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깐 토드, 보랏빛 섀도우.
푸슬푸슬했던 어제의 앞머리와는 달리 정갈하게 빗어 내려서 도련님미가 한층 돋보였다. 그리고 새삼 앞머리가 정말 많이 길었음이 느껴졌다. 눈썹 아래에까지 촘촘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음향은 원상 복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는 대단했다.
오늘의 그림자는 ‘그 끝에 서 있다’에 도달하기까지 그의 목소리가 쇠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의도가 다분히 섞인 쇳소리였다. 언뜻 파열음 같기도 한 갈라지는 소릿결을 억누를 생각조차 없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 끌어냈다.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음성이 루돌프를 얽어매고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재차 확인할 수 있었던 것. 어제 거의 멱살을 잡았던 것이 맞았다. 오늘 보니 원래는 루돌프의 목덜미를 살짝 스칠 뿐인데, 어제는 정말로 콱 움켜쥐었었어. 어제 버전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전염병〉. ‘혈색은 창백해’ 마지막 음절이 소리 반 공기 반이 되어 나직하게 흩뿌려졌다. 직후에는 아주 오랜만에 웃음기를 들었다. 반갑게도! 웃음 삼켜지는 소리가 무척이나 선명했다. 이 대목에서는 역시 웃음기 선명할 때가 좋다. 사냥감 포획을 코앞에 둔 죽음의 흥분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
또 소파에서 뛰어내리고 나서 다시 한번 발끝을 세워 도약했다. 덕분에 죽음이 엘리자벳을 향하여 다가가는 내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동선이었다. 허공에서 확 다가오는 그를 보자니, 삽시간에 문턱까지 훅 다가온 죽음을 보는 듯했다. 이것도 언제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랜만에 왼블이었기에 〈마지막 춤〉에서 브릿지를 내려오는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새삼스러웠다. 아주 은은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미약한 웃음으로 호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얼핏 무해하게도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가시를 바짝 숨겨둔 채, 얌전한 고양이처럼 브릿지를 스르르 내려오는 그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았다.
이어서는 고조되는 마지막 춤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강강강이 아니라, 충분한 예열을 거쳐 차례로 폭발해가는 마지막 춤이었다. 도입부에서 끌어모은 힘으로 첫 안무에서 1차 폭발, 두 번째 안무에서 확인사살로 재차 폭발.
특히 ‘마지막 춤!’ 하며 엘리자벳의 얼굴을 훅 그러쥘 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는데, 그 바람에 뒷머리가 잠시 허공으로 부웅 떠버렸다. 머리칼이 허공에 머무르는 그 찰나가 무척이나 그림 같았어.
브릿지 위에서의 마지막 소절 ‘우리 둘이서’에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뒤로 젖혔다. 은근하게 시작하여 격정적인 마무리였다.
삼중창은 어제와 같이 오늘도 끝까지 미소지었다. 다만 표정은 어제보다도 훨씬 매서웠다.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분명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와는 달리 어쩐지 눈만큼은 전혀 웃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