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공연이었다. 신선하고 색다른 활력이 있었다. 수훈은 신영숙 모르가나에게 있었다. 모르가나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새로웠다. 20년간 갇혀 있으면서 폭발한 강함, 뚜렷한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어떤 가면이든지 자유자재로 쓰고야 말 정도로 거침이 없는 간사스러움. 폭발하는 힘과 간드러지는 연기 사이를 오고가는 능란한 완급 조절.
그래서 정말로 재미있게, 마치 흥미진진하게 잘 짜인 영화를 감상하듯이 볼 수 있었던 〈왜 여깄어〉.
신영숙 모르가나는 항상 철저하게 버림받은 누이의 가면을 쓰고 있는데, 오늘은 그 가면을 ‘입어가는 모습’까지도 보았다. 시작부였다.
“아무도 원치 않던 버려진 소녀, 혼자가 되었지. 어느 순간 난 이미 먼지만도 못한 존재.”
서글픈 얼굴이었다. 어찌 되었건 분명한 사실이므로 여기서는 굳이 표정을 꾸며낼 필요도 없었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으러 온 것이 맞지 않나. 자신의 것을 되찾으러 왔다는 딱한 그녀를 그 누가 탓하겠는가. 경청하는 군중도 그녀를 가여이 여기고 있었다. 동생이 그녀의 손을 잡아 온 것도 그때였다.
“한평생 거부당한 상처를 낫게 해줄게.”
멀린의 차가운 손길에서 그녀를 갈라내며 동생이 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남매의 체온이 처음 맞닿은 순간이었다.
“우리 함께 있을래, 울지 않게 해줄게.”
누이를 똑바로 보는 눈에는 깜빡임조차 없었다. 손을 꼭 잡고, 올곧게 눈과 눈을 마주쳐가며, 세상 어떤 의심조차 물리쳐낼 목소리로 동생이 말했다. 상냥하며 따스한 동시에 심지가 곧게 선 음성으로,
“바로 구해줬겠지. 어떻게든 해봤겠지.”
동생이 잡아온 손을 그녀가 내려다보았다. 갸웃한 고개가 살짝 기우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표정에는 이렇다 할 동요는 없었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아빠가 자식을 내다 버리나.”
합창이 된 남매의 소절이 그 증빙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원래 잔인한 법.”
자꾸만, 자꾸만 밀어내는 멀린이 기어이 불씨를 지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며,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며 무정한 말만 비수처럼 꽂아가다가,
“왕이 되어야 할 너의 운명.”
쐐기를 박았다. 순간 불꽃이 튀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같은 핏줄이었다. 자신의 혈통이 곧 아더의 혈통이며, 자신의 불길이 아더의 안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정작 ‘운명’만은 아더와 그녀가 이렇게나 달라야 한다는 말인가. 일순간 번뜩이는 눈이 억하심정을 삼켰다. 줄곧 처연했던 입꼬리에 비웃음이 번졌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멀린은 최소한의 설명조차 없었다. 모두를 기만하는 말장난뿐. 이대로라면 그녀는 다시 영문도 모른 채 세상에서 버려질 것이다.
막 다른 길이었다. 멀린이 세운 철벽에 가로막혀 떠밀릴 바에야, 멀린이 선택한 운명을 파괴해주리라.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동생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꾸며낸 ‘누이’의 얼굴을 하고.
운명을 함께 할 동반자, 잃어버린 행복을 함께 찾아갈 ‘가족’인 것처럼.
또한 신영숙 모르가나와 함께라면 늘 영화 같은 〈눈에는 눈〉.
