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의 피눈물인지. 열창에 몸 사리지 않기에 엉망이 될수록 아름다운 얼굴을 공들여 눈에 담았다. 두 뺨을 붉게 물들이는 피땀 눈물. 눈 감으면 따라 그릴 수 있도록 꼼꼼히 새기며 절로 떠올린 건 역시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노래하는’ 사람이 곧 시아준수라는 것.
시아준수의 청중으로서, 음원으로는 절대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눈앞에서 실재하는 열정에 관통당하며 깨달았다. 흐르는 전율이 시간을 일깨워주었다. 정말로 9개월만인 것이다. 무대 위에는 시아준수가 있고 나는 그의 청중으로 있는 이 순간이.
오랜 동면 끝에 비로소 시아준수의 노래하는 계절이 다시 시작되었다.
*
이제는 너무나 잘 아는 극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익히 아는데도 ‘첫 만남’에 어김없이 전율하게 되는 넘버. Fresh Blood. 그의 동작을 먼저 눈으로도 그릴 수 있고, 목소리로 주는 변주 역시 능히 가늠할 수 있음에도 손끝이 저릿해지고 만다.
어떤 디테일이 가감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시아준수의 첫공에서는 항상 부차적인 것이 된다. 무대 위의 저 사람이 어떻게 공간을 장악하였고, 어떻게 관객 모두를 일시적 마비 상태에 빠트렸는가 하는 감각만이 남는다.
영원에 가까운 5분,
그 안에서 살고 싶다.
끝내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이가 바로 무대 위의 시아준수다.
어쩌면 Fresh Blood 만큼이나 고대했을 장면. 윗비베이의 왕자님. 드라큘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회춘하여 새빨간 머리에 새빨간 코트를 잘 차려입고 나타난 햇살 아래의 청년. 반짝이는 이 빨강이야말로 모두의 첫사랑이 아닐지.
더불어 좋아하는 건 그가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일시에 바뀌는 공연장 안의 공기.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고 누군가는 숨을 참는 듯한 찰나의 동요는 숨겨지는 법이 없다. 이번에도 여지는 없었다. 그는 등장만으로 모두의 숨을 틀어막았다.
어느덧 4연이라는 성을 공고히 쌓아낸 시아준수의 드라큘라란, 그런 것이다.
“지금의 전 더 늙고, 더 외롭고, 더 못돼졌죠.”
초연에서는 그저 공허하기만 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을 때가 있었는데. 사연의 왼블에서 처음 재회한 백작님의 얼굴에선 아주 분명한 표정을 보았다. 쓸쓸하고, 괴로우며, 자괴감에 움츠러든 듯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대단히 인간적으로도 보였던 표정 가득한 얼굴이 신기했다.
“미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진실된 러브스토리를 들려드릴게요.”
원래대로라면 ‘지금, 여기서요?’ 라며 미나가 되물어야 할 타이밍이건만 대답이 없이 묵묵한 박지연 미나. 이대로 이렇다 할 대답 없이 넘버로 진입하는 건가 싶은 찰나에.
“좋아요.”
처음 들어보는 허락의 육성이었다.
순간 울컥했다. 400년간 간직해온 이야기를 순순히 들어주겠노라 다른 누구 아닌 그녀가 대답해준 순간 내 안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 얼마나 전지적 드라큘라의 시점인가. 어이가 없으려면서도 좋았다. 극 안의 그가 그녀에게 이해받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여실히 전해졌기에. 박지연 미나가 선택한 대사일지, 극이 바뀐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계속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어지는 시간을 되감는 영상과 함께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가는 그.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은 아름다운 얼룩들을 노래하는 시아준수의 She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삼연곡의 대미. 준또러의 Loving You Keeps Me Alive.
서사로 쌓은 감정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지. 이 넘버를 극 안에서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누누이 들어왔던 ‘준또러’의 하나이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았던 첫 소절.
먹먹하고 아득하며 애처로운, 바스라져가는 벼랑 끝의 세레나데.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이 감격 속의 절정은 역시 바닥 쾅의 순간이었겠지.
