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토드, 보랏빛 섀도우. 

 

샤죽음과 신영숙 엘리자벳의 두 번째 지방 공연. 광주에서만큼 훌륭한 조화였다. 여기에 또 하나의 드림캐스트가 있었다. 대구의 관객.

관객의 집중도가 남달랐다. 기억했던 것보다 긴 여정에 피로해진 몸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공연과 배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엿보였다. 막공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객석의 에너지가 그 안에 속해있는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일은 드문데, 그런 날이었다. ‘여러분의 에너지가 무대까지 전해진다’고 늘 이야기하는 시아준수도 분명 느꼈겠지. 객석의 기대와 신뢰 어린 경청에 곧바로 화답하는 듯한 오늘의 죽음이었다. 준비된 관객과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배우. 덕분에 즐겁고도 쾌적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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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복병은 있었다. 1막의 억눌린 음향이 오늘의 난관이었다. 프롤로그와 결혼식에서 강렬해야 할 앙상블의 합창이 웅얼거림처럼 들리기는 또 처음이었다. 소리가 액자의 경계를 뚫지 못하고 안에서만 머물렀다. 광주에서는 기억하던 시야가 아닌 것에 적응해야 했지. 오늘은 처음 듣는 소리에 적응해야 했다. MR 자체의 음량부터 작았다. 그 덕에 광주에서 낯설게만 느껴졌던 뚱땅거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헷갈렸다. 

이 갑갑함을 처음 깨트려준 넘버가 론도였다. 여럿의 목소리는 서로가 서로를 마모시켜 뭉개지고 마는 데 반해 개개인의 목소리만은 그보다는 나았다. 죽음만의 고동이 액자 안을 가득 채우는가 싶더니, 오늘 처음으로 경계를 넘어 객석에 닿았다. 짱짱하고도 청명한 소리가 귀로 와닿았을 때의 해방감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론도의 힘은 〈마지막 춤〉으로 이어졌다. 신영숙 엘리자벳의 존재를 동력원 삼아, 비협조적인 MR을 양분 삼아 한층 과감해진 파워였다. 마/지/막에서 발을 쾅쾅 구르며 밟아 넣던 억양이 송곳처럼 귀를 찔렀다. 강한 만큼 화려하여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마지막 춤이었다. 억눌린 음향에서 만들어낼 수 있던 최고였다고 믿는다. 

 

이것이 1막의 이야기. 2막의 시작되고 함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음향이 갑작스러운 개선을 보인 것이다.

강으로 치고, 강으로 다시 받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의 줄다리기를 훌륭하게 담아냈다. 신영숙 엘리자벳이 뿌리치고, 샤죽음이 되받아 넣는 핑퐁이 무리 없이 녹아든 소리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가,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말았다. 핑과 퐁 각각의 결이 살아있으면서도, 핑퐁 전체의 주고받기가 유려하게 흐르는 소리 안의 공간감.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 소리에 오늘의 공연이 비로소 시작된 것만 같았다. 가히 오늘의 넘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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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그림도 있었다. 광주에서와 같이 독특한 조명이 빚은 우연의 작품이었다. 〈결혼의 정거장〉. 해설하는 루케니의 바로 뒤편의 장막이 바람에 휘날려 루케니가 서있는 조명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해설자를 휘감을 듯이 넘실대는 검은 장막 위로 강한 흰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마치 루케니 뒤편에 하얀 날개를 드리운 죽음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처럼. 잠시만 머물고 안개처럼 증발하여 금세 자취를 감춘 것까지 완벽한 우연이었다.

 

다른 하나는 추도곡에서 정확하게 반을 갈라 흑백이었던 기묘한 얼굴과, 삼중창. 왼블의 시야로는 죽음을 비추는 빛이 꼭 그를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명이 꿰뚫은 자리가 투명하게 빛났다. 이제껏 보아온 삼중창 중에서 가장 신비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순간이었다. 어떤 부연 없이 오직 한 줄기의 빛만으로 거울 속의 죽음이 사람이 아닌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었다. 

 

참, 그림자. 벼랑 끝에 내몰린 황태자를 보며 소름 끼치게 웃는 소리는 오랜만에 MR을 지나쳐 맨 허공 속에서까지 울렸다. 소리가 몇 번이고 메아리치는 산등성이 사이에 갇힌 것처럼.

 

마지막으로. 아름답고 조화로운 베일이었다. 왼 구역이었기에 마지막까지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울컥했는지도 모른다. 생명이 사라진 채 스러지는 그녀를 따라오는 고개, 잠시 숨을 참는 것 같던 황망함, 떨구었던 고개를 곧추세워 눈을 감는 얼굴. 다시 아주 천천히 허공을 짚어가며 정면으로 돌아오는 시선. 촉촉하게 고였지만 흐르지는 않는 눈 안의 물기.

죽음은 사랑을 얻었을까.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오늘이었다. 모든 것을 주고도 홀로 남겨진 이의 눈에 떠오른 고독함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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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준수 이외의 이야기:

신영숙 엘리자벳 불패의 넘버는 역시 〈추도곡〉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당신처럼〉의 목소리가 무척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