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하얀 옷을 곱게 차려입고 등장하는 피날레였단 말이지. 내내 고집했던 빨간 코트를 두고. 깨끗한 흰옷을 보며 모든 속박을 벗어버리고 마침내 자유로워진 그의 영혼을 만나는 느낌에 위로받곤 했다.

그런데 삼연의 첫공에서는 그가 임종 시 차림새 그대로 등장하지 뭔가. 낡고 고된 이승의 행색 그대로, 여전히 지친 걸음걸이로. 측은한 몰골을 보는 순간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죽음은 안식을 주지 못했나?

죽음 이후의 평온을 어째서 얼굴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 거지?

볼프강.. 천국에 가지 못한 거야?..

 

그를 추도하는 목소리도 그림자에만 머물러 있어 텅 빈 곳이 황량했다. 마치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던 모차르트의 장례식처럼. 

 

추모의 소리는 드높으나 형체가 없어 오히려 기괴하기까지 한 공간. 비척비척 걸어 나온 그의 눈앞에서 그 옛날의 부자가 재회했다. 

달려가는 아들, 웃으며 안아주는 아버지. 성장한 그에게는 여간하여서는 웃어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환한 미소로 어린 아들을 품어주었다. 애틋한 그림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엔딩일 수 있었다.

그러나 포옹하는 부자 너머 그가 질끈 감듯이 한 눈으로 끝끝내 저들과 함께 웃어 보이지 않았을 때 이 모든 게 거짓임을 알았다.

이건 천국에서의 재회 같은 게 아니구나.

레퀴엠의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나는 내 자신 모든 걸 다 바쳤네 또 주었네 내 어린 시절 그리고 나의 누나 내 아버지 나의 사랑, 그리고...” 죽음에 임박하여 그가 아마데를 품는 순간 스쳐 간 허상일 뿐이구나.

 

〈도리안 그레이〉의 마지막 순간에 도리안이 제가 바랐던 장면을 꿈꾸며 불러왔던 것처럼.

그때와 꼭 같은 눈물과 회한의 환영이 시간과 장소와 얼굴을 달리하여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커튼콜의 황금별은 쐐기였다. 극 중의 모차르트가 말했지. “신이 내게 주신 모두를 위한 음악,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다”고. 황금별만큼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노래도 없을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그의 음악. 바로 그 음악을 모두가 함께 부르며 웃고 있었다. 그가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고 지켜낸 가치가 합창 되고 있는 것이었다. 

모차르트 본인의 궁극적인 바람이자 동시에 도리안이 그토록 바랐던 도리안 그레이의 〈레퀴엠〉이기도 한 합창의 황금별.

 

황금별은 허상일까 진실일까.

 

도리안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환영이었겠으나 모차르트라면, 모차르트만큼은 후자이기를 두 사람 몫의 눈물로 바랐다. 

모차르트는 곧 시아준수니까.

어떤 존재보다도 시아준수 본인인 모차르트만큼은 구원의 엔딩을 얻는 게 옳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