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내린 토드, 보랏빛 섀도우, 깔끔해진 네일.
앞머리가 정말 많이 자랐다. 왼쪽으로 굵은 컬을 넣어도 앞머리가 설핏 눈동자를 덮는다. 부쩍 자란 앞머리를 한쪽으로 내리니 자연스레 도리안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도리안을 연상시키는 그 얼굴의 어디에도 도리안의 표정은 없었다. 오직 죽음 뿐.


밤공. 〈마지막 춤〉에서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하얀 이가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거부할 수 없는 유혹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입매와는 달리 눈동자는 차가워서, 서늘함이 감도는 얼굴이었다.
요즈음은 턴을 할 때 늘 발끝으로 원을 그린다. 부드럽게 바닥을 끄는 발끝이 그 찰나에도 컴퍼스처럼 정교하여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그런데 옥주현 엘리자벳, 왜 자꾸 동선을 지키지 않지? 지난 25일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동선을 무시하는 바람에 죽음이 1.5배의 역할을 해야 했다. 좋게 보면, 덕분에 죽음의 동선이 커지고 과격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동선을 무시하고 직감에만 의지하는 연기는 자제했으면 좋겠다.


1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는 미간을 찡그려가며 웃었다. 죽음을 거부한 대가를 주지시키려는 듯이, 거봐, 하는 얼굴로. 지상의 슬픔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웃는 얼굴이 섬뜩하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그 찡그림이 꼭 찡긋하는 것처럼도 보여서 귀여웠다. ㅎ


〈행복한 종말〉에서는 오른쪽 얼굴로만 웃음을 지었고, 삼중창에서는 내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볼프살롱〉. 계단을 오를 때 긴 코트 자락을 드레스처럼 살짝 잡는 모습을 목격했다. 귀여웠어.
〈전염병〉. 절규하는 엘리자벳을 한 차례 스윽 보고는, 뒷걸음질을 위해 몸을 돌리기 직전 피식 어깨를 뒤틀며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계획대로라는 듯이. 일말의 동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세상을 ‘구원해’는 26일 밤공과 같은 울림을 이어갔다. 직후의 웃음소리는 꽤 남달랐는데 무척 날카로운 펜촉 같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림자 직후에 루돌프와 마주 볼 때 피식! 웃었다. 이 순간에는 거의 웃음을 보이지 않는데, 새롭게도. 마침 오블이라 브릿지 위에서 루돌프와 마주한 얼굴의 잘생김을 정면으로 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최우혁 루돌프와의 〈마이얼링 왈츠〉에서는 최후의 순간에 루돌프가 늘 그로부터의 도망을 시도한다. 내팽개쳐진 몸을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달아나려는 루돌프를, 죽음이 곧장 그의 옷자락을 잡아 멈추어 세우는데 윤소호 루돌프의 경우에는 도망의 시도가 크기 않아 뒷목이나 등의 옷자락을 적당히 잡게 된다면 최우혁 루돌프의 경우에는 (루돌프가 너무 열심히 도망하려 하는 바람에) 꼭 허리 한참 아래의 옷단이 잡아채게 된다. 그것도 어딜 감히? 의 아우라가 느껴지도록 과격하고도 다급하게.
특히나 오늘은 도망하려는 루돌프를 인지한 죽음이 괘씸하다는 듯이 두 눈썹을 찡그리고, 입술을 힘주어 앙다무는 얼굴을 포착했다. 부리처럼 내밀어진 입술이 정말로 정말로 귀여웠다.


밤공의 침몰하는 배에서는 오랜만에 칼을 들지 않고 숨겨 나왔다. 왼손이 비어있길래 찾아보았더니 허리춤에 야무지게 꽂혀있었어. 덕분에 오랜만에 주섬주섬 칼을 꺼내어 드는 손가락을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난 자유 줄 거야’ 할 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깊은 갈망과 아득한 그리움이 뒤섞인 복합적인 얼굴이었다. 너무나도, 사람 같았다. 냉소적으로 군림하였던 죽음이 어느새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나, 되짚어볼 만큼.

 

*

 

시아준수 이외의 이야기:

옥주현 엘리자벳. 25일 공연에서 보고 깜짝 놀랐던 노선을 오늘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시씨의 〈당신처럼〉도 놀랍지만 〈황후는 빛나야 해〉는 대체 무슨 일이지? 어쩌면 이렇게도 세상을 벌써 달관한 인생 N회차의 엘리자벳이 되었단 말인가. 죽음이 바라는 ‘따스한 사랑’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사를 이미 달관해버린 그녀는 ‘차가운 생명’밖에는 보여주지 않는데.. 생기를 잃고 ‘변해가는’ 엘리자벳은 오간 데 없다. 시작과 함께 일찌감치 변해버린 껍데기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