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에 부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럼에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일반의 밤공, 그 주의 마지막 공연, 데뷔 기념일. 바로 이런 날에 그의 죽음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발현되는 신영숙 엘리자벳과의 공연인 것이었다.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29일에 놀라고, 1월 10일에 감탄하고, 1월 17일에 확신했던 경이가 가장 아름답게 도래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날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완벽한 하루였다. 낮밤의 공연 모두가 그랬지만, 특히 밤공이. 하다못해 〈키치 reprise〉의 화면 전환조차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장막에 드리워지는 키치 세트가 늘 한 번에 멈추지 못하고 버벅대는 탓에 내심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었는데, 어떻게 딱 오늘 밤공에서는 그 맺고 끊음조차 완벽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지막 춤〉의 직후 터져 나왔던 환호에서는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아름답고 완전한 공연을 객석의 모두가 고스란히 공유하였음을. 무대와 객석이 같은 마음으로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기뻤던 건 오늘의 완전함이 죽음만의 독주로 채워 넣은 것이 아니라, 함께 완성해낸 공연이었다는 것이다. 재연의 뮤지컬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매너리즘이 없었다. 판에 박힌 연기를 기계적으로 뽑아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로지 김준수의 죽음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던, 그래서 때로는 고통이 되었던 극이 아니었다.

모두가 성심을 다하는 무대였다. 열성을 다하는 배우들의 노력이 두 눈에 따박따박 박혔다. 무대에 임하는 열정이 제각각으로 들쑥날쑥하지 않고 같은 온도를 띄고 있음이 보였다. 그 수많은 열정의 일치가 빚어내는 개연성이 극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신영숙 엘리자벳, 손준호 요제프를 비롯하여 앙상블 모두 반짝반짝했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삶, 그들의 질투, 갖은 음모와 배신이 생생하게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이 기뻤다. 혼자만 고군분투하는 죽음이 아니라서. 같은 온도로 공연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를 볼 수 있어서. 모두가 각자의 최선을 다하는 무대에서, 그중의 한 명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를 볼 수 있었음이.

 

1막에는 엘리자벳을 향한 ‘사랑’을 정말로 표현해주는 프란츠 요제프가 있었다. 〈황후는 빛나야 해〉에서 느닷없는 호출에 놀란 얼굴로 달려와, 어머니와 아내의 대치하는 모습을 보고 심각한 염려로 얼굴이 굳어지는 요제프였다. 혼자 두지 말라며 매달리듯 안기는 엘리자벳을 꼬옥 마주 안아주는 남편이었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으면서 안심하라는 듯이 속삭여주고, 불안을 달래주는 요제프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나갈 때 엘리자벳을 향하여 눈으로는 사랑을, 입으로는 미안해를 연발하는 요제프였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면목 없이 푹 숙이는 고개까지도, 정말로 미안한 남편이었다.

 

2막에는 ‘엘리자벳’이 있었다. 이 극의 이름이 엘리자벳이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해주는. 그래도 친아들인데, 너무 몰인정하게 물리친다고 여겨졌던 거울송조차도 엘리자벳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난 이미 그를 벗어났어, 모든 사슬도 끊어냈지. 너를 위해 돌아갈 순 없다.’ 힘겨운 목소리에 귀가 쫑긋 솟았다. 절절히 노래한 사람은 루돌프인데, 오히려 엘리자벳이 가쁜 숨을 몰아쉬어 가며 가까스로 말하고 있었다. 음성에서 아들의 절박함을 넘어서는 버거움이 느껴졌다. 어떤 여력도 기대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어떻게 아들에게 저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 평소에 종종 떠올리곤 했던 의문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 기대한다는 것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절망의 〈추도곡〉에서는 그래서 눈물이 났다. 거울송의 그녀가 아들을 도와줄 상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절절하게 이해해버렸기에, 추도곡의 슬픔이 때늦은 후회로 비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비탄의 노래에 마음이 움직였다. 처음으로 그녀가 가여웠다.

