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아, 달아! 공연 10회차 만에 처음으로 다시쓰기된 말 이름들. 찬란한 햇살 아버지의 소절인 ‘별과 달이 우릴 비춰주는 밤’과 매끄럽게 이어져서 앞으로도 마땅한 이름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 보험으로 두면 좋겠다 싶었다. 시아준수 싱크빅 팟팅!
〈언제일까〉에서 좋아하는 찰나의 귀여움. 다 잘될 거야, 발라당 누웠다가 훌쩍 몸을 일으키면서 바지 탁탁! 하는 일련의 동작에서 마무리가 오늘 조금 늦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타이밍상 탁탁! 털어낼 여유까지는 없었던 모양이야. 골반 위에 두 손만 야무지게 챱 얹고 서 있던 찰나의 몽몽함이 정말 귀여웠어요.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시아준수, 놀랍도록 연공에 강한 사람. 연이은 공연으로 ‘소진된다’는 게 그에게는 없는 듯하다. 오히려 어제의 공연으로 소릿길이 완전히 열려 짱짱해진 목소리가 제동 불가한 물결처럼 넘쳐흘렀다. 결 풍부한 음성이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는 감각, 내가 그 공간의 일부가 되어 그의 소리를 받아내는 짜릿함. 소리에 몸을 적신다는 게 이런 것일 거예요.
〈검이 한 사람을〉 검을 뽑고, 인사까지 마친 후에. 엑스칼리버를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감탄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검을 직각으로 세워 올렸다(원탁 앞에 맹세할 때처럼). 천천히 눈높이까지 올라온 검날. 제게 허락된 신의 검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짐짓 엄숙하게 반짝였다. 얼마간의 결의와 벅차오른 고양감으로 가득한 동공이었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오랜만에 돌아온 낚시통의 김턴♡
이어서 늘 그랬듯 낚시통으로 랜슬럿을 기습하는 시늉을 하는데.. 오늘따라 주의가 온통 기네비어에게 쏠린 나머지 낚시통을 수거해가는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했다. 더 사고 치기 전에 낚시통을 회수해가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눈 마주치면 구김살 하나 없이 방긋 웃는 아들(아버지의 이런 케어에 익숙한 것은 덤.) 이 부자의 찰나를 매우 좋아하는데, 오늘은 제 손에서 무엇이 빠져나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기네비어만 보고 있지 뭐야. 그래.. 정말 대단한 여자 같긴 하더라.
새롭게 단장된 애드립 구간, “매우 매우 스페셜한 게 분명하죠!”
8월 21일, 그가 매우 매우 딱 두 번만 강조했음에도 그날의 이지훈 랜슬럿이 매우 매우 매우 세 번으로 엇나갔던 기억 때문에 이 대목에서 배우들의 호흡에 꽤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는데, 오늘 몹시 흐뭇하게도. 강태을 랜슬럿과 이종문 엑터가 그의 애드립을 그대로 받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배우들이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 관객으로서는 매우 매우 스페셜하게 기쁜 일.
나무 뒤편. 그의 앞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다른 랜슬럿들과는 다르게 강태을 랜슬럿은 나무로의 접근 자체가 느린 편이다. 덕분에 진작 자리를 잡은 아더가 손 팔랑이며 형을 부르는 모습을 본다. 오늘도 랜슬럿이 영 늦으니 슬쩍 몸을 틀어서는, 형아 빨리 와. 손바닥 접어가며 팔랑팔랑. 샤강의 형제 케미 볼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리고 몹시 충격적이었던 강태을 랜슬럿의 한 마디. 다친 아더에게 멀린을 불러올게, “괜찮을 거야.” 좀만 참아.
시아준수와의 첫공인 9월 1일에도, 4일에도 하지 않았던 대사.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랜슬럿의 한 마디는 곧장 전후 평원의 대화와 겹쳐졌다.
아더가 랜슬럿을 부여잡고 매번 울먹이며 건네는 말. “괜찮을 거야.”
이번엔 아니라는 랜슬럿의 대답으로 미루어 보아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주문처럼 ‘괜찮을 거다’라는 대화가 오가곤 했으리라는 것이 짐작 가능하지만, 짐작만 하던 관계성이 눈앞에 드러난 건 처음이다. 직접 보게 된 효과는 절대 작지 않았다. 아무리 아더의 분노에 관한 설명을 대사로 읊어준다 한들 “미안해 케이”를 한 번 직접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처럼.
“괜찮을 거야”가 반복되며 더욱더 단단해진 아더와 랜슬럿의 서사. 탁월한 개연성의 부여였다.
