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고 눈부시게 웃으며 청년왕이 말했다.
“오늘은 세상이 다 내 것만 같아요.”
만면에 숨겨지지 않는 미소가 가득했다.
잔인하게도 하필 그 직후였다. 멀린의 불안한 얼굴 뒤로 엑터가 쓰러진 것이. 아들에게서 건네받은 잔이 아버지의 숨을 끊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고 한 바로 그 순간에 아들은 아버지라는 세상의 뿌리를 잃었다. 살아서 겪는 행복의 최상층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던져지다시피 한 것이다.

 

누군들 그 상실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 용솟음할 때만을 기다린 분노의 태동에 그를 휘어잡는 공포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가.”
왕이 말했다.
“나가.”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말했다.
“나가, 나가, 나가.”
제어장치 잃은 채 폭주하며 그가 말했다. 회장 안의 사람들이 그의 칼끝을 피해 도망치듯 나가는 틈에서 그는 빠르게 혼자가 되어갔다. 
“나가, 나가, 나가.”
이리저리 헤집으며 그는 계속 말했다. 숨도 쉬지 않고 연달아 뱉는 두 음절은 누군가에게는 당혹감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 되었겠지만 나에게는 분노를 삭이는 주문처럼 보였다. 안간힘을 다해 자신을 통제하려는 몸부림 같았다. 폭주하는 자신에게서 사람들을 떼어놓음으로써 그들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통제해줄 이 사라진 지금, 자신의 불길이 어느 방향으로 튀게 될지 스스로도 알 수 없기에.
“너도 나가.” *1
아내의 염려하는 눈빛도 그에게 닿지 못했다. 슬픔을 위로받기보다도 당장에 중요한 건 지키는 것이었다. 상실을 이해받기보다도 시급한 건 자신의 불길을 꺼트리는 일이었다. 위로받고자 하는 이기심으로 그녀를 곁에 두었다가 자신이 어떻게 돌변하게 될지 그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그래서 그녀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내고 보았다.

그러나 불길은 턱밑까지 와있었다. 스승의 존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는 동안 마주한 어떤 분노보다도 강렬한 감각에 고통스럽기까지 한 찰나,
“아더, 내 동생.” *2
간드러지는 음성이 등 뒤에서부터 그를 감싸안았다. 모르가나, 누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겨누었다. 불길이 그를 삼키기 직전이었다. 엑터의 가르침으로 키워온 품격이라는 이름의 이성만이 그가 누이를 베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누이가 말했다.
“아무도 이해 못해. 우리 핏속에 끓어오르는 불길을 누가 알겠어.”
순간 흠칫하는 그를 보았다. 곧이어 그의 얼굴을 물들이는 기묘한 기대도. 잠자코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침묵에서 보였다. 이 세상 유일한 혈연, 누이라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누이라면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까. 기댈 수 있지 않을까. 싹을 틔우고 싶어 하는 희망이 서서히 만면으로 번져가던 찰나였다.


어둠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용을 놓아줘.”

누이가 속삭였다.

 

그녀를 향하였던 칼끝이 의아한 듯 기울었다. 평생 용을 길들이라는 소리만 들었을 터였다. 분노를 다스리고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겠지. 내면의 분노를 터트려보라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을 리 없다. 그래서였겠지.

단 한 번의 속삭임이 끝내 그의 빗장을 열어버린 것은.

ㅡ고통을 끝내

불길은 삽시간에 번졌다.

ㅡ용의 불길이 솟구치게

제약 없이 타오르는 불길에 빠른 속도로 침식되어가는 그가 똑똑히 보였다. 태어나 처음이었으리라. 내면의 불길 앞에서 이렇게까지 한발 물러선 것은.

끝내는

ㅡ시간이 됐다

그녀를 따라 걷고야 마는 그를,

ㅡ그래

누이의 한마디가 불쏘시개가 되어 들쑤셨다. 탄식이 절로 났다. 엑터가 18년을 품고, 신의 검이 선택한 왕의 자질은 기어이 용의 불길이라는 시험대 위에 올랐다.

ㅡ어서 시작해, 피의 전쟁을

누이의 손길을 따라가던 그의 시선이 어느 순간에는 그녀를 떠나 정면을 향하여 못 박히더니, 깜빡임조차 없이 이글거렸다.

ㅡ모든 걸 걸고 싸워야 해

섬광이 번뜩인다면 이런 것이겠지 싶었다. 홀린 것만 같던 목소리가 점차 자기주장의 확신을 입어가는 모습을 그녀도 나도 바라만 보았다.

ㅡ여기 용의 날이 밝았다

심지를 굳힌 음성. 분노로 덧칠한 마음. 용은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크레셴도로 나아가는 노래 자체가 그의 내면이었다. 불길이 선사하는 광기의 감각을 그는 온몸으로 만끽하다시피 했다.
검은 영혼은 길을 잃었고 복수는 그를 집어삼켰다.
세상은 용의 불길이 몰고 올 폐허만을 앞두고 있었다.

 

*1 프리뷰에서는 기네비어에게도 “나가”라고 하였으나, 6월 18일의 첫공에서는 훨씬 더 나직한 음성의 “너도 나가”가 되었다.

*2 아더, 아더, 내 동생. 이 대사는 두 모르가나 중 신영숙 모르가나만이 한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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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12.20

사랑이 새록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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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8.18

재연에서는 더는 볼 수 없게 된 초연의 기억. "나가, 나가, 나가, 나가!"를 내가 꽤 좋아했었던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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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8.18

초연의 아더는 어떠한 계기만 있다면 스스로 분노할 줄 아는 불길이었는데, 재연의 아더는 분노하는 방법조차도 누나의 손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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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8.18

이 글로 담은 <눈에는 눈>을 정말로 좋아했었던 모양이군. 읽으니 애틋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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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3.02.07

23년 2월에 이 글을 찾아오게 된 경로: 데스노트 앵앵콜이 왔다 > 엑스칼리버 앵콜이 떠올랐다 > 애틋해하다 이제 더는 없는 초연의 장면이 생각났다 > 이 글을 찾아왔다 > 아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