 

바라보는 내가 그랬는데,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죽음은 얼마나 황망하였을까. 그녀 스스로 자신을 원하게 되기를 기다리며 어디서든 그녀와 함께하였는데.. 그녀가 죽음의 안에서 찾는 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어떤 갈망도, 작은 설렘도 없는 망각의 구원 그뿐. 
그때서야 마침내 내가 보는 것을 죽음도 보게 되었다. 

〈아무것도〉에서 텅 빈 스스로를 마주하고 〈추도곡〉에서 끝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엘리자벳의 〈행복은 너무도 멀리에〉를. 사랑도 기적도 잃은 생명을. 고독한 바다 위에서 한없이 외로워질 뿐인 그녀의 가여운 생을.

 

침몰하는 배 위. ‘난 자유 줄 거야’라 외치던 순간의 죽음에게서는 두 가지의 얼굴을 보았다. 사랑의 완성을 눈앞에 둔 갈망이 하나. 자기 자신이 망가트려 버린 사랑에 대한 속죄가 또 다른 하나. 1월 17일이 전자를, 1월 10일이 후자를 극대화한 엔딩이었다면 1월 26일의 오늘은 전부를 아우른 〈베일은 떨어지고〉였다.

 

죽음에게는 유일한 사랑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자 엘리자벳에게는 일생의 갈망이 이루어지는 베일. 그동안의 죽음은 사랑을 이루는 순간 사랑을 잃었다. 엘리자벳은 자유를 얻고, 죽음을 떠나갔다. 혼자 되어 남겨진 죽음의 쓸쓸한 눈에서 상실을 엿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소리 없이 다문 입술과 비장한 각도의 턱, 단단한 빛의 눈동자는 사랑을 잃고 상처 입었다기보다는, 사랑 후의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죽음의 사랑이 엘리자벳에게 헌정되어, 그녀의 구원이 되었음을. 자신은 엘리자벳을 영원히 잃었으나, 엘리자벳은 자신을 영원히 가졌음을.

백 년이 지나도록 그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환희 혹은 고통이 되어.

 

아름답고도 훌륭한 서사였다. 바로 오늘을 위하여 삼연의 엘리자벳이 다시 온 것이었구나, 하였을 만큼. 기쁘고도 행복했다. 사랑도 하였고 증오도 하였던 지난한 역사의 이 극, 뮤지컬 엘리자벳을 기적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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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특별한 공연의 특별했던 순간들:

 

밤공의 〈마지막 춤〉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마지막 춤을 본 적이 있느냐고? 이랬던 적이 과거에 있었냐고? 무수한 마지막 춤을 만났지만 오늘 밤공과 같은 압도적인 센세이션이 또 있었을까.
환상에서 깨어‘날’ 거야의 중간 음절이 신호탄이었다. 갈퀴처럼 끌어당기는 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프롤로그〉의 밀고 당기기에서 이미 예감했었다. 마지막 춤의 증폭이 돌아올 것임을. 왼발의 회전축이 무너져 살짝 비틀거릴 정도로 세차게 턴하는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에는 전율이 일었다. 오늘을 위하여 그간의 증폭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여겨질 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에서는 대단한 갈망을 보았다. 양 날개 안의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는 두 눈이 고지를 코앞에 두고 점차로 부푸는 순간을 목격했다. 날개처럼 살랑살랑 펄럭이던 양팔을 서서히 조이기 시작할 때는 깜빡임조차 잊은 눈이 엘리자벳에게로 그대로 쏟아질 듯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주 형형하게.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마지막 춤에 ‘우리의 어둠 속 밀회’가 있었다면 그림자에는 ‘그 약-속’이 있었다. 계단 난간으로 세차게 달려들며 루돌프를 향하여 건네는 ‘약-속’의 긁는 음이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쩌렁쩌렁 울렸다. 죽음의 브릿지로 루돌프를 인도하고자 한 손을 기꺼이 내밀면서는 나른한 한숨을 하아아, 하고 흩트러뜨리기도 하였다.
이어지는 죽음의 다리 위에서는 내내 포탄을 투하하는 듯한 절정이었다. 세상을 ‘구-원-해’의 날개 돋친 음성은 소리로 떠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죽음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음절마다, 박자마다 때려 넣고 있었다. 
지금이‘야’의 마지막 소절이 긁혀 나간 찰나는 위태롭게 외줄 위에 선 황태자의 현상을 보여주는 듯이 절묘하였고, 곧장 박아넣은 ‘그것이 운명’과 홀린 듯이 따라부르는 황태자의 ‘운-명’은 하나의 거대한 포르티시모였다.