“용의 불길이 솟구치게”의 합은 매번 말해야만 해. 동생의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던 불길을 잡아채내는 모르가나의 손동작과, 그녀의 손길이 지핀 불길에 서서히 몸을 맡기며 검을 움켜쥐는 아더는 영상으로 꼭 남았으면 좋겠어요. 타오르기 시작하는 아더의 불길에 짐짓 뜻대로 되었다는 승리의 미소를 머금는 모르가나도, 그녀의 음모는 까맣게 모른 채 불길에 잠식당하는 아더도 하이라이트 영상에 꼭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난생 처음 겪는 불길에 숨을 몰아쉬는 아더, 의기양양한 싸늘한 미소의 모르가나, 정반대의 표정으로 나란히 정면을 응시하던 누이와 동생이 서로를 마주할 때엔 미소를 싹 지우고 지그러진 가면을 쓰는 누이의 기만적인 행동까지.. 오래오래 보고 싶은 장면.
*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을 야무진 주먹으로, 이 앙다문 발차기로 응수해놓고는 의기양양하게 딱 벌어진 어깨로 그가 웃었다. 저 멀리 별을 가리키며, 하하, 내가 다 무찔렀어. 하는 얼굴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용의 불길을 불러일으키는 멀린, 심상치 않은 상황에 뒷걸음질하던 그가 아버지와 시선이 맞았다. 동그래진 눈이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황급하게 아버지를 붙잡는 그 눈을 보아서 좋았다. 아버지를 의지하는 18세 소년, 생면부지의 상황에서 서슴없이 아버지를 의지할 수 있는 아들로 자란 그가 좋았다. 의지처가 되어주는 아버지가 그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이 장면이 좋았다.
“무슨 준비요?” 되묻는 음성의 떨림이 오늘따라 짙었다. 용의 불길을 처음으로 맞닥뜨린 흥분을 아직 전부 잠채우지 못한 탓에, 호흡도 썩 고르지 않았다.
“엑스칼리버요? 그건 말도 안 돼요.”
평소의 기가 찬 어조가 아니었다. 파르르 떨리는 음성이었다. 오늘은 이 사람이 대체 나를 어디까지 몰고 갈 셈이지, 경악하는 것 같았다.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틀어놓더니, 이제는 천년검을 뽑으라 한다. 어디까지 그 장단에 맞춰주어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검이 한 사람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한두 명씩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하던 아더. 오늘 그만 몸을 케이 쪽으로 틀어서 케이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앗차, 이게 아닌데. 황급히 케이를 등지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래, 그가 케이를 등지고 있어야 케이가 와다다다 달려와서 그를 들쳐 안고 또 한 번의 축하 세례를 해줄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우리 만난 건〉은 왼블의 넘버다. B에서 봐야만 해. 기네비어의 소절 내내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이 얼마나 말도 못 하게 예쁜지 몰라..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눈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에게로 이끌려오는 그녀를 감격적으로 바라본다. 감격이 맺혀 울망울망한 반짝임이 내내 얼굴에 드리워져 있어. 얼굴만 보게 돼요.
〈기억해 이 밤〉에서 신부님을 바라보는 눈도 왼블의 차지. 특히 성혈의 차례에. 잔에 입을 맞출 때조차 신부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강건하게 반짝이는 얼굴이 좋았다. 얼굴로 임금님 하는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야..
“그 함께할 미래에 동생과의 춤이 있지?”
말리려는 누나의 손을 잡아끌며 ‘박수 두우번!’ 굳이 굳이 가르쳐주는 동생. 기껏해야 동작 하나 일러주고는 이제 준비 끝! 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찰나의 그 야무진 얼굴이 세상 귀엽고 세상 얼척없는데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누나와 춤을 춘다는 기대감을 품고 앙다문 입술, 반짝이는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모르가나도 그래서 말을 잃은 게 아니었을까.
“이번 건배 제의는 아버님께 맡겨볼게요.”
기네비어의 말에 입술을 앙 깨물어 미소지으며, 두 팔을 쭉 내밀어 아버지를 북돋아 주었다. 이어서는 그대로 손뼉을 착착 치는데, 커튼콜에서 오케스트라에게 박수를 건네는 그가 생각나는 자세였어. 예뻤다는 뜻.
심장의 침묵 인트로. 오늘도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등장. 한눈에도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음이 보이는데, 아더가 안중에도 없는 랜슬럿이 결국 아더를 울리고 말았다.
