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지워진 어둠 속 〈왕이 된다는 것〉을 시작하는 얼굴은 언제나 형언할 수 없다. 빛을 좇고 있는지 아니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눈빛이 짙기에. 

서서히 그림자가 걷혀가는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자신의 시선 앞으로. 텅 빈 정면을 향해. 빛과 어둠 사이를 가르듯 내밀어진 팔의 정박지를 선뜻 가늠할 수 없었다. 지나온 고통의 과거인지 알 수 없어 두려운 미래인지. 아니면 그 전부인지.

“왕이 된다는 건 뭘까. 나를 깨운 불빛이 꺼졌다면..”

자문하는 노래에서 유추할 뿐이었다. 

한 번 가봤던 길이 전부 막혔노라 서글퍼하면서도 다시 걸음을 떼는 그에게서는 과거도 미래도 전부 겸허히 받아들이는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노래는 담담하게 이어졌다. 8월 말, 9월 초일에 선연하게도 일렁대던 감정들이 꽤 갈무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 세상과 맞설 위대한 왕을 다 기대해”에서도. 오랜만에 들었다. 이 문장이 섧게 흐려지지 않는 소리를. 단단한 노래였다. 얼굴도, 소리도 강고했다. 재연 들어 처음 듣는 것만 같은 단단한 노래에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간의 그는 외길을 걸어 나오며 결의를 굳혀갔지. 왕이 된다는 것의 노정은 재차 굳세우는 의지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허락된 최후의 망설임이기도 했다. 양자는 끝까지 양립하다 마지막 소절과 함께 승패가 갈리곤 했던 것이 근래의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늘의 그에게서는 망설임을 진즉 압도하는 결연함이 있었다. 왕이 된다는 것의 첫걸음을 떼기 전에 이미 모든 각오를 마친 사람처럼 그가 외길을 걸어 나왔다. 

망설임은 뒤로 한 채,

“땅이 흔들리고 전부 갈라져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구태여 한 바퀴 빙 돌아 사위를 아우르기까지 하며

“앞-으-로-”

향하는 기세에는

외길의 끝에 닿기도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친 이가 있었다. 

운명에 맞서서 단 한 명의 왕으로 선 그가. 

 

*

 

오늘의 잃어버린 말들. 러브게임 특수의 “오리온! 페가sus!” 발음에 유의할 것. 극의 배경에 알맞게 발음 부수어 굴린 시아준수가 너무 귀여워서 시작부에 이미 기절을 하였어요.

  

그가 화를 낼수록 좋은 넘버, 〈난 나의 것〉. “당신의 그 욕망도!” 에서 매섭게 들끓는 음성이 몹시도 짜릿했다. 기세를 몰아 다시 검을 쥐고 위력을 부리는 성질머리 역시. 그가 화를 낼수록 내 앞에 펼쳐질 이 길로의 개연성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과 진배없으니. 매끄러운 당위 앞에서 전개에 대한 기대감이 치솟는 건 물론 전율이 미리부터 서둘러 온다. 감탄 반 행복 반의 시아준수가 만드는 개연성. 난 나의 것을 귀에 때려 박아주는 천재만재 김준수. 

 

〈원의 완성〉. 왜 여깄어의 표정을 사랑하는 사람, 이 넘버의 얼굴도 사랑하게 되었다. 자기확신 없어 소용돌이치는 의심 속에서, 멀린이 보여주는 환영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용기 내볼 것을 설득당하고 마는 선한 의지가 이 넘버의 얼굴 안에 다 있다. 다채롭게도 고저를 찍는 표정 변화에 나 또한 설득을 당한다.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그나저나 마이크가 헐거웠는지. 손으로 마이크선을 건드리는 모습이 두어 번 포착되었다. 무대 앞에 털썩 앉아 고개 푹 숙여 번뇌할 때에, 머리를 감싸 쥐는 척하며 슬쩍 선을 매만지는 손을 보았다. 아주 드물게만 보는 모습. 연기에 곁들여져 나오는 무대 위의 시아준수인 찰나를 목격하면 왠히괜지 기분이 좋다. 바수니라서겠지요.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난 나의 것에서의 분노, 원의 완성에서의 번민이 이 넘버의 초입을 완성한다. 특히 후자의 변화무쌍한 표정은 결국 이 곡 속의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차곡차곡 긴밀하게 쌓아온 아더의 번민이 “모든 의심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로 고스란히 치환되며 앞뒤의 전개가 완벽하게 맞물리는 것이다. 빈틈없이 들어맞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곧 새로 태어난다. 

“새롭게 다시 시작해, 믿음을 갖고 버텨.”

