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의 시작은 〈서곡〉
빨간 자켓을 입은 뒷모습으로 그가 등장할 줄 그 누가 알았겠나. 놀람도 잠시. 천천히 걸어서 멀어지는 등이 단박에 Vol.1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시아준수가 뮤지컬의 기억을 콘서트로 불러온 적은 많아도, 뮤지컬이 그의 콘서트를 되살려온 듯한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10년을 돌고 돌아와 우리는 또 ‘처음’에 선 것일까.
돌아온 이 여름에 우리는 첫 시작의 겨울을 둘이나 품고 있는 것이구나.
시츠프로브의 난으로 굳세게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미처 몰랐다. 그가 뒷모습으로 쏘아올린 기억들은, 처음으로 되돌아간 듯 영혼을 바쳐 사랑할 각오를 하라는 의미였다는 걸.
하나 〈나는 나는 음악〉. 아마데에게 영감을 꺼내어 통, 통 건네주는 손짓. 노래하는 내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샘솟는 영감, 그의 천재성.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도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끌어내는 그 손이 좋았다.
맛있게 받아적는 데만 여념 없는 아마데의 몰인간적 면모도 이 넘버에서는 그를 상처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답답하다는 듯 아마데의 깃펜을 빼앗아 직접 써넣기 시작했을 때는 전율이 일었다. 빠르게 적어내려가며 그는 웃고 있었다. 더없이 즐거운 얼굴이 날아갈 듯 자유로웠다.
아직 어려 상처 나지 않은 자유롭고 순수한 음악 그 자체였다. 제목 그대로 ‘나는 나는 음악’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둘 〈나는 쉬카네더〉. 잘츠부르크 겨울에서의 잔망은 없어졌지만 쉬카네더와 즉흥적으로 합동 연주를 하는 그가 새로이 왔다. 아무 대사 없이 건반 치는데 열심인 그를 보는 중에 가만히 어느 순간엔가 타격이 왔다. 건반 치는 자태가 사랑, 까딱까딱 토독토독 음을 두드리는 발과 박자를 타는 손이 사랑. 중간중간 아가씨들에게로 눈 돌아가는 얼굴은 얼마나 귀여운지, 부어주는 술을 마시겠다며 일어나 등 뒤로 건반 치는 잔망은 또 어땠는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차용해온 듯한 잔망 어드메였다. 내게 남은 시간을 모두 써서 이 계절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 번복은 없을 다짐을 그렇게 덧칠해가는 중에 이어서 온 꽃받침, 캉캉춤, 나 홀로 스텝밟기 3연타. 꼭 나의 다짐을 향해 웃어주는 것 같았다. 마침 이 대목에서 애드립의 향기도 느꼈지. 똥 묻은 돼지 꼬리의 인톡시는 갔지만, 꽃받침의 후속 기다려본다.
셋 〈황금별〉의 눈동자. 10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반짝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오늘 보았다. 황금별에서, 황금보다 귀한 그의 눈동자 안에서. 10년의 세월은 어디로 갔을까. 이 사람의 빛은 왜 소진되지 않은 걸까. 어떻게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렁그렁해져서는 세상 무엇보다 촉촉하게 웃는 듯 우는 듯 사랑스러울 수 있나.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당신의 황금별을 나까지 염원하게 하나. 노래 한마디 없이 눈빛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넷 〈내 운명 피하고 싶어〉. 이건 따로 쓸 거양. 그래야만 해.
다섯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빈으로 온 레오폴트)〉.
생각보다도 훨씬 많이 가사가 바뀌었다. 초연 버전 위에 이토록 성공적으로 덮어쓰기 해낸 시아준수가 ㅡ그것도 드라큘라 공연을 올리는 중이었으면서!ㅡ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질 만큼.
그러나 여기, 빈에서 레오폴트와 재회하는 장면부터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까지는 거의 그대로였다. 그래서였다. 거의 그대로인 장면 덕에 마치 기억을 더듬어서 보는 것만 같았다. 삼연 중에 유일하게. 그리고 그건, 여전히 10년 전 샤차르트의 기억에 웃음 짓고 눈물짓는 관객에게는 결정타였다.
“사랑하는 아버지 보세요. 날 향한 갈채와 환호 소리. 모두 날 사랑하고 있어요. 행복해요.”
“널 누가 만들었는지 감사한 마음 잊지 마라.”
