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그가 울다가 울다가 죽어가는 얼굴을 향하여 형, 미안해, 읊조리기에 바빴다가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랜슬럿의 검을 수습하고, 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장면에서 아더를 따라 무너지는 마음이 되고는 하는데 오늘은 더한 결정타가 있었다. 아무래도 각도 덕이었겠지. 랜슬럿의 검을 포개어주고 매무새를 수습해준 후에도 정처를 잃고 방황하던 손길이 멈칫, 죽은 이의 아무렇게나 접힌 다리를 발견했다. 그다음에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대로 허겁지겁 일어난 상체가 엉금엉금 기어가 접힌 다리를 펼쳐주었다. 망자는 그제야 편히 누웠다. 살아남은 이는 외따로 남겨둔 채. 죽음의 평화에 잠긴 얼굴 앞에서 넋을 놓고 혼비백산한 그의 손길에 머리가 띵했다.

 

오늘따라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지욱의 콧물풍선에 아더가 결국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여길 만큼. 

 

그런데 그렇게나 울었으면서, 혼자된 어깨의 떨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검을 들어 올려 말없이 응시하던 그가 장갑 낀 손으로 얼굴 가득한 울음을 훔치는가 싶더니.. 울음으로 떨리느라 한껏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서서히 의연하게 일어섰다. 

이윽고 손을 내렸을 때는,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이 평온했다. 지나간 상처가 남긴 물기가 자욱할지언정 울음은 더는 없었다. 눈물이 머물렀던 자리를 위로하듯 반짝이는 미소가 입가에 감돌기 시작했다. 웃음과 함께 생명력을 머금기 시작하는 얼굴이 등 뒤의 바위산을 돌아보았다. 

산을 다시 오르는 걸음은 오래전과는 달리 비틀비틀 힘겨웠으나, 정상을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은 그대로였다. 험난한 돌길에 몇번이나 넘어지고 비척였지만 단단한 얼굴은 오히려 웃었다. 정상에 다다라서야 웃음을 보였던 어제와는 또 달랐다. 검과 함께 앞서거니 뒷서거니 산을 오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더의 의지였다.

극복에의 의지, 삶을 놓지 않는 손, 반짝이는 생명력.

전쟁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이별이 남긴 울음이 채 지워지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더없이 아름다웠다.

 

*

 

어제의 크고 작은 실수를 만회하는 듯한 공연이었다. 공연적으로 좋았다. 얼핏 6월 23일을 다시 돌려온 듯한 느낌이 모레의 공연을 기대하게 해주었다. 일등 공신은 1막의 음향이었다. 1막의 음향이 완벽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랄 곳 하나 없었다. 부디 앞으로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공연을 보면서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나 아쉬웠던 점은 민경아 기네비어의 대사하는 음성. 1막의 음향에서도 유독 그녀의 말소리만이 작았다. 노래할 때는 괜찮은데, 대사할 때는 갑자기 음량을 줄인 느낌이라 귀를 쫑긋 세워야만 한다. 덕분에 아더의 일관된 높낮이의 대사 톤이 얼마나 듣기에 좋은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주어진 대사를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는 음성이 극을 이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아더와 가장 스스럼없이 친한 건 역시 케이가 아닐까. 명색이 생일파티인 이 현장에서 주인공인 아더는 내내 소위 ‘몰이’를 당하지만 그런 아더가 유일하게 먼저 골탕먹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케이. 오늘도 건배 릴레이를 이어가는 와중에 케이에게만은 잔을 뒤로 빼며 갸웃, 웃는 얼굴로 약을 올렸다.

케이의 잔망도 늘었다. 사과하는 아더에게 ‘노는 거잖아, 뭐 하는 거야’ 웃음 섞인 핀잔을 주며 아더의 가슴을 주먹으로 무려 콩콩콩.

랜슬럿과의 보기 좋은 장면도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랜슬럿이 아더의 어깨를 끌어안을 때, 그에게 몸을 기대며 쑥스러운 듯이 혀를 빼꼼 내밀어 웃던 얼굴. 사랑받는 동생으로서의 얼굴이 참 예뻤다.

 

〈난 나의 것〉. 생생하게 살아있는 음향에서 고스란히 전달받은 그의 소리기둥. 세상에 이런 일이. 〈내 앞에 펼쳐진 이 길〉과 함께 아더의 성격이 형상화된 듯한 청각에 황홀했다. 곧고도 강건하며 심지 있는 목소리를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계속 이 음향으로 듣고 싶어요. 음향팀 화이팅.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엑스칼리버요?”

