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고도 완전한 공연이었다. 죽음은 물론 엘리자벳까지도 아름다운 완성형이었다. 신영숙 엘리자벳과의 공연일 때 보여주곤 하는 죽음의 여러 새로운 시도가 완벽하게 정착하여 더 없을 경지로 물이 올랐다. 신영숙 엘리자벳 또한 감탄스러웠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몫을 다함으로써 서로의 증폭제가 되어주었다. 공연 내내 경이로운 시너지로 가득했다. 삼연에서 단 하루의 공연을 남겨야 한다면 주저 없이 오늘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유독 최후의 순간까지 아름다웠다.
커튼콜에서 엘리자벳과 죽음이 손을 포개기 직전,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을 보았다. 작은 끄덕임과 함께 피어난 옅은 미소에 어떤 안도감이 서려 있는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울컥했다. 기념비적인 공연을 완성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건넨 감사이자 신뢰의 미소였다. 대단히 아름다운 엔딩이었다. 

 

*

 

반내린 토드, 보랏빛 섀도우. 

 

〈베일은 떨어지고〉의 ‘엘, 엘리자벳.’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그에게서 감정을 삼키는 듯한 기색을 보았다. 눈도, 입매도 울상이 된 얼굴로 오늘따라 감정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 때문에 더더욱 끊긴 음절이 감정에 복받쳐 삼켜진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슬펐다. 너무나도. 음향 사고였든 실수였든 어느 쪽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중요한 건 오늘 베일의 표정에 더없이 어울리는 음성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추도곡〉에서 이미 울컥한 터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죽음은 혼란 가득한 얼굴이었다.
‘제발, 자비를..’ 그녀의 서글픈 읊조림에 흠칫 놀라는 두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듯한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불쑥 론도의 죽음이 겹쳐졌다. 내 안에서 너의 꿈을 찾게 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너의 생명을 망가트렸구나. 깊은 절망이 그의 미간에 포개어진 채 후회를 더 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가라앉은 얼굴에서부터 이어진 베일이었다. 평생의 기다림, 더없이 짧은 사랑, 찰나의 환희, 영원의 이별. 오직 그녀를 위하여 후자를 기꺼이 감내하는 듯하였던 눈동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물기 어린 채, 말이 없는 눈이었다.

 

*

 

기쁘게도, 놀랍게도, 처음으로 마음에 닿는 삼연의 〈아무것도〉를 만났다. 세 엘리자벳 모두 강강강으로만 일관하는 그간의 아무것도에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오늘의 아무것도는 달랐다. 치솟는 ‘강’을 따라 무너지는 ‘약’이 생긴 것이다. 더불어 숨통이 조이는 듯한 고통의 얼굴, 난간을 겨우겨우 붙잡아 지탱하는 몸을 또렷하게 표현하는 연기에서 흡사 만져질 것 같은 격통을 보았다. 고통 속 최후의 몸부림. 꺼져가는 불씨의 마지막 일렁임과도 같은ㅡ내내 그리워한 바로 그 〈아무것도〉였다.
신영숙 엘리자벳의 2막이 감탄스러운 것은 바로 여기, 아무것도에서 전부 놓아버린 엘리자벳의 심리상태를 엔딩까지 분명하게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실성한 사람처럼 불안정한 당신처럼 reprise, 거울송의 갈피 잃은 목소리, 상실의 추도곡, 그리고 행복은 너무도 멀리에의 소금알갱이 가득하였던 음성. 자포자기한 생의 가까스로 연명해가는 버거움이 거대한 줄기를 이루어 2막을 관통하고 있었다. 
얼마 만인지 모른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집중하여 다른 누군가의 무대에 귀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 엘리자벳의 일생을 숨죽인 채 함께 따라 걸을 수 있었던 것이.

 

아마 그래서였겠지. 루케니에게 칼을 맞기 직전, 에스터하지 백작부인과 나누던 흐릿한 미소에 울컥해버린 건. 죽음이라는 미래밖에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희미한 미소가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은.

 

*

 

오늘도 아름다운 증폭을 이어가는 〈마지막 춤〉이었다. 강한 만큼 아름답게, 아름다운 만큼 강하게♡
브릿지를 내려오는 얼굴이 무척 오묘했다. 엘리자벳이 죽음에게 이끌리는 것처럼, 죽음 역시 그녀에게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깜빡임도 잊은 눈으로 그녀를 향하여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와서는, 손을 포개어 잡듯이 시선을 맞추었다. 신비로운 미소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기대하던 대답이 아닌 거절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하얀 종이에 먹물이 번져가는 기세로 써늘해졌다. 씰룩이는 윗입술에서는 억누르는 화를 보았다.