“뭘 잘못했나요.”
“니 곡은 너무 복잡해.”
레오폴트의 가사가 다소 바뀐 건 기억과 조금도 충돌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고칠 수 없어.”
“집시와 다를 게 없어.”
“자유롭게.”
중요한 건 그의 가사였다.
“아버지 모두 오해에요.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그가 내 기억 속에서와 완벽하게 똑같이 절규해내는 순간에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는 아마데의 재능상자를 빼앗아 아버지 앞에 내밀며 절박했지.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절박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계절을 내 안에 박제할 것이다. 이건 시아준수의 모차르트를 눈앞에 둔 관객의 사명 같은 것이다.
여섯 〈혼란〉으로의 흐름.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로 1차, 구걸편지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2차, 슈테판 대성당으로 쐐기. 초재연과 달리(초재연 때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직후에, 구걸편지 직전에 왔다) 세 단계를 분명하게 밟고 오는 〈혼란〉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으나, 각오만으로는 부족했다. 눈앞에서 이 사람의 생명력이 한 꺼풀씩 갈취 되어 소진되는 장면이 차례로 펼쳐지고 있었다. 조금의 쉴 틈도 없이 몰아세워진 영혼이 붕괴하는 건 당연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주체 못 할 탈력감에 진이 빠지는데, 그 삶의 장본인은 어떻겠나.
초재연의 〈혼란〉이 세 단계의 서사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느낌이었다면ㅡ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천재는 원래 예민’하다는 레오폴트의 말처럼 모차르트의 타고난 기질이 발현된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에는 전혀. 저 세 단계를 한 번에 밟는다면 누군들 멀쩡할까.
몰리고 몰려 벼랑 끝에서 웅크리는 그를 보는 나조차도 소리치고 싶었다. 모두에게 제발 그만, 모두 악한 늑대 뱀들, 모두 악마들.
일곱 〈모차르트! 모차르트!〉
결국 시작된 레퀴엠의 작곡. 늘 그랬던 것처럼 영감을 끌어내는 손짓이 한 번, 두 번. 또 세 번, 네 번. 끝모르고 샘솟는 영감은 여전하였으나 〈나는 나는 음악〉에서처럼 날아갈 듯 자유롭던 손이 아니었다. 무겁고 절박한 손짓은 술기운에 자꾸만 덜덜 떨렸다. 그의 음악은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그때와 꼭 같이 영감을 주다 못해 아마데에게서 깃펜을 빼앗아 들었지만, 펜을 놀리는 그의 얼굴에 행복은 없었다. 그 달라진 모습이 마음 아팠다. 그때처럼 그의 곁에 머무르는 재능ㅡ아마데의 표정 없는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서 더. (심지어 아마데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 땀과 눈물 범벅인 그와는 정반대로. ㅠ)
여덟 “황금별을 찾아 헤매다 그 빛에 타버려”
아니 “왕자는 왕이 되었다네. 황금별도 주웠다네” 였잖아요. 아버지도, 어린 시절도, 사랑도 모두 다 잃었지만 그래도 “황금별은 주웠다”고 해줬잖아. 그런데 왜 이번에는 타버렸다고 하는 건데… 음악 하나만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곁에 남아주었던 초재연이었건만. 이번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는다. 가족도, 사랑도, 음악도.
심지어 삼연의 그는 음악으로 살았던 걸 어느 때보다 후회하는 것만 같았다.
사실은 음악 이상으로 가족의 사랑을 갈구해왔음이 ‘왕자는 왕이 되었음에도 무얼 얻었나’ 되묻는 가사에서 느껴졌다.
삶의 마지막에서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의 눈물.
빛나는 음악천재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상처를 있는 그대로 낱낱이 드러내 보인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여운 아이. 그의 청중만이라도 그를 조건 없이 사랑해야만 했다.
이 계절을 다 바쳐 그래야만 한다.
그럴 것이다.
김준수는 움직이는 이 무대를 통해 넘버를 부르며 다양한 감정을 드러낸다. '모차르트!' 속에서 김준수의 의상은 1막에서 2번('서곡'에서는 김준수가 아닌 스윙이다), 2막에서는 3번 바뀐다. 1막에서는 재킷의 색이 변할 뿐 2막에서는 재킷의 색과 블라우스 그리고 청바지와 신발이 바뀐다.
사랑하는 시아준수 보세요. 모두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