 

세상에 다시 없을 마지막 춤과 그림자는 길어지고였다.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웠다. 〈론도〉의 금발 위로 쏟아지는 초록빛 조명이. 투명하게 빛나는 녹금빛의 금발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죽음이 엘리자벳을 향하여 잠시 멈칫한 순간, 나의 마음도 덜컹하였으니.
또 아름다웠던 다른 하나는 밤공의 줄을 타는 죽음. 유난히 몸을 크게 쓰는 동작이 많았고, 그 하나하나마다 아름다운 장면으로 연출되었다. 줄을 튕기듯이 회전하고, 엘리자벳을 돌아보고, 허리를 젖혀 소름 끼치게 웃었다. 백미는 마지막 회전에서 허리를 뒤로 깊이 젖혀가며 만들어 보인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곱고도 탄력 있는 맵시 그 모습 그대로 퇴장할 때까지 한 자세를 유지하였는데, 정말로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낮공의 〈베일은 떨어지고〉. 도입부가 말도 못 하게 슬펐다. 천천히 내려와 그녀를 향하여 건넨 첫 소절. 엘리-자벳의 버벅임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엘, 엘리-자벳이 되어버린 소리에서 죽음의 떨림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 엿보이는 듯한 얼굴이 깊이 가라앉은 채로 그녀를 불렀다. 그의 그런 조심스러운 기색이 나를 너무도 슬프게 했다. 차갑고 냉혹한 스스로를 기꺼이 잃어버린 죽음이,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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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소한 이야기:

 

〈프롤로그〉의 마지막 소절, 엘리-자벳. 두 팔을 넓게 뻗어 먼 허공으로 치켜올린 고개를 물끄러미 보는데, 갑자기 입술을 훑는 붉은 혀를 보았다. 아랫입술을 낼름 적신 혓바닥이 순식간에 지나가기에 잠시 잠깐 내가 무엇을 본 것이었나 갸우뚱했다. 밤공보다 낮공이 훨씬 분명하고 생생했다. 심지어 침몰하는 배 위에서도! 엘리-자벳을 외칠 때 붉은 혀가 빼꼼했어! 오왕.

 

낮공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문양 뒤에서 대기할 때, 처음으로 두 손이 다 보이는 각도였다. 어둠 속에서 하얀 손이 모두 시야 안으로 들어오기에 들뜬 마음으로 내내 지켜보았는데, 아니 이런. 오늘따라 오른손이 어찌나 분주하던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살포시 허벅지 위로 내려 두어 차례 긁적긁적하는데 너무 귀여웠다...
대미는 두 손을 난간으로 원위치시킬 때 톡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던 것. 아마 반지가 난간에 닿으며 난 소리였겠지.

 

〈전염병〉의 도약이 여전하여 기뻤고, 낮공에서는 얼굴에 심쿵하는 순간이 있었다. 브릿지 위에서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는 말 없는 얼굴의 오묘한 빛이 잘생김과 어우러지며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직후 루돌프를 바라볼 때도 그렇고, 요즘 왜 이렇게 누군가를 바라보는 얼굴이 이렇게 오묘하게 잘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밤공의 〈행복한 종말〉에서는 오랜만에 양쪽 얼굴로 웃었다. 근래에는 한쪽 입꼬리만을 올려 살풋 비웃고 말았는데, 오늘은 양쪽으로.

낮공의 삼중창에서도 무척 환하게 웃었다. 엘리자벳을 향하여 손을 뻗는 말미에 두 눈을 이글이글하게 빛내면서. 그리고 낮공의 시야에서는 막이 닫힐 때까지 죽음이 보였는데, 그녀에게 뻗은 한 손을 가운데 두고 서서히 닫히는 검은 장막을 보게 되어서 묘한 기분이 되었다. 아름답고도 쓸쓸한 엔딩이었다.

 

밤공. 박태양 루돌프. “누구세요?”라 물음 하지 않았고, 덕분에 죽음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희귀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