되물으며 그가 입꼬리로 피식, 헛웃었다. 이제 막 용의 불길을 다스리는 법을 알았을 뿐인데 엑스칼리버라니? 천 년 동안 그 바위에서 검을 뽑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몹시 황당해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정말일까? 그게 내 운명일까? 갸웃하는 반신반의함 또한 보았다.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 아더의 순수하면서도 솔직한 성격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도입부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자문하는 노래. 그러다 결심하며, 스스로의 의지로 산을 오르기 전에 멀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아더의 첫걸음이었음을 오늘 확인할 수 있었다. 

성큼성큼 어찌나 거침없던지. 세상 두려울 것 없는 걸음걸이를 보노라니, 이제 막 걸음마 뗀 아이의 직진 행보를 보는 것도 같아서 울컥했다. 

 

놀랍게도 신기하게도 검을 뽑아 들어올린 후에 박수 소리가 없었다. 완벽한 고요였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도 아주 드물게만 느껴보았던 것ㅡ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와 음모 사이의 고요한 정적. 그것을 오늘 만났다. 객석의 모두가 신의 검을 뽑아 올린 아더를 바라보기에 여념 없었다. 위대하면서도 신성한 광경을 눈앞에 두노라면 말문이 막혀버린다고들 하지. 그런 순간이었다.

 

〈검이 한 사람을〉. 케이 네와의 알콩달콩은 역시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노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아더를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그대로 높이 들어 올려 와하하하. 만면으로 웃음꽃 피는 아더의 얼굴, 티 없이 맑고 해사한 웃음들. 그렇게만 계속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계속 케이와 친구들이 함께 걸리는 시야라서 보았는데, 케이.. 기네비어와 아더를 정말 흐뭇하게 지켜보더군요.. 아더 아버지인 줄..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그, 그럼요! 대단했어요!”

기네비어와의 주먹콩의 합도 대단히 자연스러웠고, 무엇보다 오늘은 검을 뽐내면서 귀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해놓고는, 스스로도 웃겼는지 푸흣 소리 내 웃어버렸어. 웃음소리에 심장이 달칵.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머리 위로 두 팔 높이 엑스자 그리는 필사의 제지. 뭐 하는 거야아, 재빠른 속삭임. 그렇지만 언제나 소용이 없지요.

여기서 민경아 기네비어는 늘 정색을 한다. 랜슬럿에게 목검을 던져주고 앞으로 나서면서 아더를 밀쳐내는 동작에 찬 바람이 분다. 김소향 기네비어가 같은 상황에서 아더를 지나치면서는 부드럽게 ‘잠시만’ 하는 나긋함이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 정색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 옆에서 꿀 먹은 병아리가 되어 의기소침해진 오늘의 아더, 말려도 듣지 않던 랜슬럿이 기네비어에게 밀릴 때마다 얼굴을 활짝 꽃피우며 손뼉 치고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리프라이즈〉. 오늘의 기네비어, 나이스 타이밍. 일어나는 아더에게 재빠르게 다가가 부축해주었다. 오랜만에 혼자 힘겹게 끙챠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어.

 

〈왜 여깄어?〉. 랜슬럿과 기네비어의 부축받아 나오는 아더, 높이 올라간 요새를 올려다보는 눈짓을 보았다. 동시에 뿌듯하게 번지는 미소도.

“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는 어느 날보다도 또렷하게 들렸다.

모르가나의 이야기에 점점 심각해지는 얼굴, 모르가나를 몰아가는 멀린에게 의아해하면서 갸웃하는 눈동자.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멀린에게는 진정하라는 듯이 모르가나에게는 이젠 괜찮다는 듯이 건네는 목소리. 그 와중에 계속 옆구리를 짚고 있는데.. 아직 쓰린 옆구리에서 온 힘을 다하여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너무나 진심이었다. 무조건 다 옳았다.

아니 그런데..

신영숙 모르가나, 그 얼굴이 다 연기인가요?..

아더에게 보여주는 애처로우면서도 불쌍한 듯, 지친 것 같으면서도 이제 막 안식처를 찾은 듯한 그 얼굴이 다 연기란 말인가요?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아더, 속으면 안 돼.. 싶으면서도 처음으로 찾은 진정한 혈연에 끌릴 수밖에 없는 그가 이해가 되고, 하지만 가면을 쓴 누이의 거짓 눈물이 소름 돋고.

그래서 모르가나가 보는 아더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뒤통수 말고 모르가나의 시선으로 보는 아더가 너무 긍금했다.

