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볼프강에서 시작하여 시아준수로 끝나는

 

오늘의 말들은 “볼프강, 토-드!” 볼프강이라니. 시아준수가 볼프강을 이 극으로 끌어오다니. 금쪽상담소 이후로 아주 약간의 자극만 더해지면 언제라도 흘러넘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바수니에게 이건.. 그냥 과몰입하라는 신의 계시 같은 것이었다. 볼프강과 아더가 한 극에서 이름이 겹쳐졌다는 사실만으로 눈물짓게 되는 요즘을 어쩌면 좋나요. 

(마침 홍경수 엑터였던 오늘, 아버지도 볼프강을 찾지 못했다 말씀하시면 어쩌지 싶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리안이 오면 어쩌지? 도리안이 올까?)

 

〈찬란한 햇살〉의 토끼춤에서 가장 귀여웠던 건 무릎 굽혀 온 힘으로 깡총깡총대던 다리. 케이에게서 받아와 랜슬럿 앞으로 가서는 더 흥이 올라 아예 쩜프를 하다시피 깡총총. 형도 그런 아더가 귀여웠던 거지요. 배치기 전 앵콜 무대로 재차 간택되었을 만하다. 

 

스산해진 분위기에 “왜 그래 다들?” 이 문장이 도치된 건 오늘로 두 번째. 늘 듣던 문장이 아주 사소한 변화로 새로워질 때, 더불어 그 새로움을 위해 여전히 무대 아래에서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는 그를 느낄 때ㅡ가 어제 보고 오늘 보는 즐거움이 아닐지. 

홍경수 엑터는 이종문 엑터보다 확실히 무게감이 있는 아버지다. 멀린을 경계하여 아버지를 뒤로 미는 아들에게 괜찮다, 두 손으로 약하게 워-워- 하며 얼러준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 반신반의하지만 일단 마음을 가라앉혀보는 아들, 우리 착한 아들 아더.

 

〈난 나의 것〉의 마지막 구간. 내-몸과 피는 온전히 ‘내-애’ 것. 평소보다 살짝 음을 밀어 내린 ‘내-애’를 듣는 순간, 이 미는 음을 다시 듣고 싶어 할 나를 느꼈다. 아더 안의 고집스러운 불길에 소리를 입힌다면 필시 이럴 것이다. 분노에 찬 완강함이 가득 녹아있던 소리. 너무 좋았어요.

 

검의 바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엑터 부자. 다만 감동한 아들이 아버지를 와락 끌어안는 동작이 너무 거셌다. 내내 앞뒤로 팔랑대던 검이 부자의 포옹을 버티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산 위로 올라온 손준호 멀린이 평소처럼 검을 가리키는 듯하다가 아예 검에 손을 대고 진정시켜줬어야 할 만큼. 소소하게 웃음 났던 오늘의 장면.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오늘따라 걸음이 느렸다. 바위산에 오르는 걸음을 재촉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처럼. 산 위에 다 올라서도 검으로 바로 다가서지 않고 한참을 문턱에 멈추어 서서 노래했다. 그 덕에 참으로 오랜만에 초연을 되살려왔다. 멀찍이 선 그 모습 그대로, “ 엑스칼리버 앞에 나 맹세하리.”

 

그리고 또 한 소절. “새롭게 다시 시작해, 믿음-을! 갖고 견뎌.” 주먹 꼭 쥐며 믿음-에 숨결 섞어 긁어내리는 음성 가득하였던 결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앞으로 나아가 볼 것을 정한 소년의 투지를 들었다.

 

〈검이 한 사람을〉 오, 강태을 랜슬럿에게서 오늘 새롭게 인상 깊었던 것.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따르겠어요?” 아더가 멀린에게 묻는 동안 옆에서 친구들을 결집하여 주먹 불끈 쥐고, ‘아더에게 우리를 보여주자’ 다짐 나누지 뭔가. 랜슬럿 공통의 연기인지, 강태을 씨의 디테일인지 다른 랜슬럿들도 한 번 보아야겠어요. 

→ 에녹 랜슬럿은 별다른 동작 없이 아더와 멀린의 대화를 지켜만 보고(10/8), 이지훈 랜슬럿은 친구들과 모종의 사인(윙크)를 주고 받는군요. (10/9)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에서는 홍경수 아버지의 위트. 매우 매우 어메이징하고 ‘사랑스러운’ 주인에게 돌려드립니다. 피를 나눈 아버지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사랑 주는 아버지 슬하의 아더를 보는 기쁨이 피어올랐던 순간. 

 

성당 공터. 기네비어에게 들킬세라 앞으로 철퍼덕, 요즘 계속 무릎으로 바닥을 박는다. 워낙에 동작이 큼직큼직하고 몸 사리지 않는 그라, 실제로도 아팠을 법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박은 무릎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랜슬럿에게 종알종알. 아프다 종알종알.

