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감도는 머리카락, 결 좋게 빛나는 적발. 2틀을 꼬박 쉬고 만난 백작님이라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내도록 얼굴을 좇게 되었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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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공연이었다. 목소리도, 연기도, 배우들의 화합도 모두 좋았다. 평화로우며 안정적인 낮공연, ‘마티네’다웠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개인적으로는 삼연곡이 참 좋았다.
시작에 앞선 문장: “미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진실된 러브스토리를 들려드릴게요.” 부터. 두 사람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나란히 웃는 여기 이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한 이 대목부터 나를 울컥하게 했다. 서로만을 바라보며 웃음 나누는 두 사람이 참 평화로워 보여서.
얕은 숨이 울먹임으로 점점이 번져가던 At Last도, 오케스트라와 줄다리기하면서도 감정선을 놓지 않고 완주해낸 Loving You Keeps Me Alive도, 더 나아가 웨딩으로 이어간 슬픔과 분노까지 전부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웨딩 막바지에서는 별안간 그림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팔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한낮의 열기처럼 맹렬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그와 함께 보니, 분노가 분노를 낳고, 화가 화를 돋우는 트랩에 갇힌 기분이었다.
3월 11일 마티네의 종착지는 피날레 장인의 Finale.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결단한 그를 향하여 그녀가 달려왔다. 안돼, 싫어. 매달리는 이를 마주 안으며 그가 고개를 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비통에 잠긴 눈은 울상이었으나, 그 아래로 입술을 깨문 턱에는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스스로 갈무리를 마친 얼굴이 이윽고 비장하게 그녀를 제품에서 떼어놓았다. 그 단호함에 마음이 아팠다. 엄격을 가장한 얼굴로 감춘 속마음은 얼마나 갈래갈래 짓이겨지고 있을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나의 절망 속에 널 가둘 수 없어.”
오늘도 어김없이 절규로 시작된 피날레의 하이라이트는 파편으로나마 그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차가운 암흑 속에”부터는 평소와 달랐다. 절규와 긁는 숨을 섞어 비통한 낭송 같았던 요즈음과 같지 않았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절규를 내려놓고 멜로디를 단단하게 입혀 전부를 ‘노래했다.’
아득한 밑바닥을 유영하며 물결치는 노래가 체감상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세월이 주는 회한에 잠기고 말았다.
“부탁해요 제발, 내게 밤을 허락해요.” 에 이르러서는 노래 반 헐떡임 반이었다. 울음이 차올라 호흡마저 가빠진 탓이었다.
절규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숨으로.
쇠락의 세 단계를 밟으며 이별을 향해 그가 나아가고 있었다.
눈물이 난 건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물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를 보았을 때였다. 그녀의 흥건한 오른쪽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한 번, 그러고도 넘치는 눈물에 검지로 양 눈을 번갈아 가며 또 한 번. 제 죽음을 향하여서는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그녀의 눈물은 방울 하나마저도 애지중지하는 그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한결같이 ‘사랑’을 하고 있어서. 그 사랑을 위해 떠나는 그가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덧, 기차역에서는 “시대가 많이 변했네요.”
Fresh Blood, 오늘은 첫 번째 장갑이 말썽이었다.
Life After Life, 비석을 포옥 덮어버린 뱀피.
미나의 유혹에 맞추어 등장할 때, 성큼성큼 걸어와 발코니 문 뒤로 존재를 숨기는데 글쎄 세트가 덜컹하는 게 아닌가. 티를 다 내고 다니시는 편인 백작님. 귀여웠다. ㅎㅎ
침실, 왼팔 소매가 거치적대며 내려가지 않자 팔을 탁! 들어 올리며 빼내던 절도 있던 동작이 참 멋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