〈이렇게 우리 만난 건〉 기네비어가 좀처럼 고개 들지 못하자,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상체를 확 숙이고 두 손 활짝 펼쳐 보이며 “정말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나를 봐달라는 뜻이 분명한 동작에 마음이 짜르르.
감히 말하지만 〈왜 여깄어?〉 의 날. 왕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은 알겠으나, 단호한 손바닥으로 멀린의 접근을 저지하는 얼굴이 우선순위를 분명히 했다. 억울한 과거를 보듬는 것이 순서이며, 사람이 먼저라고. 그리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다고.
난 ‘여-’깄어의 곧게 뻗어가는 음성이 선하지 않다면 세상에 선하다 이름 붙일 수 있는 건 없으리라.
〈결코 질 수 없는 싸움〉 어제 조명이 심하게 칼 같았지. 시아준수가 칼을 꽂고 고개를 들자마자 어두워졌다. 흡사 빵야를 삼키는 드라큘라 커튼콜 조명처럼. 다행히 피드백되었다.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는 조명 속에서 끝까지 날을 세운 그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심장의 침묵〉 “내가 알던 세상 끝났어”의 도약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약간의 버럭까지 곁들여서.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리는 오케스트라에 제동을 걸듯 버럭하던 강세에 박수를.
〈이게 바로 끝〉 아더의 분노 사이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그의 어깨 너머를 슬쩍 보았다. 아니, 세상에. 이 장면에서 ‘랜슬럿’이 아더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초재연 통틀어 처음 보았다. 초연 랜슬럿들의 미안함과는 거리가 먼 표정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들은 수치심 내지는 모멸감에 몸서리치거나 망연하여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뻔뻔함에 내가 상처를 받아 어느 순간부터 랜슬럿 쪽으로는 아예 시선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강태을 랜슬럿.. 아더의 분노가 날카롭게 벼려진 종유석처럼 쏟아져 내리는 한가운데서, 악에 받친 듯 노래하는 아더를 염려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의 분노를 다독여주기는커녕, 그 원인이 되었다니.. 미안함을 넘어 괴로운 얼굴이었다. 와..아.. 이런 랜슬럿은 처음 봅니다.
기분이 묘해졌다. 어쨌거나 불륜은 저질러졌고, 관계가 파탄 난 것도 맞으나. 그 끝장난 상황에서도 체면치레보다는 아더를 먼저 걱정하는 랜슬럿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퇴로 없는 비명처럼 다가왔던 아더의 이게 바로 끝에, 사실은 아더는 모르는 아군이 남아있다는 걸 귀띔 당한 기분이었다. 아더, 너에게는 아버지 말고도 너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형이 있구나. 네가 알던 세상이 전부 사라져버린 건 아니었어. 내가 그에게 전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해주고 싶었다. 앞으로 확신의 샤강을 다짐한 건 물론.
눈물을 걷어낸 〈왕이 된다는 것〉을 여전히 반쯤은 낯설고도 반쯤은 신기하게 바라본다. 내 안에서 극이 정립되었던 8월 28일에 그가 거진 통곡을 하였었기에, 그날의 모습이 재연의 디폴트로 각인되어버린 탓이다. 울지 않는 모습이 변주처럼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그리고 실제로도 왕이 된다는 것의 시즌 2인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역시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였는데, 평시와 다르게 갑자기 터진 부분이 있었다. 다 걸어 나와 막바지 소절에 이르러서.
진실 앞에 서서 물러서지 않으며 운명에 맞서는 ‘왕의 길을!’ 난 가리라.
북받쳐 증폭된 음성에는 울컥한 서러움과 오기,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 모든 것들이 마구잡이로 엉켜 있었다.
한편 왕이 된다는 것의 한 바퀴 턴이 완연한 정착기에 도달했다ㅡ고 적어도 될 것 같다. 처음 도입되었던 8월 27일에는 ‘한 바퀴 턴’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에는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 버텨 보인다기보다는 차라리 사위가 빈 공허함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것 같았다. 바람 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듯한 위태로움이 있었다.
9월 들어서다. 발끝에 힘이 실리고, 신체의 무게중심이 점차로 내려가면서부터 비로소 가사 그대로 ‘땅이 흔들리고 전부 갈라지는’ 공간이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한 바퀴 턴이 가사와 완전하게 맞아떨어지자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도 균열이 전파되었다. 전율이 일었다. 다듬어진 동작의 알맞음도 큰 몫을 하였지만 끊임없는 연구로 아더를 덧칠해오는 그의 성실함이 기여한 바가 더 크다.
일찍이 완성되었던 그의 아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진행형이다.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후기 아끼고 아껴서 읽었어요 소중한 후기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