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깨의 갑옷으로도 연기를 하던 시아준수
출정하는 뒷모습이었다. 오른 어깨의 견갑이 떨어져 달랑달랑했다. 뒤집힌 채로 매듭 하나에만 의지해 간신히 붙어있는 그것이.. 오늘의 과몰입 요인이었다. 움직임이 불편하겠다는 염려는 아주 잠깐이었다. 전장의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맹렬했고, 흔들림 없이 단단한 얼굴 아래에서 뒤집어진 어깨 또한 꿋꿋했다. 잠시간 퇴장하는 차에 수습하려나 싶었으나 그도 아니었으니. 결국 긴 혈투 내내 뒤집힌 채로 어깨에 매달려 있는 그것이 주는 감회 앞에서 마음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나붓댔다.
어깨에 자꾸만 ‘그’가 투영되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어깨이자, 오른팔의 기사를 잃은 군주의 등이기도 하던 그 모습을 보며 어떻게 의연하겠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형 앞에서도, 멀어져가는 사랑 뒤에 남아서도 정돈되지 못한 차림새 그대로 그가 있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
다 헤집어진 차림새를 하고 그가 검을 쥐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간에 늘 하던 것. 분연하게 검을 내려긋던 결기가 오간 데 없었다. 분명 결연히 내려긋던 검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다잡고 지난 역사를 떨쳐내곤 하던 그였는데.. 마땅히 있어왔던 것의 빈 자리는 컸다. 오만 생각이 뒤섞이며 심장을 두드려댔다. 그럴 힘도 없었나. 늘 하던 동작을 상기해낼 여유조차 없었던 건가. 지나간 모든 것들의 무게가 검을 떨쳐내지 못할 정도로 무겁나. 그렇게나 지쳤나… 생각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만 갈래로 뻗어만 갔다.
그뿐인가. 검의 바위에 다 오른 그가 끈 떨어진 어깨의 팔로 검을 들어 올리는데, 들려야 할 것이 들리지 않았다. 얼굴 없는 소리들과 한데 섞이며 한 뜻 한 맘 한 길 한 꿈 그 자체가 되어왔던 목소리. 지난 역사를 매듭짓던 ‘기억해 이 밤’이 없었다.
대신,
꼭 초연처럼.
눈부시게 쏟아지는 하얀 빛 아래에서 오직 검 하나를 떨쳐 올리는 것만으로 모든 이야기를 대신하는 그가 있었다.
있어야 할 것들의 빈 자리가 주는 울컥함을 어떻게 수습하여야 하나.
불시에 되살아난 초연의 기억 앞에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
모든 역사를 떨쳐내는 그를 보았음에도 남겨진 기분이 되었다. 하얀 빛 속에서 지워지던 얼굴이 아직도 먹먹하다.
도대체 어떻게 잠들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밤이다.
이하는 간략하게
오늘의 말들은 잎새야, 푸름아. 잎새의 발음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진혜림의 발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예쁘다고 했나요?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다. 온갖 잎새를 들어봤지만, 오빠가 부르는 잎새가 가장 좋아요. 세상 어떤 잎새도 이렇게 풋풋하게 푸르를 순 없는 것이다.
“그러엄 대단했지!” 채근하는 동생에게 뒤늦게나마 “대단했어~” 해주던 형. 원래 맞장구쳐주었던가? 갸웃한데, 아무튼간에 몹시 흐뭇했다. 이때 대단하단 말 들은 샤아더 얼굴에 뿌듯함이 백만 송이로 만발해서 더욱 흐뭇.
성당 공터. 오늘도 엎드린 김에 팔굽혀펴기 2번. 이어서 뭐냐는 형의 핀잔에 허공에 대고 팔굽혀 펴는 시늉을 하며 종알종알. 이때의 표정, 입술의 부리부리함이나 피력하는 눈매나 모두 참 시아준수 본인스럽다. 심장이 반응하고 말아.
〈기억해 이 밤〉 오늘도 검을 잡지 않은 팔이 높이 올라온다 싶더니, 정말 드물게도 가슴 높이까지 닿았다가 옆으로 부드럽게 비켜났다. 이어서 아예 작정한 듯이 손목 돌려 검의 궤적으로 반원 그리기. 역시 아름답다. 드높은 기품으로 빚은 우아한 포고. 동작의 크기와 분명함이 9월 9일에 보고 사랑에 빠진 그때와 똑 같았다. 아니, 후자는 더 분명했던 것 같기도. 이쯤 되면 고정에의 희망을 품어도 되는 걸까?
〈오래전 먼 곳에서〉 유난히 공들여 수놓은 도입부. 혼신을 다한 음절에서 그의 전심이 들렸다. 그래요. 갑분결혼식이면 어때요. 이 목소리로 청하는데.
〈혼자서 가〉의 순발력에는 박수를. 랜슬럿과 대치하다 힘의 균형이 어긋나며 앞으로 풀썩 미끄러지던 차에, 한 손으로 원탁을 짚어 상체를 지탱해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잠시간 이게 원래 이런 거였던가? 싶을 정도로 동작 자체에 위화감이나 배우 본인의 동요가 전무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칼싸움이 실제 상황이라 해도 믿겠다 싶었던 오늘의 넘버.
“이 무거운 슬픔.” 25일에는 기네비어의 귓가에서 맴돌던 손이 오늘은 랜슬럿의 등 바로 뒤에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 내려.”
그녀를 움켜쥐지 못해 부수어지는 공기를 갈퀴 잡았던 손이 오늘은 형의 등에 닿지 못한 채 오므라들었다. 동작의 위치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노래의 무게중심이 다른 날보다 형제의 비극으로 옮겨온 느낌이 여실했다.
그렇지 않아도 샤강이 되면 형제가 조명되는 넘버다. (개인적으로) 기네비어의 배신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다른 날과는 달리 샤강의 〈이게 바로 끝〉에는 쓰라린 형제애가 있다. 자연히 아더의 상실이 곱절이 된다. 실로 형제도, 아내도 잃고 만 셈이다.
형 뒤에서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머무르는 오늘의 그 역시 그 사실을 절감하는 것만 같았다.
두 배의 상실. 무너지는 꿈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왕이 된다는 것〉
노래를 따라 복받친 걸까? “그런 게 왕이 되는 길”의 소리가 유례없이 증폭되었다. 깊은 바다 밑바닥에 닿은 듯한 울림이었다. 울지는 않는데, 울지만 않는다뿐이지 소리의 표피까지 모조리 떨고 있었다. 울지 않는 울음이란 게 이런 걸까.
노래 중간에 숨 먹는 소리조차도(너의 발밑에 / 땅이 흔들리고) 심장을 덜컹하게 했다.
울지 않는데 울 때보다도 무겁다. 감정은 짙고 걸음 하나하나가 버겁다. 사방이 늪이라 퇴로조차 없는 벼랑 끝의 슬픔.
눈물 한 방울 없이도 울음을 그리는 9월 마지막 날의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