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sh Blood 에서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내 사랑 미나!’ 부터 먹잇감을 침대로 내팽개치기까지의 풀샷. 

오늘따라 안개의 밀도가 빼곡했다. 서리 내린 듯 뿌연 공간이 하얗게 뭉그러져 있었다. 무너진 성에 자욱한 안개, 흐리고 서늘한 공기. 모든 것이 불투명하게 지워진 곳에서 그는 색채를 띤 유일한 존재였다. 단 하나의 색, 채도 높은 강렬한 빨강으로 공간을 압도하는 그의 손안에서 먹잇감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언제나 순종하며, 언제나 감사할 뿐.

아름다웠다. 시아준수도 봤더라면 흡족해하였을 텐데. 두 눈으로 찰칵하여 간직하고 싶은 미장센이었다.

 

오른손의 장갑은 오늘도 말썽을 피웠다. 그간에는 그래도 오늘처럼 완벽하게 헛시도를 한 적은 없었는데. 헛손질로 다급해진 왼손이 서두르는 모양이 대단히 귀여웠다. 날쌔고, 정확하면서도 촉박해진 만큼 거친 재시도. 장갑의 버퍼링으로 박자가 밀린 날이면 으레 듣게 되는, 강하게 밀고 당기는 ‘다시 찾은 내 힘!’은 보너스.

 

기차역, 린지 미나와의 대화. 애드립은 일전 그녀와의 공연에서와같이: 연구한 게 이겁니다. 

 

She, 그가 항상 제단 왼쪽의 십자가만 밀쳐내는 터라 반대편에 꼿꼿하게 남은 십자가가 신경 쓰였는데.. 드디어 그가 해냈다. 십자가 스트라이크! 진열된 촛대들을 쳐내고, 제단 위로 올라서는 그의 힘에 밀려 오른쪽 십자가마저 쓰러진 것이다. She 의 장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십자가에 피의 복수를! 오늘과 같은 십자가 스트라이크,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신을 있는 대로 저주한 그가 십자가에 칼을 꽂아 넣기 직전, 유독 성마른 비명이 날아왔다.

 

Loving You Keeps Me Alive, 오늘의 넘버. 널뛰는 박자에 그의 노래가 파도를 쳤는데, 그래서였다. 가사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 새기듯 특히나 정성스러운 가창이었다. 가사를 꾹꾹 눌러 담듯 노래하여,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수신되는 것만 같았다.

그림적으로 좋아서(아파서) 흠칫했던 순간은 심장을 부여잡았던 손으로 시선을 떨구며 일순간 숨을 멈춘 듯한 그를 보았을 때. 아물지 않은 상처투성이의 심장을 보는 듯한 시선이 오랜 잔상으로 남았다. 

 

루시의 초대. 시아준수, 안겨드는 루시의 기세에 그만 두 손을 쓸 뻔했던 걸 보아버렸네. ㅎㅎ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꽤 높이 올라왔는데 잘 참아냈다. (귀여웠음).

 

Life After Life. 김수연 루시, 처음부터 강렬했지만 점점 더 본능만 남은 야성의 애기뱀파이어가 되어간다. 이 구역의 직진뱀파이어로는 일등인 듯.

그에게로의 돌진도 언제나 성큼성큼 저돌적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건 어느 루시 때보다 싸늘하게 정색하는 그를 볼 수 있다는 것. 오늘 역시.

첫 번째 돌진. 김수연 루시는 매번 폭 안기면서 머리를 아예 그에게 기대다시피 하는데, 머리 장식이 문제였다. 루시의 머리 위로 기세등등한 깃털이 그의 얼굴을 위협하기에, 그가, 오늘은 글쎄 고개를 있는 힘껏 위로 치켜드는 게 아닌가. 그냥도 아니고 루시를 등 돌려보내는 손짓에 맞추어, 탁. 깃털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한 고갯짓이건만 그마저도 얼마나 절도있게 하는지 처음 보는 사람은 안무라 해도 믿을 것이었다.

 

파워 대 파워인 김수연 루시와의 노래도 점차 조화로워지고 있다. 듀엣의 합이 농익을 때면 굉장한 뱀파이어즈를 볼 수 있을 듯하여 기대된다. 

 

Mina’s Seduction. 침실 문 앞까지 두 사람이 함께 이동할 때 문득 눈에 들어온 것. 미나는 걸음을 쪼개어 빠르고 바지런히 걷는 데 반하여, 그는 단 두 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만에 그녀의 걸음을 전부 따라잡는 넓은 보폭이 새삼 멋있었다.

 

It’s Over. 무대 가장자리에서의 마지막 대치, 이제부터 드라큘라의 런웨이라 하자. 26일부터 여기서 그가 다리를 쓰는 맵시가 자꾸 시선을 강탈한다. 길게 뻗은 다리를 어찌나 다채롭게 쓰는지 감탄스러울 뿐야. 특히 맨 처음 적(잭)을 상대할 때 한껏 눕혔다가 꺾어서 세우는 오른쪽 다리는 볼 때마다 놀라울 지경.

 

엔딩. 발치에 채는 천에 멈칫, 이어서 그림을 올려다보는 부분은 왜 이렇게 항상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그림을 향해 손을 올려 뻗을 때도 있고,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내저을 때도 있는데, 오늘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미동도 없이 굳은 채로 잠시 잠깐 그곳에 석상처럼 멎어있었다. 그의 심장, 그 자리에서 이미 멈춰버린 건 아닐까 싶게.

 

나의 ‘절망 속에!’는 점점 강렬해진다. 이제는 노래와 절규의 경계선에 이르렀을 정도.

‘남의 피를!’ 탐하던 그늘 속의 영혼ㅡ의 묵직한 절규는 오늘은 들려주지 않았다. 새로운 공연, 새로운 미나와 만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꼭 다시 만나게 될 거라 믿어요..

 

 

덧. 부케를 퀸시가 전해주었다고 한다. 나의 시야에서는 앙상블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뭔가 오래 손을 타는 것 같더니, 전달해주었을 줄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