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의 단 하나의 넘버는 〈왕이 된다는 것〉. 낮밤을 통틀어 밤의 노래가. 이제까지의 공연을 모두 아우르는 듯하였던 왕이 된다는 것.

 

시작부였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어깨가 비스듬히 늘어져 있는 것부터가 마음을 두드렸다. 1막의 푸릇하리만치 곧게 선 모습이 두 눈에 아직 선한데.. 갑옷의 무게와 전쟁의 압박, 왕으로 서야 한다는 삶의 중압감에 짓눌린 어깨로 그가 서 있었다. 

“왕이 된다는 건 뭘까.”

삶의 풍랑에 기운 육신이 자문했다. 만인이 사랑하여 우러렀던 청년왕의 행색은 초라했다. 그를 깨웠던 반짝반짝한 빛이 이제는 시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한 번 가봤던 길은..”

막다른 길 앞에서 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주위를 빙 둘러보던 그가,

“모두 막혔고..”

힘없이 두 손을 늘어트렸다. 그가 알던 세상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고, 지난 역사 위에 서는 일은 버겁기만 했다. 도대체 영원이란 뭘까. 거짓 앞에 신념에 찬 깃발을 들고 세상과 맞설 위대한 왕이, 나는 될 수 있을까.

그가 읊조렸다. 터무니없는 도전을 떠맡긴 운명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면서. 그러나 텅빈 무대 위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끝없이 던지는 물음 속에 자조와 고독이 함께 왔다.

하지만,

“내 한계를 넘어 더 가볼 수 있을까.”

쏟아지는 고독 속에 파묻히는 대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날 향한 의심을 과연 지울 수 있을까.”

가엾은 스스로를 연민하며 울기보다는 일으켜 세우려 했다. 〈도리안 그레이〉로 대변되는 나락에 자신을 맡기는 대신 운명의 소용돌이 안으로 한 발자국 더 들어서면서. 진실 앞에 물러서지 않고, 운명에 맞서는 일이 제아무리 힘들다 해도 탓하고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세상의 끝에 섰다 하여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무너트리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

회한 속에서 몸을 떨쳐내듯, 겨울바람을 헤치며 그가 앞으로 내디뎠다. 스스로의 눈물을 딛고 선 정면으로의 한 걸음 또 한 걸음에 발밑의 땅이 울었다.

“와!”

분노에 찬 바다를 두 팔이 넓게 끌어안았다. 소릿결의 층층마다 느껴지는 떨림에서 그가 맞서야 할 운명의 다변하는 잔인함이 엿보였다. 겨울바람이 되었다가도 금세 바다가 되고, 이어서는 발밑의 땅을 흔들어대는 운명 위에 서서,

“가!”

그가 외쳤다.

곧게 편 검지로 정처 모를 정박할 곳을 가리키며,

“앞-으-로.”

다음 장의 운명을 향하여 성큼성큼 걸었다.

한계를 넘어, 

의심을 지우고,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않으며.

물러서지 않겠노라 천명하는 순간에 덧씌워진 2차 애드립은 모든 것을 떨쳐내려는 몸부림 같았다. 고독을, 망설임을, 두려움을 노래를 따라 한 꺼풀씩 벗겨갔다. 처절할 정도로 절박한 몸짓으로. 용솟음치는 음계를 따라서. 

“운명에 맞서는”

제 앞에서 불길처럼 넘실대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그가 몸을 떨었다. 어느샌가 놀랍도록 단단해진 소리가 운명과 당당히 대치하는 가운데, 그가 두 팔을 가로 벌렸다.

“왕의 길을 난 가리라.”

노래는 의지가 되어 맺혔다. 걸쇠로 걸어 잠근 듯한 마지막 음절의 단단함에 울컥하는 나를 두고 그는 혼연히 주먹을 쥐었다. 맹세가 된 노래를 두 눈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은 주먹이었다. 군데군데 갈라지고 깨져 있었으나 심지만큼은 단단한 그의 노래가 굳센 주먹 안에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낙엽〉을 노래하는 그를 볼 때마다 떠올리곤 하였던 단 하나의 수식어가 떠올랐다.

‘아름답도록 견고한.’ 

오늘의 노래가 그랬다. 왕이 된다는 것으로 그가 보여주는 삶의 형상이 꼭 그랬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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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10.04

신기한 게 뭔지 아나요. 초연 때는 분명 청년왕으로 보였고 이 표현에 어떤 위화감도 없었는데. 재연에서는 소년왕이라 칭해야 할 것만 같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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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10.04

이 점만을 제외하면 이 글이 향하는 결론은 재연에도 유효하다. 시아준수의 왕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아름다우리만치 견고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