 

결혼식의 얼굴은 항상 말해야겠지. 말해도 말해도 부족하니까. 결혼식에서의 자신만만한 잘생김, 그윽한 눈동자의 사랑스러운 반짝거림. 이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꿈에서도 되새기고 있다.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눈으로 그리고 그려서 아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오래전 먼 곳에서〉. 조원희 엑터는 늘 적극적으로 건배를 권한다. 기네비어보다도 엑터와 먼저 짠을 하는 아더를 보았네. 엑터와 한 번, 기네비어와 한 번 건배를 하고 단숨에 들이키는 신바람도. 빈 잔을 금세 새 잔으로 바꾸어 집어 드는데, 그런 아더를 놓칠세라 무섭게 짠을 들이미는 엑터의 모습에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어여쁜지 모르겠다는 듯이 함박웃음이 떠날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엑터와 짠을 마치고 몸을 틀어 기네비어와 건배를 하려는데, 웃음기 없는 그녀의 손동작을 마주쳤다. 살짝 의기소침해진 얼굴이 되어 나홀로 원샷을 했다.

오늘의 이 순간들 무척이나 소리 없는 시트콤 같고 재미있었다.

 

연거푸 술을 들이키는 바람에 오늘도 여기 누구가 잔뜩 취했는데, 처음으로 멀린을 찾으며 존대했다.

“멀린, 여기에 있었네요.”

 

〈더 깊은 침묵〉. 춤추는 아더와 기네비어 뒤편으로 엑터, 신부, 멀린 세 사람이 한꺼번에 보이는 시야였다. 그래서 보았다. 함박웃음을 그리는 엑터와 신부님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있는 멀린의 얼굴을. 김준현 멀린이 희로애락의 감정표현이 드물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더의 앞에서는 웃어주기도 하고, 토닥토닥도 해주고는 하는데 너무나 확연한 무표정 내지는 굳은 얼굴이었다. 다가올 비극 앞에 찬란한 한때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멀린의 얼굴이 내내 신경 쓰였다.

 

그리고 또 오늘의 각도에서 보였던 것.

“멀린 오늘은 세상이 다 내 것만 같아요.”

“아더,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르가나는 어디 있죠?”

아더와 멀린이 나누는 대화 너머로 기침을 뱉는 엑터의 모습이 처음부터 한 시야에 나란했다. 이 셋을 한 번에 보는 마음이 이상했다. 행복과 불행이 만나는 지점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눈에는 눈〉. ‘아더, 아더.’ 모르가나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칼을 추켜들었다가 ‘내 동생’ 이라는 부름에 칼을 낮추어 잡는 대목은 오늘도 마음을 찔렀다. 아더에게 혈연이 갖는 무게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기에. 모두에게 나가라고, 꺼지라고 날세웠던 얼굴이 모르가나에게만은 그리하지 못한다. ‘내 동생’이라고 불러주는 그녀에게만은 그리하지 않는다.

 

〈혼자서 가〉. 오늘은 다시 ‘신이 날 택했어’가 되었다. 박강현 랜슬럿과만은 계속 ‘신이’가 되는데.. 캐스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려나, 역시 알쏭달쏭하다.

칼싸움은 오늘도.. 무서웠다.. 챙챙 맞붙는 소리부터가 위협적이다. 소리가 아예 달라. 심지어 아더, 달려들면서 발돋움으로 도약을 하여 몸을 날리기까지 했다. 두 사람, 진심인 건 알겠는데 너무 위험해 보여.. 지켜보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게 될 정도로 인정사정이 없다.

 

〈심장의 침묵〉. 오케스트라의 마이웨이를 느낄 수 있는 독보적인 넘버. 어제보다도 심했다. 경주마 수준으로 내달리는 박자, 오케스트라의 속도를 따라 때려 넣게 되는 가사. 아더의 심장, 과연 침묵할 수 있나.. 〈혼자서 가〉와는 다른 의미에서 두 손을 모아 듣게 되었다. 후반의 하이라이트, 원래대로라면 계단을 타고 물 흐르듯 내려왔어야 할 소리가 내내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단 하루의 변주로서는 짜릿했지만, 계속 이대로라면 박자.. 괜찮을까..

 

〈이게 바로 끝〉. 아더의 분노와 절망, 다시 분노가 세 겹이 되어 만나는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랜슬럿과 기네비어를 영원히 추방한 다음에 부르는 소절부터ㅡ무너지는 꿈, 이게 바로 끝ㅡ의 소리가 그야말로 처절했다. 통한의 심정이라는 게 이런 걸까. 노래로 울부짖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멀린, 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도 평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울먹임이나 읊조림 같은 차원이 아니었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음성이었다. 허탈하게 웃음처럼 뱉어내다가 울음이 되어 끅끅 뱉어지고야 마는 소리였다.

 

샤아더 사랑해.

 

*

원하는 게 뭡니까

그, 그럼요. 대단했어요.

멀린, 여기에 있었네요.

신이 날 택했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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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6.28

공연적으로 좋았던 공연,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