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공연이었다. 흥미진진하게 새로웠고 놀랍도록 슬펐다. 매번 알을 깨듯이 새로운 이 극이 신선한 재미의 정점을 찍었다 여겨질 만큼. 공연장을 나오는 길이 얼마나 짜릿했는지. 아니, 임혜영 미나의 샤우팅 오열 속에서 극이 내리는 순간에 이미 머리끝까지 차오른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즐겁도록 좋은 공연이었다. 모두 김준수 드라큘라와 임혜영 미나의 덕이다.
우선 눈에 선명하게 박힌 웃는 얼굴 셋부터.
Lucy & Dracula 1. 단호하게 돌아선 미나의 등 뒤에서 아주 천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았다. 밤의 그늘 속에서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긴 선을 그리며 웃었다. “좋아, 그렇게 해주지.” 매끈하게 웃는 얼굴이 아주 섬뜩하게 아름다웠다.
Life After Life. 저세상 런웨이의 도입부ㅡ즉 루시를 떨구어낸 그가 런웨이에 올라선 직후. 몸을 틀고 고개를 바로 세우는 찰나였다. 영원히, 영원히-가 막 궤도를 찾아 올라가는 그 시점에서 찰나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싸느랗게 웃음 머금었던 얼굴이 지워지는 순간엔 곧바로 고개를 탁! 반동으로 젖혀지는 붉은 머리카락까지. 유려하게 이어지는 동작들이 아름다웠다. 정말로.
Mina’s Seduction에서는 흡혈의 순간. 미나만을 바라보는 눈동자 아래로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 가슴을 그으며 사르르 웃는 얼굴, 어떻게 홀리지 않겠나. 깜빡임도 없는 까만 눈동자와 새빨갛게 끌어올린 입꼬리. 미나의 선택을 백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뤄야한들 어떻게 이 얼굴을 외면하겠나.
다시 즐거운 공연의 첫머리로 돌아와, 노백작님의 시간에서는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문장을 다시 들었다.
“모두 죽었죠. 오래 산다는 것의 대가가 그런 겁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어미였다. ‘-겠죠’가 두 번 반복되는 편보다 문장이 완만하게 흐르는 느낌을 주어 좋아했는데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종종 들려주셨으면.
Fresh Blood. 노백작님, 6월 15일에는 강하게 챱! 소리가 나도록 손뼉 치듯이 두 손을 맞잡으셨지. 몹시도 차진 소리가 인상 깊어 혹 또 들을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오늘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두 손을 그러모아 비비시는 게 아닌가. ‘살그머니’란 소리가 절로 붙을 정도의 부드러운 동작에 웃음이 났다. 흉포한 맹수가 곧 잡아먹을 예정인 먹잇감이 혹여라도 놀랄까 봐 소리마저 지워버린 것처럼 보여서.
윗비의 왕자님. 신사다운데,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자신만만함에서 느껴졌다. 스스로의 반짝반짝함을 너무 잘 알고 있어. 난 멋있어, 난 젊어, 난 잘생겼어. 난! 반짝반짝해! 오늘따라 자신감 풀충전한 애티튜드에서 오랜만에 되찾은 젊은 혈기의 치기까지 느껴졌다. 정말 귀여웠어.
Lucy & Dracula 1. 일전에 한 번은 ‘내 혈관의 모든 피’에서 솟구치는 고양감을 느꼈는데 오늘은 그보다도 빨랐다.
“난 당신을 잘 압니다. 당신 또한 날 잘 알죠.”
바로 여기. 딴딴하게 뭉친 열기가 언뜻 초조함까지 내비치며 미나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문장 전체가 달떠서 옅은 흥분을 숨기지 못한 느낌이 미나의 유혹 초반부 소절들ㅡ미나를 설득하는(꼬드기는) 음성과도 닮아 있었다.
기차역. 과연 야망의 애드립 페어. 애드립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시도할 줄이야.
“여자를 웃게 하는 방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어쩐지 임혜영 미나의 받아치는 대사가 오늘따라 평범하다 싶었더니,
“처음부터 다시 해봐도 될까요?”
능청스레 시치미를 떼려는 그를 향하여 준비해둔 한 방이 있었던 것이다.
“시~작.”
아이를 어르는 듯 놀리는 듯 물결치는 그녀의 어조에 일순간 서 있던 모습 그대로 그가 JPG가 되었다. 하지만 깔아준 멍석을 마다하는 법은 없는 사람. 이내 두 팔 벌려 재장전을 시도하기를,
“제가 저쪽에서 오는 기차를 모조리 다..”
말쑥한 얼굴로 문장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태연자약한 자태에 웃음이 만발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웃음들은 살아있는 진짜였다. 애드립에 진심인 두 사람, 아주 뿌듯하셨겠어요.
