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깐 토드, 뿌염한 금발, 보랏빛 섀도우.
낮공. 전반적으로 훌륭한 공연이었다. 12일의 밤공과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새롭게 충전한 에너지가 모든 배우들에게서 고르게 느껴졌다. 좋은 공연에 대한 감사를 담은 박수를 기꺼이 건넬 수 있었다.
정석적인 강약의 〈마지막 춤〉이었다. 강강강 대신 약으로 시작하여 강으로 맺는 정석의 크레셴도였다. 익숙한 엘리자벳과의 호흡에서 빚어지는 안정감은 조화로움을 도맡았다. 조화의 가운데에서 가끔씩 박아넣는 변주(마-지막! 춤!)은 효과적인 임팩트가 되었다. 정석적인 조화와 이따금의 변화. 6연공의 포문을 여는 첫 마지막 춤으로 손색없었다.
색다른 느낌으로 마음에 남았던 건 1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는 얼굴의 아주 옅은 웃음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프롤로그에서 ‘차갑고 냉혹한 날 잃은 채’라 하였었지. 죽음의 차갑고도 냉혹한 일면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살풋 살풋 자꾸만 옅게 웃는 얼굴이 발치 아래에서 펼쳐지는ㅡ자신으로 인한ㅡ비극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그로 인한 그녀의 절망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헤아릴 생각이 전무한 눈으로.
그랬기에 〈추도곡〉의 혼란 가득한 눈빛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되풀이된 죽음, 거듭된 절망. 그러나 그로 인한 파장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추도곡에서의 엘리자벳의 절망은, 그림자에서와는 달리 죽음을 관통했다. 그녀의 따스한 사랑을 더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던 죽음은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를 마주하고 당황한다. 결국에는 질끈 감아버린 두 눈이, 처음으로 아파 보였다. 쓰리게 처진 눈썹이 절감하고 있었다. 차갑고 냉혹한 나를 잃은 채, 그녀를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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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그것이, 한 박자 쉬고, 운-명. 엇박으로 찍어 넣은 ‘운명’이 대단히 신선했다. 또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전염병〉. ‘황송하옵게도’에 오랜만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입꼬리로는 늘 미세한 곡선을 그려 웃고 있지만 소리 내서 웃음을 덧대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어쩌다 웃음기가 배어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죽음의 주체 못 하는 흥분이 청각으로도 전해지는 짜릿함에 정말.. 좋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품에 안고,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그를 시청각적으로 만나는 느낌이란!
참 그리고 가! 저리 가라며 절규하는 엘리자벳을 빤히 보다가 가상하다는 듯이 픽, 헛웃었다. 너의 발악조차도 내 시선 안에만 있을 수 있으니, 어디 한 번 실컷 해보렴. 하는 것처럼. 자신만만하면서도 몰인정한 실소에 도리어 내가 심쿵.
삼중창에서는 오늘도 웃었다. 지난 주말보다는 길고, 또렷하게.
볼프살롱에서는 오늘도 정색했다.
특정 노선으로 정착한 듯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보면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 늘 집중해서 기다리게 된다.
이날이었을까? 발목을 다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