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 그의 손이 보였다. 이따금 엘리자벳에게 멎은 눈빛보다 손에 시선을 빼앗길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그녀의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는 아주 조심스럽고도 감격에 어린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던 차갑고 냉혹한 죽음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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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토드, 보랏빛 섀도우. 

다시 1일처럼 올린 머리에 풍성한 볼륨을 주어 퐁실퐁실 아주 예뻤다. 오늘도 전염병의 브릿지 위에서, 그리고 베일에서 특히나. 베일에서 엘리자벳을 향하여 손을 내미는 옆모습은 꼭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조각 같아.

 

음향이 정말 좋았다. 낮공도 좋았지만 밤공은 놀라울 정도였다. 감격적인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을, 진작에 이렇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와서.. 이제라도 기쁘기는 하지만..

 

〈프롤로그〉의 최후에 빼꼼하는 혀는 이제 무슨 안무 같다. 엘리자‘베엣-’의 가사를 마무리하며 정해진 동작처럼 날름. 그래서 이제는 아예 정착한 디테일인가 싶었는데, 밤공에서는 또 오랜만에 혀가 보이지 않는 정갈한 마무리를 보여 주었다. 대신 엘리자벳을 부르는 지상의 소리에 감정이 일렁이는 얼굴을 보았다. 잠들었던 감각이 깨어난 듯이 생생하게 살아서 숨을 쉬는 얼굴을. 

 

결혼식 종칠 때의 엔딩 자세가 또 새롭게 멋있었다. 밤공. 지탱한 다리의 무릎을 뾰족하게 굽혀 두 다리 사이가 삼각형이 되도록 했다. 진짜로 줄을 타는 것처럼 날래게. 죽음이 멋있어요.

 

〈마지막 춤〉. 밤공. 엘리자벳을 향해 손을 내밀며, 최근 들어 드물게 웃지 않았다. 낮공에서는 미약하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밤공에서는 전혀. 이글이글한 눈이 웃음기 대신 집요함을 품고 반짝였다. 그녀의 거절에는 대번에 얼굴을 찡그렸다. 정색이 아니라, 정말로 얼굴을 구겨서!
증폭 지점도 조금 달랐다. 깨어‘날’ 거야에서 터트려내는 대신, 조금 더 눌러두었다가 안무를 시작하고 나서의 소절ㅡ내 ‘마지막’ 춤ㅡ을 강하게 폭발시켰다.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 널 사-랑-해- 오늘은 음절마다 그윽한 울림을 넣었다. 시작음인 ‘사’에서부터 울림이 진동하는 경우는 드문데, 낮밤공 모두 그랬다. 

 

낮밤의 〈내가 춤추고 싶을 때〉가 다른 엔딩을 보여준 날이기도 했다. 낮공에서는 ‘내-가’를 높이 올려서, 밤공에서는 평상시처럼 곧게.
그리고 그림 같았던 장면. 독수리 조각상 위에 서 있을 때 그 옆으로 비치는 가시덤불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이 시야에 함께 들어왔는데, 함께 보니 무척 신비롭고 예뻤다.

 

〈볼프살롱〉. 그동안은 각도 때문에 옷자락을 잡는 한 손만 보였는데, 오늘 보니 두 손으로 이케 끌어 올렸던 것이다. 마치 드레스처럼. 흑흑. 너무 귀여웠다. 

 

낮공.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의 ‘그 약-속’에 아주 약간의 파열음도 섞이지 않은 건 너무나 오랜만이다. 이 소절에서 이토록 순도 높게 부드러운 목소리는 삼연 들어 처음. (밤공에서는 다시 약간의 긁는 소리가 첨가되었다.)
전반적으로도 대단히 특이한 그림자였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건강하였는데도 일부러 섞어 넣은 듯한 쇳소리가 함께했다. 쇠가 되어가는 소절은 물론 브릿지 위에서도.
절정다운 카타르시스는 밤공보다는 낮공이 더욱 강렬했다. 낮공을 잘라서 듣자.

 

〈혼란한 시절들〉. 오늘도 추기경이 쳐낸 손에 시선을 맞추어 웃었다. 피식, 가소롭다는 듯이. 

 

마지막은 〈전염병〉. 밤공. 소파를 우뚝 밟고 선 ‘내게로 와’의 가장 폭발적인 소리를 오늘 밤공에서 들었다. 이것도 꼭 잘라서 들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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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공의 커튼콜에서도 소피 대공비와 시목 루돌프 셋이 함께 하트로 인사를 마무리했지만, 밤공에선. ㅎㅎ
이정화 소피가 톡톡 두드리자, 뒤돌아본 그가 이케이케 수구려 소피의 치맛자락을 뒤적뒤적하더니(이정화 소피가 오늘 밤공에서 했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한 듯) 손하트를 꺼내어 짠하고 보여 주었다. 뒤적뒤적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는지 지켜보던 이정화 소피가 무장해제한 얼굴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그 일대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무척이나 화기애애한 엔딩이었다. 마치 죽음이 소피 네 사랑받는 큰 손자가 된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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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준수 이외의 이야기:
낮공. 김소현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이 무척 좋았다. 단 하루를 듣는다면 오늘을 듣겠다 정할 수 있을 정도로. 더불어 나는 나만의 것에서 회전무대의 속도가 조정되었다. 여기서 숨 가쁘게 뛰지 않는 김소현 엘리자벳은 삼연 들어 처음. 
이정화 소피는 점점 슬퍼진다. 강철 같기만 하던 재연의 소피는 이제 없다. 벨라리아에서도 그렇지만, 어린 루돌프에게 특히. 대통을 위하여 엄격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안타까운 마음을 이제는 숨기지 않는다. 내 지시에만 따르도록 해라, 엄포하면서도 떨림이 역력한 음성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