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신을 보낼 수 없어.”

그녀가 그의 손목을 붙든 것과 동시에 그가 붙들린 손목을 빼냈다. 내치듯이 매정한 동작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예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서 멀찍이 물러서 버렸다. 그리고 절규했다. “나의 절망 속에 널 가둘 수 없어.”

 

이어지는 하이라이트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노래’로 들려주었다. 

“차가운 암흑 속에 저주받은 내 인생.” 

오늘은 비탄의 제스처와 함께였다. 제 목을 움켜쥐는 손길이 할 수만 있다면 제 생명을 통으로 뜯어내려는 것만 같았다. 저주받은 생의 괴로움이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고통으로 굽은 손안에 있었다.

비통의 노래에서 오늘의 정점은: “자유를 줘.” 

어느 때보다도 오래도록 지속한 어미의 끝에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기진맥진한 그가 있었다. 애원 반 흐느낌 반으로 그가 청했다. 

“부탁해요 제발 내게 밤을 허락해요.”

 

순리를 따라 그가 그녀를 관으로 이끌었다. 그러던 중 멈칫했다. 관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지라 갸웃하는 중에 그가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칼을 쥐지 않은 손이 그녀의 젖은 뺨에 닿았다. 아주 살포시만 닿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눈물을 매만졌다.

원래는 없었던 동작이 남긴 파장은 컸다.

나는 숨을 멈추었고, 그녀의 흐느낌은 일파만파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찰나를 지체한 덕에 투신하다시피 입관해야 했다. 

 

관 속으로 뛰어드는 그라니.

사랑을 위하여 떠나는 것도 모자라,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지막이라니. 

 

관이 닫힌 후에도 ‘투신하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만 맴도는 탓에, 혼자 남은 그녀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가마득히 먼 곳에서 독백 같은 울음이 들려왔다.

신이시여, 

그가 가엽지 않나요.

그녀의 음성인지 내 마음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결례를 범할 만큼 급한 일이었답니까!”

극노한 꾸짖음이었다. 날이 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당장에라도 공격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음성을 들려주었다. 진태화 조나단에게는 이렇게까지 대로한 적은 없었는데, 혹시 조나단이 바뀐 것과도 관련이 있을까?

 

윗비베이. “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근래 들을 수 있었던 ‘있거든요’를 대신하여 오랜만에 돌아온 부드러운 어미. 그러나 조정은 미나의 대사와 맞물린 탓에 끝맺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반가웠어.

“그럼 이만,” 미나에게서 돌아서는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따로 적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돌아서는 움직임을 따라 진홍빛 롱코트가 차르륵 원을 그리는 맵시마저도 그림이다. 백작님은 옷자락으로도 연기를 하시는 게 틀림없어요.

 

She의 종장. 노래를 맺음과 동시에 탁! 들어 올린 고갯짓에 왼쪽 앞머리가 이마의 정 가운데로 동그랗게 말려 안착했다. 누운 초승달처럼 이마를 동그랗게 수놓은 붉은 머리칼이 꼭.. 세일러 비너스 같았다.. 예뻤어..

 

모양새가 예뻤던 것과는 별개로 이마 위로 한껏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신경 쓰였을 법도 한데, 삼연곡을 이어가는 그에게 수습의 여력은 없었던 모양. 머리카락은 차지하고,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무릎 꿇은 그대로 시작된 Loving You Keeps Me Alive였다. 오늘은 심지어 도입부의 노래마저도 읊조림에 가까웠다. 유난할 정도로 느릿하였던 오케스트라의 박자도 보탬이 되었다. 노래인 듯 독백인 듯하였던 오늘의 쓸쓸함에.

 

웨딩, 드물게도 부케를 ‘놓쳤다.’ 단정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꽃다발이 그의 손가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한 부케를 그가 시선으로 쫓았다가, 잠시 잠깐 도장 찍듯 쏘아보더니 그대로 눈동자만을 들어 루시를 보았다. 떨어진 부케와 루시를 연결 짓기라도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발치에 나동그라진 것을 부러 잡을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이렇게 처박힌 부케가 웨딩의 결말이라는 것처럼 쏘아보는 눈동자에 소름이 돋았다.

 

Life After Life, ‘달빛의 축복 속에서.’ 두 손을 힘있게 들어 올려, 손가락 안으로 달빛을 가두듯이 그려 보이던 동작. 거대하고도 아름다웠다.

 

루시의 죽음. 그저 예전처럼 함께 행복하고 싶을 뿐이라는 그에게 제발 이러지 말라며 애원하는 미나. 제발, 제발, 연거푸 쏟아내는 그녀를 그가 불렀다.

“미-나!”

나직하여 타이름 같기도 하였던 지난 나날들과는 달리 비통한 음성이었다. 감정이 차올라 버거운 듯도 한, 격한 부름이었다. 꼭 잘라서 들을 것.

 

미나의 유혹. ‘흐릿한 안개’로 시작되는 미나의 망설임.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으로부터 뒷걸음질하는 미나를 향한 초조함? 정색? 모종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그의 상체가 크게도 들썩였다. 늘 그녀를 향해 기민하게 반응하는 그지만, 오늘처럼 ‘동요를 감추지 않는다’는 기색마저 드러낸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

 

트레인 시퀀스, 반헬싱의 난입과 미나의 혼란을 감지한 그가 또 한 번 오랜 상념에 잠겨 쉬이 눈을 감지 못했다. 푸른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짙푸르게 음영진 눈은 관이 퇴장하기 직전에 가서야 힘겹게 감겼다. 

이렇게 감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은 오늘로 두 번째. 볼 때마다 좋다. 잠들지 못하는 번뇌로 가득한 눈, 관 안에 누워서도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마치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마음 아프게도.

 

줄리아의 죽음. 미나의 영혼까지 파괴할 셈이냐는 반헬싱의 힐난에 그가 연신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읊조림이었고, 독백이었다.

이어서는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맺었다.

“난 미나를 사랑해.”

다짐처럼, 각오처럼.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덧, 기차역의 애드립은 시대가 많이 변했네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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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0.03.13

마지막 장면을 계속 생각한다. 관으로 '뛰어들던' 몸짓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