“날.. 날?”
끅끅 울음 뱉듯 헛웃는 소리에 속이 쓰렸다. 랜슬럿이라는 사람이 아더에게 갖는 무게가 결코 작지 않을진대, 랜슬럿의 세계에 아더는 더는 없는 것만 같았다.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라던 목소리들이 아득하게 메아리치는 듯했다. 그런 상실감을 그의 얼굴에서 보았다. 막다른 길에 이르러 시선 하나 차분히 둘 곳이 없는데, 자신을 ‘야만인’에 빗대는 기네비어의 힐난은(타이름이었겠지만) 결국 그를 끝까지 몰아세우고 말았다.
“네가 우리 아버지를 죽게 만든 거야.”
이 말이 그녀를 상처 주고, 또 스스로를 상처줄 것을 알면서도 내뱉고야 말았다. 다스려내지 못한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 오늘의 읊조림, “아버지..”가 너무나 슬펐다.
보세요, 아버지. 저는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당신의 손길이 너무도 그리워요. 사면초가된 절망의 노래, 해갈될 수 없는 그리움의 노래, 가눌 수 없는 슬픔의 노래, 심장의 침묵이었다.
아버지를 찾던 그가 멀린을 찾아가보리란 건 예상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눈앞에서 누나를 위협하는 멀린을 목격하게 된 그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두 눈이 끝없이 부풀며, 목소리는 잔뜩 노하여서 황급히 모르가나를 부축하며 그는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내가 믿어선 안 될 사람은 오히려 당신이겠지.”
사실 멀린이야말로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줄 수 있을 마지막 보루였을 텐데. 그래서 찾아갔을 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 순간이 그에게는 또 하나의 세상의 끝이 아니었을까..
“모르-가나.”
오늘의 멀린아더, 웃는다고는 할 수 없는 미묘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평정을 가장하며 깊이 가라앉은 얼굴도 아니었다. ‘끝’을 눈앞에 두고 다소 싱숭한, 바랐으되 바라지 않기를 바랐던 마지막이 목전에 와있는 심란함이 보였다. 아주 잠시였지만.
〈왕이 된다는 것〉은 leaplis.com/582401
민경아 기네비어와의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는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이별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단 그가 다른 사람이 된다. 그와 함께 울고 함께 무너지며 여지를 주는 김소향 기네비어와는 달리 민경아 기네비어는 처음부터 확고하게 이별을 전하고 있기에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별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을 뿐.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는 그녀의 마음을 돌려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 눈맞춤을 시도할 뿐. 곧 그녀가 자신을 일으켜 세울 것 또한 예감하고 있다. 그녀는 그와 함께 무너져주지 않는다. 그저 그를 수습하려 할 뿐이다. 글썽이는 얼굴은 막다른 길을 보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를 잡아보려던 간절함 대신 끝나버린 길 앞에서 망연한 그였다.
두 사람의 듀엣도 자연히 죽은 사랑을 위한 애도의 노래가 된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철철 흘러넘치는 리프라이즈가 아니라.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와 민경아 기네비어는 다시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할까? 선뜻 긍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철저한 끝이었다. 어떤 여지도 없는 비극이었다.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오늘의 표정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웃는다고 할 수 있을까. 기네비어를 보내고 나서 더 짙게 터진 울음이 채 수습되지 않은 얼굴을 애써 펴보이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한 차례 웃음으로 덧칠해보려고 했다가 금세 포기했다. 미끄러지는 눈썹, 허물어지는 입술은 결국 바위산을 돌아보며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산을 오르는 걸음도 어찌나 힘겹던지. 가장 낮은 바위에 발을 디디면서도 몇 번이나 휘청댔다.
정상에 올라서는 마른 땅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은 굳었을까, 묻게 할 만큼.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이 그의 심신을 녹여주기를 바랐다. 세상을 하얗게 지워가는 그것이 그가 선 ‘지난 역사’까지도 전부 품어주기를 바랐다.
앗! 깜빡했다니. 샤아더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