 

“아니, 평화를 얘기하면서 왜 싸우는 법만 가르치는데요”에서는 잠시 스쳐 간 시아준수와의 기억. 자신을 사랑하여 기꺼이 싸움을 감수하는 팬들에게 부디 사랑만 하라던 시아준수가 심장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금쪽상담소 이후로 자꾸만 공연 중간중간 아더 너머의 ‘시아준수’가 찾아온다.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이 현상을 멈출 길이 있을까.

 

색슨족의 습격. 엑스칼리버가 아닌 다른 검으로 싸우면서부터는 힘겨루기에서 애먹으며 찡그려지는 미간에 늘 감탄한다. 이 섬세한 디테일을 첫공에는 몰랐었다.

첫공 때는 다른 칼을 들면 오히려 더 날래고 가벼워지는 동작만이 보였다. 저렇게 민첩하게 잘 싸우는데, 결국 아스가르를 처치한 것도 그인데, 도대체 왜 ‘엑스칼리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건지 아리송했다.

그러나 공연을 거듭하며 그가 안배해놓은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엑스칼리버였다면 검을 맞대고 힘 겨룰 필요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엑스칼리버가 아닌 일반의 검이기에 한 합에 쳐내지 못하고 힘겨루기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대치하며 덜덜 떨리는 팔이 선명하다. 고전하며 일그러지는 미간 또한 짙다. 엑스칼리버였다면 한 합에 무찔렀을 것을, 결국 버티다 큰 상처까지 입고 만다. 자연히 “엑스칼리버가 아니면”이라는 대사가 나올 수밖에. 

이 전개가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격렬한 전투의 와중에 팔로, 미간으로 전부 전해주는 샤아더의 섬세함에 감탄할 뿐이다.

 

〈기억해 이 밤〉에서는 와중에 얼빠의 본능. 왕관이 역대급으로 예뻤다. 아예 대각선으로 씌워져서 이마가 훤히 보이는데 와아 너무나 너무나. 언뜻 초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대각선 그린 왕관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 왕관 벗을 때 탄식이 절로 나왔지 뭐예요. 

 

〈결코 질 수 없는 싸움〉 죽어가는 아버지, 끌어안은 아들. 오랜만에 아들의 손이 상처 부위를 정확하게 감싸 쥐었다. 그 자리가 생명이 빠져나가는 구멍이라도 되는 양 틀어막고 바들바들. 화살이 뽑혀 나간 자리를 정확히 틀어쥔 손은 참 볼 때마다 슬프다.

 

〈혼자서 가〉 바로 평야로 나아가겠다는 지휘관이자 카멜롯의 임금님. 강태을 랜슬럿은 늘 하던 대로 지휘관이 아니라 동생을 어르는 것처럼 그의 어깨를 감싸 쥔다. 아마 그 점이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형의 손을 매몰차게 쳐내는 동작에서 용의 불길 이외에 그런 감정도 묻어나는 것 같았다.

 

혹 오늘도 강태을 랜슬럿의 등 뒤에서 주먹을 쥘까, 싶었으나 정석대로의 동선이었던 〈이게 바로 끝〉. 그렇다면 그날은 복받친 감정이 이끌어낸 예외었을까? 랜슬럿의 등 뒤에 머무르며 주먹 쥐는 절망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평원에 가득한 상실들. 산재한 이별. 확실히 강태을 랜슬럿을 보낸 후의 그의 얼굴에 파동이 크다. 오늘 역시. 기네비어를 마주하고 눈물 차오르는 오른쪽 눈동자의 옆얼굴을 보고 눈을 깜빡이니, 이어서 남은 건 눈물 맺힌 속눈썹. 그릴 수 있다면 그렸을 텐데.

“영원을 알 수 없던 오..늘”에서 깊이 묻던 얼굴도, 떠나는 뒷모습을 향하여 아주 작게 읊조렸던 “안돼..”도 모두 그렸을 것이다.

 

최종장. 검을 내려그으며 마음을 갈무리한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의 바위를 돌아보았다. 몸을 트는 찰나가 억겁처럼 느리게만 보였다. 뒤를 돌아 바위를 마주하면 더는 물러설 곳 없기에, 시간을 멈추어둘 것처럼 느린 동작에 울컥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정면으로 검의 바위를 마주해내고 마는 뒷모습에서, 오늘도 필연처럼 시아준수를 보았다. 

재차 돌산을 오르는 아더는 언제나 늘 무대로 돌아와 주었던 시아준수. 

기어이 검을 치켜드는 아더는 언제나 시아준수로서, 김준수로서의 자신(self)를 지켜온 그.

 

언제일까를 부르던 그때와 같이 다사로운 황금빛 조명 속에서 최후의 ‘기억해 이 밤’을 흩트려낸 그가 마침내의 백색 아우성 속에 묻혀갈 때.. 아직도 나를 뒤흔들고 있는 금쪽상담소의 잔물결 속에서 두 사람 몫의 기도를 했다.

그의 아더에게도, 시아준수 자신에게도 더 이상의 상실이 없기를.

세상 가장 밝은 빛, 내 전부가 된 사람. 이제는 세상이 그를 지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