 

‘착각일 뿐’의 농염함, 환상에서 깨어‘날’ 거야의 크레셴도가 도입의 전환점이었다면, 마지막 춤과 함께 발 구르는 순간은 절정이었다. 오늘은 심지어 발 구르지 않는 다른 쪽 발목도 길고 곧게 내뻗어, 그대로 바닥을 쾅 찍어눌렀다.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 움직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력적이면서 유려했다. 극과 극의 느낌을 동시에 어우려낼 수 있다니..
죽음이 폭풍처럼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어둠 속에서 ‘정말 섹시하다’는 남자 매글의 감탄사가 박수를 뚫고 귀에 꽂혔다. 그 말대로였다. 누구라도 굴복당할 수밖에 없는 마성의 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춤은 시작에 불과하였으니, 오늘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의 농염함은 말로 다 못 할 것이다. 엘리자벳,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부터 남달랐다. 굉장히 부드럽고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이어지는 ‘사랑-해’도 평소와 달랐다. 원래는 사‘랑’해의 가운데 음절에 가장 깊고 그윽한 울림을 써서 노래하였다면 오늘은 서두의 ‘사랑’은 부드럽고 나직하게 끌어낸 후 마지막 음절인 ‘해’를 아주 길게, 여운을 담아 늘려 불렀다. 
그러므로 오늘의 침대씬은 꼭 잘라서 들을 것.

 

〈전염병〉. 의사 선생님을 맞이하는 에스터하지 백작부인의 횡설수설에 잠자코 듣는 듯하던 그가 이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인간을 업신여기는 기색이 역력한 비웃음이었다. 섹시했다. ㅎㅎ
소파에서 그녀를 향해 뛰어내릴 때 오늘은 도약 대신 지상에 머물기를 택하였는데,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살짝 낮춘 채로 타다다 다가서는 모습이 훅 끼쳐 드는 안개 같았다.
그녀의 절규를 뒤로하고 예의 걸음걸이로 되돌아간 브릿지 위에서는 한쪽 입꼬리를 크게 올려 웃었다. 무려 이가 보이도록. 전염병에서는 처음 보는 명료한 웃음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볼프살롱〉에서도 웃고(어제부터지만), 여러모로 여러 장면에서 여러 얼굴의 웃음을 보여주는 죽음이었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쇠가 되어가는 소절의 쇠가 되어가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금토토의 공연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쓰는 목소리에 그만 전율이 일었다. 
좋소,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겠소. 루돌프의 승낙이 어렵사리 떨어진 후에는 오랜만에 육성으로 크게 웃었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1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 유독 지상을 훑어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샅샅이 내려다보는 눈이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지상의 인간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프롤로그〉의 혀 빼꼼을 또 보았다. 
마이얼링의 빵야는 중블의 몫이었다.

 

그리고! 거수경례를 드디어 보았다. 지난번엔 각도 때문에 실시간 루저였지. ㅎ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석호 루돌프를 따라 의젓하게 경례를 해 보였다가 폭발하는 환호에 어깨를 쑥스럽게 떨며 웃어버리는 모습까지 전부 보았다.

특히 귀여웠던 건 샤죽음님이 먼저 석호 루돌프에게 손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함께 하자 권했는데, 석호 루돌프가 뜻을 굽히지 않고 한사코 경례를 하였던 것. 경례를 꼭 해야만 한다는 듯한 그 비장함에 죽음님도 손하트를 풀고 나란히 경례를 하였는데, 두 사람의 찰나의 아웅다웅이 무척이나 귀엽고 유쾌했다.

 

*


시아준수 이외의 이야기:
민영기 요제프가 늦게 등장한 탓에 에스터하지 백작부인 혼자 빙글빙글 돌다가 혼자 철퍼덕하였다. 💦💦


댓글 '6'

ㅂㄷ

19.02.03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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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2.03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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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ㄷ

19.02.05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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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2.05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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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2.04

음성으로만 다시 들어도 특별했던 31일의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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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2.04

초연 드라큘라의 8월 21일과도 같았다는 최고의 찬사를 이날의 공연에 바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