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머리, 새빨갛게 빛나는 귀걸이, 새빨갛게 거대한 반지. 가능한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나온 그에게서 오랜만의 공연을 맞이한 각오가 엿보이는 듯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노백작님의 유난히도 차분한 톤이 낯설게 느껴질 만큼.
단단하게 정제된 그의 목소리가 생경할 만큼.
탄탄한 목소리에서 3주의 휴식이 체감되었다. Fresh Blood에서, Life After Life에서. 후자는 특히나 너무나 좋았어. 견고하게 뭉친 목소리의 건강한 형상을 공감각적으로 느끼며 생각했다. 공연 중단을 야기한 코로나는 분명 지구적 불행이지만, ‘휴식’의 차원으로만 본다면.. 하늘이 그의 목소리를 어여삐 여겨 쉴 시간을 주었구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갈아쓰던 목소리에 잠시 잠깐의 오아시스 같은 휴식이 내려진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회의 감격은 프레시 블러드에서 가장 컸다. 가로횡단에서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분명하게 내딛는 노래와 함께 마음이 부침 없이 고조되어만 갔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힘주어 쥐고 있었다.
초조한 기다림을 견뎌낸 후에 마침내의 시아준수였다. 그가 마치 꼭 어제처럼 눈앞에 있었다. 그야말로 ‘기나긴 세월 끝에 다시 찾은’ 그였다. 이렇게까지 감정이입 되었던 프레시 블러드가 또 있었을지.
문득 초연 엘리자벳의 휴공 기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거진 3주를 보내고 3월의 18일째에서야 눈물의 재회를 했었지. 그날과 다른 듯 닮은 오늘이었다. 그가 무대를, 내가 그의 무대를 그리워한 시간들이 8년의 세월이 오간 데 없이 똑 닮아 있었다.
애드립마저도 울망울망하게 했다. 소위 ‘웃펐다.’
“여자를 웃게 하려면 좀 더 고민을 많이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의 상황을 절묘하게 녹여낸 그의 재치에는 웃었고, 현실에는 마른 숨만 들이켰다.
그런데 이 모든 촉촉한 마음을 화들짝 반전시켜버린 순간이 She 에 있었다.
‘제발 엘리자벳사 눈을 떠 제발’
애원하던 그가 고개를 드는데 글쎄, 아랫입술이 찢어져 붉은 피가 맺혀있는 게 아닌가. 꽤 많이 찢어진 듯 핏방울이 크고도 선명했다. 고갯짓을 따라 얼마간은 턱으로 흩뿌려질 정도였으니.
양 뺨으로는 갓 염색한 핏빛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붉은 땀이 가득하고, 얼굴 아래로는 턱을 타고 내려온 피눈물이 목 한가운데를 선혈처럼 가로지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의 She였다.
그 피와 땀과 눈물의 얼굴로 ‘나와’ 결혼했다며 제 가슴을 한 번 쾅 손바닥으로 주먹 박듯 하는데.. 여기 당신 눈앞에 주저앉아있는 나를 보라는 듯한 몸부림에 내 심장도 쿵.
Lucy & Dracula 2. 루시의 초대. 아니 그런데 그를 초대하는 루시가 오늘 십자가 목걸이 빼는 것을 잊고 말았다. 그에게로 달려가는 걸음마다 십자가가 달랑달랑. 괜찮은 것인가..
절묘하게도 루시를 침대에 내려놓은 그가 오늘따라 굉장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십자가의 기운을 누르듯이. 의도한 바인지 알 수는 없지만 대단히 그럴싸한 대처였다
Mina’s Seduction. 등장 직후, 가만히 숨죽인 채 미나에게 귀 기울이는 모습이 너무나 신사의 그것. 미나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미동도 없이 곧던 자세가 호흡부터 거칠어진다. 낮게 그르렁대는 숨결로 그녀를 회유하는데, 찰나에 돌변하는 연기까지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하나하나 느릿느릿 눈에 박혔다.
그리고 오늘의 그림. 흡혈을 위해 가슴을 그어줄 때 유난히 밝았던 갈색 동공. 그의 눈동자가 생명을 지닌 채 스스로 발광하는 것만 같았다. 이채 서린 밝은 동공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
The Longer I Live 의 조명은.. 어쩐 일이지? 원래도 이렇게 보랏빛이 짙었던가? 심지어 밝았다. 밝고 채도 높은 보랏빛 공간 속에서 쓸쓸한 푸른 기운은 소거되어 화사하기까지 했다. 절정부에서는 녹백의 조명까지 더해져 알록달록했다.
온통 보라인 공간 속에 가득한 죽음빛 조명, 그 공간을 홀로 가로지르는 그. 낯설지만, 보색의 대비는 신비로웠다. 그래서 오늘은 공간을 보았다. 공간 속의 유일한 붉은 생명인 그를 조망했다.
낯선 조명은 피날레에도 있었다. 저 멀리 뒤편의 무너진 성벽 너머로부터 앞을 향해 쏘아지던 밝은 조명. 피날레가 이렇게까지 밝은 적이 또 있었을지. 희뿌옇게 쏟아지는 하얗고 노랗고 은은하게 초록빛깔인 조명 덕에 아스라한 느낌마저 들었다. 구원을 찾아 죽음으로 처절히 속죄해야 하는 타이밍이건만 오늘의 조명대로라면 승천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밝은 건 좋았는데, 뿌옇고 한없이 아스라한 느낌 탓에 피날레보다는 미카의 해피엔딩에 더 어울릴 성싶었다.
노래적으로는 기념비적인 피날레였다.
거의 긁지 않아 온전한 노래의 피날레였다. 단 한 문장ㅡ나의 절망 속에! 널 가둘 수 없어!ㅡ만을 터트리듯 긁어냈을 뿐 ‘차가운 암흑 속에’마저 평탄했다. 절규의 피날레에 비하면 연약할 정도로 지쳐 있었을 만큼. 아스라한 조명 아래에서 그의 인영이 당장에라도 희미하게 깜빡깜빡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친 기색 역력한 몸으로 힘겹게 그녀를 관으로 끌고 갔는데, 정작 마지막의 눈빛은 형형했다.
견디는 눈빛이었다. 제 손으로 꽂아 넣은 칼을 견디고, 다가오는 죽음을 견디며 눈을 감지 않으려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담으려는 눈빛 속에 형형한 의지는 관이 닫힐 때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덧.
At Last, 오늘도 그댈 ‘향한’ 우리 얘기. 바뀐 걸까?
Life After Life의 귀여운 순간. 뽁 솟아오른 뒷머리칼 한 가닥이 연신 팔랑팔랑.
Train Sequence, 누구도 ‘저주’ 못 하리의 꺾기는 오지 않았다. 대신 강세만 살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