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8월 28일의 뮤지컬 엑스칼리버

주의: ‘개인적인’ 감상이며 참회문이자 사랑을 토로하는 글이라는 걸 먼저 말씀드립니다.

 

 

뮤지컬의 계절에 샅샅이 사랑을 하기 위하여는 우선 극의 줄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극을 사랑할 수 없다면, 지엽적인 디테일과 얼굴에만 의지하여야 하는데 그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배우가 그를 서포트해줄 수 있는 좋은 극을 만나 날개 다는 모습을 염원하지 않는 이는 없지 않나. 

 

초연의 엑스칼리버는 그런, 말하자면 좋은 극이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재연의 엑스칼리버가 과연 그런 극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김준수를 사랑하여 엑스칼리버라는 극 또한 사랑했던 것이기에 모든 당위와 개연성에서 아더가 배제되어버린 재연의 엑스칼리버가 못내 야속했다. 여타의 캐릭터에 새롭게 부여된 서사가 어째서 아더만은 비껴갔는가. 애초에 극에서 서사를 주지 않았는데, 극 안의 인물이 무엇을 할 수 있나. 극을 재창조하지 않는 이상 그게 가능한가. 

 

그런데 김준수에게는 가능했다. 

극 안의 인물이 극을 깨뜨리고 재조립하여 아더의 이야기로 귀결시키는 여정.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막 이후로 내내 찾아왔던 극의 줄기를, 그럼에도 매번 장벽에 가로막힌 양 실패했던 서사 찾기를 김준수라는 배우가 내 안에 성공적으로 각인시켜낸 8월 28일의 이야기다. 

 

 

#01

 

펜드라곤 일가 특유의 용의 불길에 관한 서사가 모두 사라진 재연에서는 아더 넘버의 가사들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눈에는 눈의 ‘용을 놓아줘’도 그렇지만,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의 ‘내 안에 불타고 있는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에서도 번번이 갸웃하고 만다. 유순하기 그지없는 1막의 아더를 보고 어느 누가 ‘분노’라느니, ‘악마’ 같은 걸 떠올릴 수 있을까? 화르르 욱하는 성정을 보여주었던 “미안해, 케이”도 용의 불길을 다스리는 힘겨운 훈련도 사라진 지금 대체 어디에서 아더의 핏속에 흐르는 분노를 유추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계속 갸웃하는 내가 답답했던 게 틀림없다. 앞서가던 시아준수가 자꾸만 뒤처지는 나를 흘긋 돌아보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난 나의 것을 귀에 때려 박아 주었다. 

 

화를 내면서. 

달려드는 걸음걸이로 씹어뱉듯 반말을 연발하면서. 

이미 성이 나 있는 스타카토가 갑자기 왈칵 뒤집어지며 칼날을 세울 때는 숨조차 참게 되었다.

 

사라진 것들에 집착하느라 남아있는 잔재로 시아준수가 꾸려내는 개연성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초연에서는 1막 전체를 할애하여 극이 설명해주었던 아더의 안에 내재된 분노와 불같은 성정, 아버지의 손을 타야만 겨우 진정할 수 있는 까다로운 불길이 재연에서는 이 노래 하나에 전부 있었다. 비록 넘버 하나로 압축되었으나 존재감만은 강렬하게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그가 노래로 말하고 연기로 들려주었다. 극이 모조리 생략해버린 것을 배우가 사력을 다해 되살려낸 수준으로.

 

난 나의 것의 역할을 재정립하자 첫 의문이 풀렸다. 이 넘버가 사라진 용의 불길을 메꾸는 열쇠였고, 그리함으로써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을 향하여 극을 이끄는 초석이 되었다. 

 

‘내 안에 불타고 있는 분노’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흐름이 기뻤다. 바위산에 다 오른 그를 보는 심장이 뛰었다. 시아준수의 인도로 극을 따라가고 있는 감각에 벅차오르는데, 그런 나의 고양감을 다 안다는 것처럼 그가 3회차 만에 ‘맞서기↗︎ 위해’를 끌어올리는 게 아닌가. 여기까지 잘 따라왔으니 당근을 하나 주겠노라며 제 관객을 기특해하는 것만 같은 그가 나를 웃으면서 울게 했다. 치솟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02

 

혼자서 가 직후 두 인물의 등장에 상반된 아더의 반응: 기네비어는 날 세워 쳐내면서 모르가나는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아더의 온도 차는 재연의 혼자서 가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눈에는 눈에서 분노하는 방법조차도 누나의 손을 타는 아더가, 여전히 그녀의 영향 하에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니까.

