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사를 부둥켜안으며 그가 외쳤다.
단말마의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별안간의 애드립으로 심장을 가격당한 느낌에 하마터면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왜 하필 ‘눈을 떠’야..
두 사람의 ‘신이시여!’를 번갈아 듣는 걸로도 충분히 비극이건만, 다른 무엇도 아닌 ‘눈을 떠’라니.. 미나의 ‘눈을 떠요 제발’과 수미쌍관을 이루는 그의 애드립에 퍼즐 조각이 맞물리는 느낌과 함께 심장이 마구 지끈거렸다. 좋을 대로 날뛰는 박동에 직감했다. 오늘의 피날레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임을.
예감은 적중했다.
“부탁해요 제발. 내게 밤을 허락해요.”
오열하는 그녀와 끊임없이 눈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기진맥진하여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빤히 보이는데, 제 상태는 안중에도 없었다. 정작 자신은 밭은 숨으로 가까스로 연명하는 중이면서 두 눈만큼은 그녀를 향하여 형형했다. 눈썹을 올려 시선으로 도닥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안심 시켜 주려 했다.
그 눈이 계속하여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그래도 그녀는 버텼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는 거부하듯 고개 숙인 채였다. 관으로 들어선 그를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19일처럼, 아니 그때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가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 청하는 손길에서 400년 평생의 애틋함이 묻어났다. 사랑이 담기다 못해 고여버린 얼굴로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댈 위해 내가 “떠날게요.”
마지막 눈맞춤이었다.
그녀 홀로 남은 성. 관이 스러지고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쓸쓸한 공간. 간혹 그가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여운이라는 감각 하에 그의 모습이 두 눈에 선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텅 빈 성을 두드리는 울음소리는 분명 여성의 것이었으나,
“눈을 떠요 제발.”
환청처럼 겹쳐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답 없는 관을 부둥켜안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울부짖는 빨간 머리카락이 어른거렸다.
사랑을 잃고 울던 창백한 얼굴의 왕자님의,
‘눈을 떠, 제발.’
사랑을 잃은 그녀가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아가는 그녀의 마지막 노랫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오늘처럼 두 사람이 서로의 운명으로 느껴진 날이 또 있을까.
이렇게나 닮은 둘, 이토록 맞물린 사랑이 또 어디에 있을까.
운명처럼 나란한 수미쌍관의 목격자가 된 날이자, 애드립이 만든 완벽한 비극의 오늘이었다.
*
돌아온 부음감님, 돌아온 일관성과 돌아온 여유. 박자가 여유롭고 오케스트라가 독주하는 대신 ‘서포트’를 하니, 배우들의 연기까지 달라진다.
오늘 가장 큰 변화를 보여준 넘버는 How Do You Choose. 미나와 루시가 한결 편안하게 합을 맞추었다. 노래하기에도 급급했던 박자를 떠나보내고 여유를 되찾으니 노래에 더하여 디테일까지 섬세하게 곁들이는 두 사람 덕에 넘버가 생명력으로 반짝반짝했다. 좋아하는 넘버가 살아서 숨을 쉬는 모습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뻤어.
가장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던 노래는 17일에 이어 오늘도 The Longer I Live. 박자를 노니는 노래와 그 노래를 겹겹이 이불처럼 에워싸는 반주의 조화, 듣기에 참 좋았다.
드라큘라의 성, 노백작님 바로 옆에서 어른대는 그림자로 자꾸 시선이 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굽은 등, 산발한 머리카락, 척박한 토양에 간신히 움튼 나무줄기처럼 쪼그라든 손. 그의 그림자는 실로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림자를 통해 듣는 노백작님의 음성은 그대로 공포 영화에 삽입되어도 손색없을 것 같았다.
Fresh Blood에서 기쁜 소식. 입맛 다시기가 돌아왔다❣️ 제물로 바쳐진 먹잇감에 꽂아둔 시선을 번득이며 두 손을 포개어 비비는데, 심지어 오늘의 박자에 맞추어 느릿, 느릿. 펌프질하듯이 손을 꾹꾹.
‘내 사랑 미나’의 흐릿한 안개도 요즘 내도록 알맞게 짙다. 아름다워서 참 흐뭇해.
여기에 불타는 저 ‘녁’의 용솟음까지 함께 왔다. 가장 처음 들려주었던 ‘녁’의 회오리치는 용솟음보다 기본음이 더 높았다. 애초에 ‘뿔’이 잔뜩 성이 나 있는 상태였다. ‘뿔’의 피치를 디딤돌 삼아 ‘녁’이 지축을 박차듯 거침없이 솟아올랐으니 오늘의 ‘불타는 저녁’이 불러온 파괴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들으며 알 수 있었다. 프레시 블러드의 완성을 위한 모든 요소가 한데 집결하는 중임을. 삼연의 프레시 블러드가 완성형으로 내디디고 있다는 것을.
