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연이었다.
일등공신은 음향. 사람의 소리도, 오케스트라도 일단 컸다. 한계까지ㅡ그러니까 딱 째지기 직전까지 키운 소리였다. 그러면서도 1.5대 1의 밸런스를 내내 탄탄하게 유지했다. Life After Life에서는 감탄스러울 정도라 나도 모르게 웃었다. 기뻐서.
오늘따라 이제 시작일 ‘뿐!’에서 느낌표를 찍은 노래가 높은 성처럼 강성했다. 음향은 노래의 강성함을 조금도 깎지 않고 전달해주었다. 노래가 무대 위에서만 머무를 뿐 객석까지 전달되지 못할 때의 안타까움을 너무 잘 알기에 기뻤다.
유난히 매글 관객이 많은 날이라 염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하지만 일단 음향이 청중을 흡입하니 열연을 지켜보는 객석의 몰입도가 상당했다. She에서, 러빙유에서의 그의 열연에 감탄사가 터져 나온 것도 배우의 소리가 최대한 있는 그대로 전달되었기에 가능했다.
음향팀, 내내 이렇게만 힘내주세요. 황홀한 청각의 경험, 가능한 한 많이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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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는 완연하게 은적발이 된 백작님. The Longer I Live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색상이기도 하다. 앞머리도 차림새도 언뜻 보면 마냥 붉기만 한 그인데 자세히 보면 은은하게 빛바랜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겉으로는 청년인 그에게서 자꾸만 노백작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과 나란한 시각적 효과. 머리칼마저 연기하는 그를 만날 수 있는 한정 타이밍, 은적발의 시대.
‘내 사랑의 선택’은 오랜만에 부드러운 가성이었다. 진성으로 터트려내어 성량으로 압도하는 대신 부드러우면서도 희미한 목소리로 살짝만 끌어올린 노래가 짱짱한 음향을 타고 마음속까지 아스라이 침투해왔다. 한계까지 키운 오늘의 음향 컨디션 하에서 대단히 알맞은 선택이이었던지라 못내 감탄했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난히 아스라했던 마지막의 네 걸음.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관으로 향하던 딱 네 걸음. 터덜, 터덜, 터-덜, 터덜. 여타의 소리는 모두 소거되고 오직 그의 걸음 소리만이 저벅하던 공간의 고요함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윗비. “매력적인 곳이라 들었는데,” 까지만 운을 떼고 잠깐 뜸을 들이며 그가 미나를 보았다. 잠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갸웃하는가 싶더니 이내 씩 웃었다.
“..과연 그런 것 같군요.”
제법 천연스러웠다.
기차역, 미나의 타박에는 정말 이상하다는 듯 상체를 모로 돌리더니 글쎄 입을 댓발 내밀지 뭔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다 들리도록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밉지 않게 항의하는 투라 정말 귀여웠다.
십자가를 찌른 후에는 처음으로 제단에서 지체했다. 늘 슬라이딩하듯 약간의 지체도 없이 몸을 곧장 바닥으로 무너뜨리곤 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기진맥진한 상체를 뒤로 잠시 넘긴 채 숨을 골랐어. 내려가는 길이 천릿길 낭떠러지라도 되는 듯 몸이 무겁고 눈앞이 암담해 보였다.
그리고 Loving You Keeps Me Alive. ‘채~워 줄’ 나의 사랑~! 박자를 쪼개어 밀고 당기는데 귀가 쫑긋.
Solitary Man부터 느꼈던, 오늘의 공연에 감도는 완성형의 기운에 삼연곡이 쐐기를 박았다. 박수에 놀란 웅성거림이 섞여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림자 대화에서 조정은 미나는 원래도 셋 중 가장 센 편인데, 오늘은 더했다. 버럭 반 눈물 반의 호통으로 내내 그를 힐난했다. 자연히 호흡을 맞추는 그도 강해졌다. 난 ‘예전처럼!’ 우리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 ‘미-나!’ 두 포인트를 모두 강하게 토해낸 건 오랜만.
It’s Over에서 재차 부르는 ‘미-나!’는 이 톤으로 정착하려는 듯하다. 강하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는 눈으로 책망하며.
퇴장도 늦었다. 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면서 한참을 지체했다. 두 눈으로 목도한 배신을(그의 입장에서는) 차마 가누지 못하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처럼, 아주 뒤늦게서야 걸음을 뗐다.
그렇게 배신감에 몸서리를 쳤으면서, Train Sequence에서는 또 웃는다. 목소리를 느끼자 고개를 두리번대고, 확신하자 웃어. Before ‘미-나!’ After ‘미-나!’일 정도로 그의 순정이 돋보이게 되었어.
그리고 오늘의 Finale에 박수를.
디테일의 하나하나는 두 사람이 공연 중단 전에 보여주었던 연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칼을 거부하고, 거부하는 그녀를 끌어당기고, 뺨을 쓸어주는 세세한 동작들 자체는 같았다. 다른 건 개개의 연기가 피날레라는 거대한 흐름에 하나하나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녹아있었다는 점이다.
‘나의 절망’이라며 관을 가리키는 손짓이 얼마나 격하고 또 분명하게 컸는지 모른다. 지켜보는 모두가 그의 손끝에 있는 관을 보았을 것이다. 절망이 곧 관을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된 오늘의 모든 관객이 그와 함께 숨을 들이켰겠지. 무대 위에 서는 배우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능력, 의도한 바를 정확히 전달함으로써 관객의 심장에 명중시키고, 그렇게 반드시 필요한 연기로 만드는 것. 오늘의 피날레가 내내 그랬다.
공연 중단 전의 두 사람이 때로는 격하게 토해내고, 때로는 서럽게 울어버렸던 격랑의 연기들이 그 뼈대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필연의 조화를 엮어가고 있었다.
숙련된 연기자 두 사람이 정제하는 조화로움에 필연성을 더하니 비로소 관록의 ‘경지’였다. 이 경지는 이대로 막공까지 새롭게 꽃을 피우겠지.
이 페어의 피날레는 완전히 궤도에 올랐다. 그것을 확인한 밤이었다.
덧. 2막 중후반부터 왜 그렇게 무대 뒤편에서 말소리가 들렸을까?
어제의 it's over 다시 듣는데 다시 들어도 어린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