의심에서 믿음으로 반등하는 전개가 얼마나 촘촘하던지. 그의 노래와 표정에서 극이 피어나고 있었다. 재연의 곳곳이 그렇지만,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은 실로 운명을 헤쳐나가는 아더와 극을 엮어가는 시아준수를 함께 만나는 진정한 카타르시스의 넘버인 것이다. 

바위산에 다 올라, 지척에 놓인 ‘이’ 엑스칼리버 앞에 맹세하는 그를 보면서는 결국 매번 하는 생각을 또 하고 말았다. 아, 천재를 사랑하는 삶은 이렇게 행복하다고.

 

참. 엑스칼리버를 뽑고 난 직후 바위산 위에서의 두 차례 인사를 매우 좋아하는데 두 번째 인사가 오랜만에 첫공 버전으로 회귀했다. 그간 주먹 쥐어 팟팅! 하던 동작에서 주먹으로 가볍고도 무겁게 가슴을 툭 치는 인사로. 파이팅은 아더의 하늘을 나는 기쁨이 보다 느껴져서 좋고, 오늘의 인사는 파이팅보다 단정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점이 좋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낚시통의 김턴은 오지 않았지만 어깨 맞은 랜슬럿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얼굴은 왔다. 정말 귀여워. 

오늘따라 예뻤던 동작은 둘. 하나는 기네비어가 내미는 손을 맞잡을 때. 상체도 팔도 크게 크게 써서 마치 기네비어에게로 다이빙하듯 기꺼이 손을 맞잡는 동작이 정말이지 새파랬다. 다이빙 곡선이 예뻤던 건 물론이고 청청함 가득한 기운이 싱그러울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슉!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는 시늉 후에 검을 회수할 때. 파도 타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목이 참 근사했던 것.

 

“솔직히 인상이 막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강태을 랜슬럿과는 이제 두 번째 공연인데도 케미가 남다르군요. 여기에서 랜슬럿과 티키타카를 주고받은 건 처음이에요. “안 그래?” 무려 동의를 구하는 아더에게 “그럼!” 무려 맞장구를 쳐주던 랜슬럿. 신선하고도 흐뭇했다. 

 

〈왜 여깄어?〉 아더의 도입부. 이렇게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어쩌면 좋나. 섣부른 접근이 될 것을 염려하며 다가서는 배려가, 폭언에도 불구하고 누이를 감싸는 선한 의지가 반짝반짝하다. 샤아더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대답하리. 왜 여깄어를 들으세요. 이 넘버의 선하고도 올곧은 얼굴을 보세요.

 

〈심장의 침묵〉. 눈 감고도 아들을 살피러 오는 엑터를 마음으로부터 이해했다. 저 울먹이는 아이를 어찌 혼자 두나. 눈동자 안이 가득 차도록 그렁그렁해서는,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울먹임. 둥그렇게 말린 어깨가 가여웠다. 눈에 밟혀 갈 수가 없었겠지. 아더의 환상이 아니라 엑터가 정말로 아들 걱정에 이승에 발목 잡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오늘의 그가 가여웠다.

노래적으로는 오늘의 부음악감독이 원미솔 음악감독과 차이가 가장 현저한 넘버였던 만큼 시종일관 달라진 오케스트라에 귀 기울이는 섬세하고도 예민한 시아준수를 만났다. 무대 위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시아준수는 바라보는 마음을 벅차게 하지요. 

 

〈이게 바로 끝〉. 칼을 움켜쥐고 두 사람에게로 달려드는 그의 모습이 1막 엔딩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에서의 모습과 겹쳐졌다. 엇비슷한 분노, 기세등등한 돌진. 그러나 그때와는 다르게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를 제어해낸 그. 1막 엔딩과 같은 파멸의 기로에서 그는 스스로 걸어 나왔다. 그리함으로써 왕이 된다는 것으로의 길목을 열었다.

전부를 다 잃고도 그 비통함에 완전히 침몰하지 않은 자만이 건넬 수 있는 질문,

왕이 된다는 건 뭘까ㅡ그 자격이 비로소 주어진 얼굴을 보았다.

 

아, 시아준수의 개연성 만세. 그의 연기와 노래를 따라 촘촘하게 맞물리는 극을 보는 경이란. 시아준수의 인도를 따라가는 가슴 벅찬 감각.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이렇게나 재미있다. 

 

 

덧. 1막의 대관식. 아더와 함께 나란히 주인공이 되어야 할 엑스칼리버가 한 꺼풀 벗겨져 있었다. 2막에서는 보수되어 왔으나 그새 많이 낡은 신의 검. 엑스칼리버야, 너도 힘을 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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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9.05

아, 결싸움 후 이날에는 비스듬하게 꽂힌 검의 모습마저 그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