오블, 그리고 임혜영 미나와의 she. 그래서 오랜만에 미나의 시선을 따라서 보았다. 임혜영 미나는 she의 진실을 알아가며 겪는 동요를 가장 겉으로 표현하는 미나이기에, 때때로 그와 그녀를 함께 보는 편이 she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된다.
오늘도 역시ㅡ엘리자벳사를 소개받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던 미나, 차가운 암흑 속에서 밤새도록 싸우는 왕자님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엘리자벳사와 미나 두 사람,
그와 엘리자사의 포옹, 덩달아 홀린 듯이 그를 향해 달려가려다 멈칫하고 말던 미나.
십자가를 찌르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며 안된다, 안된다 고개를 내젓던 미나..
있는 그대로의 she를 전체적인 시야로 조망하는 일이, 그와 미나를 한눈에 가득 담는 것이, 때때로 미나의 시선을 따라서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오블에서 항상 사무치게 깨닫는다.
Loving You Keeps Me Alive의 애드립 구간이었다. 무릎 꿇기 전에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비장하게 소리를 터트려냈다. 정점은 ‘그-대-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마디마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렸다. 손가락마저 백 퍼센트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저대로 굳어 손가락이 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박자가 허락한 여유로움을 가장 강하게 체감했던 Life After Life의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한 삶. 한 음절 한 음절이 성큼성큼 걷는 걸음처럼 또박또박 정확했다. 음절 단위로 시간이 할애되는 느낌이 생경하고도 좋았다. 그것도 1막의 마지막 넘버, 마지막 순간에서 단계단계를 분명하게 밟아오르는 박자를 만나니 고조되는 감각이 차원이 달랐다. 기존의 영원히x4는 속도 탓에 귀 기울여 듣기에도 바빴다면 오늘은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또한 분명하게 함께 달아오르는 감각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만났다. 천둥치며 암전되는 순간 짜릿하게 차오르는 건 의심의 여지없는 충족감이었다.
It’s Over, 반헬싱 무리의 난입.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의 기세가 대단했다. 반헬싱의 코앞까지 단번에 몸을 날리는데, 찰나의 움직임이 정말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 높게 뛰어올랐다가 바람처럼 반헬싱의 코앞에서 착지하는데 와, 그 비거리에 감탄, 박력에 찬탄.
트레인 시퀀스에서 미나와의 듀엣: Life After Life로 전환되는 순간, 두 사람이 합 맞추어 서로를 바라볼 때. 이 동작이 정확하게 맞물릴수록 짜릿한데 오늘이 딱 그랬다. 드라큘라 안에 미나 있고, 미나 안에 드라큘라 있는 듯하였을 만큼 정확했다.
관의 퇴장, 오늘은 감았던 눈을 재차 부릅떴다. 미나와 소통하는 중에 난입한 반헬싱의 작태가 생각할수록 용납되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잠 못 이룰 정도로 화가 나서 다시 눈을 뜬 걸까? 눈을 다시 뜬 건 또 처음이라 휘둥그레.
The Longer I Live에서 가장 좋았던 소절은 ‘당신’ 아픔에 모든 게 흐려져. ‘당신’이 눈 앞에라도 있었던 걸까. 두 손을 뻗어 허공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너무나 처연했다.
Finale의 수미쌍관 이외에 맴도는 장면은 둘.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확언하는 미나에게서 뒷걸음치며, 차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읊조렸다. ‘아니야.. 아니야..’ 우는 입 모양이 처량했다. 그토록 원하던 단 하나를 얻었음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댈 바라볼수록 점점 가슴이 아파, 더듬더듬 고통을 호소하듯 노래하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미나의 얼굴. 잔잔하고도 애틋하게, 그를 향하여 내내 미소지어주고 있었다. 그의 단 한 사람이 그에게.
덧. 기차역의 애드립은 “신은.. 역시 공평하군요.”
윗비에서는 오늘도 ‘아름다운 곳’과 ‘있어서요’ 콤보가 함께 왔다.
대사를 살짝 바꾸어버렸던 Lucy & Dracula 1. 당신이 ‘하지’ 않는다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구요.
눈을 떠 제발 소화하고 품으려면 일주일도 부족한데 당장 내일 공연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