Loving You Keeps Me Alive. “날 사랑한, 내가 사랑한 그이를 찾았는데..” 미나의 시선을 따라 조나단을 발견한 그에게서 단 마디의 설운 숨이 터져 나왔다. 흑. 안 그래도 웅크린 등이 작은데, 실의에 빠진 채로 고개 숙이는 그가 너무나 조그마했다. 프레시 블러드에서 그 거대하게 새빨갛던 사람이, 윗비에서 자신만만하여 아름다웠던 그가 한없이 작은 동그라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Life After Life. 오늘따라 긁히는 소리가 대사에서도 가사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1막 마무리 Life After Life에 이르러서는 아예 그 소리 자체를 노래에 녹여낸 시아준수. 문장의 첫음절마다 긁어내는 파열음을 실어 강세를 두었는데, 긁힌 소리가 장식음처럼 활용되어 노래에 새로운 활기마저 주었다. 실연의 실의를 파괴욕으로 승화해내고 있음이 소리적으로 완연했다. 몹시도 드라큘라적이었습니다.
It’s Over. 오늘 유난히 새롭고 재미있었던 요주의 넘버.
아니 세상에, 성경책으로 기습당해 넘어질 때.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보통은 한 팔로 먼저 바닥을 짚고 나서 상체를 무너뜨리곤 하였는데(→정확히는 팔과 골반이 먼저 땅에 닿고, 상체가 무너지곤 하였는데) 오늘은 팔과 등이 거의 동시에 땅에 닿았다. 불시의 공격을 당해 그야말로 몸이 뒤로 날아가 버린 셈. 아니, 스스로 제 몸을 날려버린 것.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어서 ‘절-대! 날 이길 수 없어’의 완고한 강세와 마지막 후렴의 런웨이 대치에서 ‘으하하하’ 선명하게 긁어내는 웃음소리까지. 정신없이 몰아치는 신선함에 숨이 다 가빴다.
Train Sequence에서도 ‘운명을 따라 내~게 와’ (→정확히는 내애~게 와)의 물결치는 밀당이 새로웠던 것과 함께 임혜영 미나의 새로운 디테일이 타격을 주었다. 최면을 시도하려는 반헬싱에게 저항하듯 고개를 도리도리하는 게 아닌가. 손준호 반헬싱은 애당초 미나들의 의향을 묻지 않고 최면을 밀어붙이는 편인데, 그 상황에서 거부를 피력하는 미나의 도리질까지 더해지니 보는 입장에서는 왈칵 억울해졌다. 대신 말해주고 싶었다. 미나가 당신의 최면을 거부합니다. 드라큘라와 미나를 갈라놓기 위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상황이 야속했다.
이어지는 촛불송에서 곧바로 2차의 타격. 임혜영 미나는 다른 미나들과는 달리 항상 삼각형의 꼭짓점에서 벗어나 있다. 이미 드라큘라에게로 완연히 기울어버린 마음을 대형에서 이탈한 것으로도 확연하게 전달하는 모습이 최면을 거부하는 디테일 위에 쌓이며 두 배의 타격을 주었다.
대망의 Finale. 왼블이었으므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 너머로 초상화가 곧바르게 담기는 시야였다. 앞서 충분히 얼얼해진 심장에 그야말로 곱절의 타격. 서로 끌어안은 애틋함이 눈앞의 두 사람이나 그림 속 잔재나 매한가지로 슬퍼서 마음이 일렁일렁하던 차에.
“날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이니까.”
달라진 어미가 오늘 최후의 타격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배우에게는 엄청난 영향으로 다가온다고 그가 말했었지.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고작 어미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하늘이 전방위로 내려앉는 느낌에 내던져지는 것이 관객이다. 그리고 오늘의 시아준수,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바꿔서 내민 어미 하나에 미나도 관객도 헤어나올 길 없는 눈물의 바다로 투신하게 될 것임을 예측하고 이를 악물어 문장을 맺었다.
그러니 달리 도리가 있나.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 그가 마련해둔 눈물 속으로 스스로를 놓아버릴 수밖에.
굳건하게 깔린 본디의 바탕 위에 사금 알갱이처럼 흩뿌려진 변주들이 아름다우리만치 신선한 서사를 이룩한 하루였다. 그래서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이 소감이야말로 4연까지 거듭 올라온 극에게 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믿는다.
6월 19일, 정말로 재미있는 공연을 보았다.
2021 뮤지컬 드라큘라 사연 김준수 회차 공연 관람 후기
일시: 2021년 6월 19일 (토) 오후 2시
키워드: 김준수, 시아준수, XIA, 샤큘, 드큘
오.. 제목이 두 줄이 되었어. 한 줄로 압축할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