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은 떨어지고〉. 앞머리 한 가닥이 살그머니 일어나 깨비가 되었다. 귀엽게 삐죽 솟은 머리카락에 웃음이 일어나는데, 아, 엘리자벳을 향하여 손을 내민 그가 그녀를 마중 가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목격해버렸다. 마침내 죽음에게로 이끌려 오는 그녀의 걸음걸음에 속도를 맞추듯이, 끄덕, 끄덕, 끄덕, 끄덕. 천천히 연달아 네 번을.
그렇지 않아도 어제부터 ‘세상 따윈 버려. 이 세상을 가라앉게 둬’에서 마음이 쏟아지는데 오늘의 끄덕임에 그만 주체 못 할 정도로 휩쓸리고 말았다.
엘리자벳의 눈물 젖은 환희와 죽음의 이별을 각오한 사랑, 나의 설움이 함께 만든 베일이었다.
*
반내린 토드, 보랏빛 섀도우.
앞머리에 볼륨을 강하게 주어 옆얼굴일 때 이마가 볼록한 원을 그렸다. 볼륨을 넣으니 일순간 앞머리가 짧은 도리안을 보는 듯하였으나, 프롤로그의 첫 숨을 내쉬는 순간부터 환영은 사라졌다. 결코 도리안일 수는 없는 그는 죽음이었다.
언뜻 도리안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반깐 헤어의 장점은 시야에 따라 이미지가 뒤바뀌는 점에 있다. 왼-중앙의 시야로는 깐토드의 느낌이, 오블에서 바라볼 때는 내린토드의 느낌이 강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오블이었고 내린토드와 반깐토드의 사이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음향은 또 리셋되었다. 하지만 어떤 음향에서도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는 흔들림이 없다. 아니, 흔들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공연을 완성하는 수훈자의 역할을 해내고야 만다. 오늘은 특히나 꽉 막혀있던 음향이 그림자를 만나 비로소 해방되었다. 막힌 곳 없이 활짝 터트려지는 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소리를 개척해가는 그의 목소리가 탄탄하고 건강했다(어제에 이어 예의 ‘쇠가 되어가는 소절’에서도 단단했다!). 한음 한음 명쾌하게 빚어가는 그가 보랏빛 배경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굉장히 귀중한 무대의 청중이 된 느낌에 벅차올랐다.
세부적인 디테일로는: 인간은 절대 ‘볼 수 없지’에서 어제와 같이 루돌프에게 얼굴을 바싹 붙여 터트려냈다.
‘학살, 전쟁~’ 메아리치는 인간 세상을 브릿지 위에서 내려다보다, 도장을 쾅 찍듯이 손가락을 난간에 대고 까딱였다. 딱 한 번의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헝가리의 요구를 결국 승낙하고야 마는 루돌프를 보고는 오랜만에 소리 내 웃었다.
〈마지막 춤〉. 후반부가 특이하게 특별했다. 강하기도 하고, 폭발적이기도 했지만, 딴딴했다. 빈 공간 없이 맞물린 큐브를 보는 듯했다.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여지를 주지 않고 채워가는 절정이었다.
시작부. 박자를 타서 브릿지를 내려오는 움직임이 유난히 민첩했다. ‘스르륵’ 스며드는 안개를 실체화하기라도 한 듯이.
엘리자벳에게 손을 내밀면서는 선명하게 웃음 지었다. 이렇게 또렷하게 그려지는 웃음은 오랜만이기에 반가웠다. 웃음이 분명할 때의 좋은 점은 거절당한 직후의 정색이 돋보인다는 데 있다. 사르르 웃던 얼굴이 일순간에 굳으며 싸늘해지던 모습이란.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손동작. 나는 알고 있어, 로 이어지기 직전의 소절. 엘리자벳의 머리에서부터 뺨, 턱선까지 유려하게 쓰다듬어 내리는 손길이 유난히도 또렷하게 눈에 보였다. 마치 그가 손으로 붓질을 하는 것처럼.
〈전염병〉은 어제는 생략했던 디테일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혈색은 창백‘해’를 길게 끌어 노래했고, 직후의 웃음 삼키는 소리도 돌아왔다. 소파에서 뛰어내린 직후 점프하듯이 살짝 도약하는 동작까지도!
〈마이얼링 왈츠〉. 오블이었으므로 총 건네주는 얼굴을 가림 없이 볼 수 있었다. 모종의 음모를 담고 반짝이는 눈이 옅게 웃고 있었다. 입꼬리 역시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신기한 건 눈과 입에 웃음기가 분명하였음에도 전반적인 얼굴의 인상은 ‘웃고 있다’라기보다는 형형하게 이글이글하는 느낌이었다는 것. 내일도 오블이니 또 한 번 자세히 보아야겠다.
그리고 오늘따라 가슴뼈에 왜 그리 시선이 가던지. 상체를 숙인 각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움푹 그림자진 가슴이 그사이에 더 마른 것만 같았다.
참, 오른 객석을 향하여 총을 쏘는 그와 눈이 맞았다. 빵야♡
〈볼프살롱〉에서는 정색을 이어갔고, 〈행복한 종말〉에서는 설핏 웃음을 보였다. 만면에 웃음을 씨이익 그려 넣기보다는 한 번 피식 웃고 넘어가는 느낌으로. 지나쳐가는 웃음이 인간사를 비웃는 것처럼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치명적이었던 오늘의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 치명치명이란 수식어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유난히, 유난하다시피 숨 막힐 정도의 유혹이었다. 유혹적인 웃음이, 부드러움 가운데 갈퀴를 숨겨둔 오묘한 음성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위험했다. 빠져들면 안 되는데, 기꺼이 빠져들고 싶어지는 위험한 매력이 눈으로도 훤히 보였다. 정말이지 좋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몸놀림은 또 어떻게 그렇게 가벼운지. 오블이었기에 정면으로 볼 수 있었는데, 사뿐히 일어나 뾰로롱 가다듬는 자태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
사소한 이야기:
1. 삼중창. 가림천을 떼어내는 동작을 보는 것을 좋아하여 늘 유심히 바라보는데, 오늘 걷힌 천이 휙 날아가 바닥으로 풀썩 가라앉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동안 항상 천을 걷어내는 손동작 위주로 보아왔을 뿐, 날아가는 천의 행방은 미처 보지 못했는데 오늘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2. 볼프살롱. 죽음이 등장함과 동시에 푸른 섬광이 사선으로 번쩍이는 배경을 오늘에서야 보았다. 늘 얼굴만 보느라 여기에서도 배경효과가 있는 줄을 몰랐었어.
3. 커튼콜. 드디어 석호 루돌프와의 손하트에도 성공했다. 짝짝짝. 막이 닫히기 직전에는 석호 루돌프를 따라 손경례를 했다고 한다. 각도상 오블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ㅎ
시아준수 외의 이야기:
1. 〈황후는 빛나야 해〉의 김소현 엘리자벳. 소피 대공비와 에스터하지 사이에 갇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벼랑 끝까지 몰려 견디기 벅찬 엘리자벳의 심정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다른 엘리자벳들도 힘겨워하기는 하지만, 정도가 다르다. 신영숙 엘리자벳의 괴로움이 황실에 손발이 묶여 답답해하는 정도였다면, 김소현 엘리자벳은 숨이 턱 끝까지 막혀 구원이 시급해 보였다. 그래서 프란츠 요제프의 외면이 더욱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2. 강홍석 루케니의 투머치가 많이 줄어들었다. 정신병원 애드립이 절반가량으로 줄었고, 마디마다 덧붙이던 추임새도 대폭 생략되었다. 덕분에 조금 더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