“그대를 처음 본 순간” 과 함께 바닥을 탕! 치며 일어나는 그, 러빙유에서는 처음 보는 격정.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솟구쳐 일어난 그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Mina’s Seduction. 첫공과 막공의 완성도가 하나와 같이 일관된 시아준수이지만, 드물게 첫공 티를 낼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이 넘버에서였다. 커튼의 출구를 찾지 못한 시아준수. 두어 번 휘휘 젓다가 결국은 두 손 투입, 그러고도 조금 더 헤맸다. 멋있는 데 귀엽기까지.
Finale는 Fresh Blood와 일맥상통했다. 프레시 블러드가 그러했듯, 정석의 본연에 충실하도록 깔끔했다.
원음의 피날레의 차가운 암흑 속에, 삼연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변주들은 잠시 넣어두고 basic is the best를 실천해 보이는 듯하였던 Fresh Blood의 가로횡단.
공연 전체가 ‘처음’에 걸맞은 완전한 정석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연만의 변화구 또한 있었으니, 러빙유에서 바닥을 쾅 박차며 일어서던 격정. It's Over “앞으로 나의 삶은!”의 새로운 느낌표.
같은 듯 다르게. 그렇게 시아준수의 네 번째 드라큘라의 막이 올랐다.
시아준수의 달라진 부분
1. 조금 더 분명한 뉘앙스를 갖게 된 대사. 불현듯 깨달은 사람처럼 잠시간의 공백을 두었던 “…내려가서 약혼녀를 맞이하시는 게 어떨지.”
2. 마찬가지로 미나에게 환영의 손키스를 할 때도 거의 둘만의 세계다. 조나단이 “백작님?” 음성으로 두드려 깨울 때까지 미나의 손에 입술을 묻은 채로 요지부동이었던 노백작님.
3. 그림자 대화는 짧아졌다. “두 번 다시 날 볼 수 없을 거야”가 생략.
4. 기차역의 시작은 “농.. 농담입니다. ..밤새 고민한건데..”
극이 달라진 부분
1. 뱀파이어 슬레이브들의 지하 속 관이 돌아왔다. 샤롯데씨어터에서는 극장 구조상 관 속에서의 등장이 아니라 아쉬웠는데, 드라큘라이기에 가능한 연출이 복귀되어 반가웠다.
2. It’s Over. 드라큘라가 손끝으로 성경을 밀어낼 때의 조명이 분명해졌다. 원래는 찰나의 깜빡임처럼 지나가곤 했던 새빨간 조명의 시간이 길어져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외에도 포인트 조명들이 더 형형색색으로 변화했다.
3. The Longer I Live부터 스모그가 굉장해졌다. 관으로 내려오는 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Finale 역시 보랏빛 연기에 싸인 두 사람의 어스름한 형체만 느껴질 때가 순간이나마 있었을 만큼 연기가 자욱했다.
4. Finale의 액자 속 그림이! 배우별로 달라진 듯하다. 오늘의 드라큘라는 시아준수였으므로, 그림 속의 얼굴도 시아준수였는데 글쎄 붉은 머리의 그였다. 붉은 머리에서 그림의 최종 제작 시기가 엘리자벳사 사후임을 더욱 분명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부터 붉은 머리로 그린 것이든, 기존의 그림을 엘리자벳사 사후에 머리카락만 붉은 색으로 덧칠한 것이든.)
문제는 표정이었는데.. 꾹 다문 입술 끝이 조금은 내려가 있고, 어딘가 감정이 뭉쳐있는 듯한 하관이 꼭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 XIA, 김준수, 시아준수, 2021 뮤지컬 드라큘라, 드큘, 샤큘, 첫공, 공연 관람 후기
아니 그런데 러빙유. 가슴을 쥐어뜯던 손가락 그대로 주먹을 쥐니 그 손이 너무나도 자그맣지 뭐람. 눈에 띄게 작은 주먹이 새삼스러워, 주먹이 풀릴 때까지 내내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