 

비로소 설명된다. 수틀리니 엑스칼리버를 다시 집어 들고 등 뒤에서 공격하는 저열함을 1막의 아더에게서 보게 되리라 생각이나 했던가. 사생아라는 폭언을 듣고도 누나의 사연에 먼저 귀 기울일 것을 선택하였던 아더의 성품을 이미 보았건만.

이토록 용렬한 기습이 가능해진 건 결국 불길에 물이 든 탓이다. 누나의 손을 탄 분노가 그의 시야를 전부 가려버렸으니까. 그러니 엑스칼리버를 같잖은 쇠붙이로 치부해버리는 랜슬럿의 도발에 홀랑 넘어가는 것이다. 네가 무시한 이 쇳덩어리의 진가를 보여주겠노라, 치기 부리는 전개가 일견 타당하기까지 하다.

 

 

또한 그러하니 누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1막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추억이 가득한 언덕에 이제는 혼자 덩그러니 남아, 유순하고 둥그런 음성이 입에 가장 익숙한 이름을 찾는다. 아버지. (누나는 마침 멀린의 성소에서 바쁜 탓에 그를 신경 쓰지 못하는 중이다.)

오늘의 심장의 침묵은 흡사 비명이었다. 몸부림이었고, 극복에의 노력이었으나. 

초연과는 달리 아래로 침잠하며 맺는 어미에서는 깊은 절망마저 느껴졌다. 자기확신 없는 영혼의 외로움이 깊다. 고통이 생생했다. 그렇게 목놓아 노래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아버지 없이 홀로서는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 모습이 가여운 와중에 기어이 눈물 나게 했던 것. 제 갈피는 제대로 잡지도 못하면서, 전쟁 준비는 꼬박꼬박 착실하게 진행 중인 아더의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 모르가나 케어에 정신없는 멀린과, 경치 좋은 곳에서 서로 의지하는 랜슬럿과 기네비어와는 다르게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자리에 묵묵히 서 있다. 다가오는 적들의 소리를 들으며, 이 땅의 운명을 짊어질 자로 선택된 이의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해내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다.

굳은 얼굴의 비장함과 합창을 뚫고 나오는 견고한 목소리, 그리고 성호 긋는 정결함의 삼위일체에 마음이 터져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03

 

이윽고 이게 바로 끝

위기는 시작하자마자 온다. 정체불명의 마법진으로부터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나며 그가 미간을 좁혔다. 멀린의 것이 사람을 어떻게 멋대로 다루는지를 이미 겪어보았고, 손 데어본 적도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위험을 직감한 뒷걸음질에서 누이를 향한 의구심이 처음으로 묻어났다. 정에 무른 그가 그제야 처음으로 누이를 비틀어 보는 계기가 된다. 미약한 의문이 미세하게 금이 간 그의 미간에서 보였다. 

 

“날 배신했고 신을 모독했어!”

하늘을 가리키는 검지를 따라 빗발치며 올라선 시선이 날카로웠다. 치켜뜬 눈동자에 분노가 형형했다. 

끝모르고 넘실대는 불길. 더 이상의 나락은 없으리라 여겼건만 또 한 번 그를 시험대 위에 올리는 ‘이게 바로 끝.’ 누이의 인도로 첫걸음을 뗀 벼랑 끝의 분노는, 노래를 따라 덧입혀지는 그 자신의 배신감과 절망으로 새파랗게 치솟는다. 

그러나 불길이 모든 것을 연소시키기에 앞서 돌연 그가 말한다. 하늘을 향하여 치솟은 검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너희 둘을 카멜롯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그의 복수는 추방에서 그쳤다. 불길이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전에 그가 궤도에서 이탈한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화마로부터 그가 스스로 걸어 나왔다. 

처음이다. 

아버지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분노를 다스려낸 것.

 

걸어 나온 그의 눈에 이제 보인다. 시야를 가린 장막이 감추고 있었던 것들. 배신을 단죄하였던 칼날이 방향을 틀었다. 그의 검 끝에서 누이가 뒷걸음쳤다. 

