불쑥 그게 너무 귀여웠던 것. 💦💦

 

〈마지막 춤〉에서 곧잘 느낄 수 있었던 분노는 옅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대신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조금 더 보여주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녀의 선택을 자신에 대해 잘 몰랐기에 있을 수 있었던 해프닝 정도로 치부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베일을 살짝 걷어 보이며, 아주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죽음의 진정한 면모를 알면,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지막 춤에서 좋아하는 부분. “나는 알고 있어, 마지막 순간”의 그가 정면을 노려볼 때의 서늘한 긴장감, 그러다 차츰 옮겨간 시선이 엘리자벳과 딱 마주쳤을 때 화들짝 깨지고 마는 아슬아슬함. 봐도 봐도 좋다.
또 브릿지 위에서 그의 얼굴로 쏟아지는 조명이 딱 보랏빛이라, 보랏빛 섀도우와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었던 것 역시.

 

29일 낮공에서 처음 선보였던 마지막! 춤! 의 새로운 강세는 완전히 정착했다. 오늘 버전으로 두고두고 들으면 좋을 듯해.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유독 좋았던 음성은 “이제부터 난 자유롭게 춤을 출 거야~”의 넓게 진동하는 소리. 내내 갈퀴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꺼내어 쓰다가 이 대목에서만 곧게 뻗어 나가는 울림음을 쓰는데, 기품 있는 음성이 엘리자벳의 앙칼진 목소리와 겹쳐지니 너무나도 근사했다. 대단히 신사적이어서, 죽음이 얼마나 그녀를 위해 한 수 접어주고 있는지가 명료하게 보였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에서는 사랑해 마지 않는 그의 순발력을 목격했다. “지금이야, 그것이 운-명!”의 파트. ‘야’의 찰나에 긁혀나간 목소리를 인지하는 즉시 ‘그것이 운-명’을 꽝 밟아 넣듯이 강하게 내지르는데, 와아. 강하게 치받은 음성은 흔들림 없이 퍼트러졌고, 곧장 절정이 되었다.

 

그리고 브릿지 중간에 와서도 루돌프를 손으로 콕 찍어 가리키며 웃었다. 이런 건 처음이양.

 

마지막으로. 오늘따라 입꼬리를 분명하게 올려 생글, 웃음 짓는 순간이 꽤 있었다. 
1막 〈그림자는 길어지고〉의 첫 등장에서 망연한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면서.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의 시작부에서. 침대에 몸을 나른하게 늘어트린 채 사르르 웃는 죽음이라니. 눈 녹는 듯한 부드러움으로 ‘내 품에 안겨’ 노래하는데, 오블이라 그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심지어는 삼중창에서도 웃었다. 12월 중 단 하루, 29일 밤공에서만 웃어 보였는데 그 얼굴을 오늘 다시 볼 줄이야. 낮밤 모두 웃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웃는 것일까.


(+)

 

전염병. 신영숙 엘리자벳이 “괜찮다”고 뿌리치다가 그의 얼굴을 톡 치고 말았다. 정작 시아준수는 아무런 미동이 없어서 잘못 본 것일까 갸웃했는데, 하필 마이크가 있는 쪽을 건드린 바람에 지지직 소리가 꽤 이어져서 확신했다. 예상하지 못한 찰나에 얼굴로 손이 날아오면, 순간적으로 움찔하거나 움츠러들 수도 있는데 아무런 내색이 없었던 시아준수의 프로다움에 감탄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