제 스스로를 다스려냈음에 대견해할 틈은 없었다. 혈육의 음모는 사랑의 배신만큼이나 그를 짓누른다. 참담하게 꺼진 얼굴에서는 더는 표현할 고통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것ㅡ사랑, 우정, 혈연 전부가 형체 없이 부서져버렸음을 이제는 안다. 그가 알던 세상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다 무너졌다.

모든 분노가 파쇄되고, 비로소 진실을 마주하는 눈으로 그가 상실을 인정했다.

“이게 바로 끝.” 

 

 

#04

 

사방이 온통 폐허다. 누이가 만들고 제가 저 스스로를 버려두었던 진창에서 걸어 나오니, 바깥에 남은 것 하나 없다. 사랑도, 친구도, 혈육도, 진짜 핏줄보다 귀했던 아버지도. 

그리고,

“멀린! 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 자 역시. 

아버지와의 유대가 강조된 만큼 2막에서 조명되는 아더와 멀린의 접점은 눈에는 눈뿐이다. 생뚱맞다 여겨진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내내 죽은 아버지에게만 매달리던 아더가 갑자기 멀린을 찾는다는 게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모르가나 마법진의 원형이 멀린인 것을. 또한 멀린이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다. 햇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엑스칼리버라는 운명을 몰고 온 존재.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버린 자. 자연한 부름이고 당연한 질책이었다. 

 

선지자에게 그가 묻는다.

“이것도 내 운명이었나!”

이야기의 발단에서 그가 자문했던 바가 되돌아왔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참담한 그 미래도 다 내 운명인가요.

실패 앞에 그가 몸을 웅크린다. 다 잃은 등이 참담하게 굽는다.

“난 실패한 거야..”

그러나 당면한 것들의 무게 앞에서는 좌절할 시간도 사치였다.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병사들 곁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운명은 숨 가쁘게 그를 몰아세웠다. 모든 역경을 그의 것으로 안배해두었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은 용서도, 전쟁도 전부 그의 몫이어야만 했다. 그 누구도 그의 자리에 대신 서주지 않는다. 제 운명을 몰고 온 인도자도, 제 분노를 부추겼던 누이도, 저를 목숨처럼 사랑해주었던 아버지도. 

그는 결국 홀로 서야 한다. 검 하나만을 쥐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사명을 향하여.

 

‘평범한 사람도 해낼 수 있을까요?’

그 언젠가, 당차고 용감한 소녀에게 건넸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조차도 이제는 스스로 구해야 한다.

더 이상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빛이 지워진 곳에서 결국 혼자된 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왕이 된다는 건 뭘까.

 

 

#05

 

<왕이 된다는 것>이 가장 거대한 주제가 되는 이 극은 필연히 이 넘버를 향하여 흘러야 한다. 그리고 오늘, 8월 28일의 공연은 왕이 된다는 것을 향하여 그야말로 투신하는 듯했다. 김준수의 아더가 오늘 들려준 이 모든 이야기에 탄복한다.

 

그의 걸음 하나하나가 내 눈물을 자아내는 서사였다. 

그의 연기와 노래가 관객의 심장을 두드리는 열쇠였다. 

 

여한 없이 개운해하는 커튼콜의 그가 얼마나 두 눈을 따갑게 했는지. 내 눈 안의 눈물, 내 마음의 기쁨인 그를 향하여 이 차오르는 감정을 귀에 인이 박이도록 전해주고 싶었다.

오빠, 당신이 해냈어. 

이 극의 줄기를 엮어 이야기를 정립해냈어.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엑스칼리버를 들어 올리며 이제는 맑게 웃는 저 사람이 언뜻 불가사의했다. 아더의 눈물을 걷어내고 웃는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경탄스러웠다. 잘 안다고 여겼던 사람의 너무도 거대한 모습을 본다는 것. 김준수라는 사람이 아직도 다 겪지 못한 미지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무대 위의 김준수에게 실로 한계란 없는 게 아닐까?

감격적인 의문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하나만은 명확했다. 

무대 위의 김준수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결괏값일 뿐이라는 것. 

 

기어이 이 모든 줄기를 엮어낸 김준수에게 찬사를, 또한 사랑을 전한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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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11.11

막공 후에 다시 읽는 8월 28일의 기억은 참 행복한 눈물이 되는군요. 벌써부터 그립고 애틋하여 눈물짓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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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11.11

오빠, 저는 여전히 이날이 어떤 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내일이 없는' 김준수라서 가능했던 기적이요. 

엑칼

21.11.28

후기 감사합니다~! 덕분에 엑스칼리버라는 극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