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실패한 거야. 아들로도 남편으로도 친구로도 왕으로도!”
공연 초반에는 분명 크레셴도의 문장이었다. 문장이 나열되어갈수록 절망과 소리가 비례하여 부피를 키웠다. 아들보다 남편이, 남편보다는 친구가, 그리고 앞선 모든 실패 위에서 왕이 터트려졌었다.
그런데 요즘은, 특히 오늘은 그 반대였다. 소리가 하염없이 고꾸라졌다.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높은 곳에서부터 소리가 거꾸로 내려왔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의 실패를 나열하는 일조차 힘에 부친 사람 같았다.
가까스로 완성한 문장의 끝에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그가 몸을 웅크렸다. 자그마한 동그라미 같던 등이 가여웠다.
꼭 소년이 아니어도, 한 명의 사람으로서도 감당키 어려운 너무나 많은 것들이 그 등 위에 있었다.
정말로 신이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을 준다면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은 저 사람은 대체 어떤 그릇이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오늘의 말들은 “지킬, 하아이드!” 아니 시아준수의 뮤지컬 바운더리를 넘어가다니. 깜짝 놀랐지 뭐예요. 아무래도 뮤지컬 콤비는 출연작에 한정하지 않고 이어지려나 보다.
〈언제일까〉의 잔망 구간, 모로 누워 마냥 예쁠 때 그만 옷끈이 마이크에 걸려 한쪽 뺨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자세도 분방한데 차림새도 마구잡이라 더욱 장난기 가득해 보였던 토요일의 아더. 누구네 아들이 이렇게 눈에 넣어도 예쁠까요.
시간을 달려 랜슬럿과 기네비어의 대련, 오늘도 빼꼼히 끼어들었다. 기네비어를 결박하는 랜슬럿의 등을 뒤에서 손으로 빠르게 찰싹찰싹. 대련 와중에 제 등에서 느껴지는 법석에 이지훈 랜슬럿이 그 자세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뭐야, 왜, 왜 대꾸하는 흐름이 오늘의 시트콤스러운 재미.
성당 공터에서는 엎드린 김에 팔굽혀펴기 두 번. 근데 글쎄 한쪽 다리를 접어서! 오른발을 왼쪽 종아리 위에 올려 한쪽 다리로만 몸을 지탱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동작이 가볍던지. 심지어 언뜻 다리 선이 드러나는 부츠 덕에 맵시까지 아주 호리호리. 너무나 근사했습니다. 또 보고 싶습니다. ♡
“너희 이교도 군주”에게 전하라며 아스가르에게 일갈하면서는 오늘도 상처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오, 계속 이어지는 건가. 상처를 잡고 선 모습 매우 좋아했는데 별안간에 이별하게 된 건가..! 일단 삼세번까지는 지켜봐야겠지요.
(그런데 랜슬럿, 해 질 녘에 가서 별빛이 다 기울도록 멀린을 데려오지 않았던 건가요. 오늘 뜬 사진을 보고 공연을 보니 넘버 내내 시간의 흐름이 강하게 닿아와서 내가 괜히 초조했던 것..)
〈왜 여깄어?〉 막바지 합창, “난 여-깄어 난 여-깄어”에서는 13일에 이어 오랜만에 두 번 모두 곧은음으로 들려주었다. 두 음절 모두 곧게 빼낼 때의 청량감 정말 사랑합니다. 굴곡 없는 성정에 곁들여진 소년미,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에선 놀랍도록 늘어지는 박자. 오, 이 넘버에서.. 오.. 심지어 음향도 현격히 작아서 무대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미흡한 와중에, 오늘의 박자와 이 음량을 사람의 소리로 덧칠하여 긴박하게 꿰어낼 수 있다니. 오늘의 결싸움에서 극적 긴장감이 조성된 건 순전히 시아준수의 가창과 연기 덕이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역량이 어디까지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본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보니 돌아온 기억. 14일의 그, 왕관을 벗어 던지는 각도부터가 맹렬하다 싶더라니. 그대로 바위산에 명중 시켜 전에 없던 굉음이 났다. 쾅 소리와 함께 저 멀리 거침없이 튕겨 나가는 왕관 앞으로 성큼성큼 분노의 걸음을 앞세우던 소년왕. 아름다운 극적 우연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소중한 소품인지라 오늘은 14일과 다르게 옷 위로 정확히 안착시켜낸 샤아더!)
〈혼자서 가〉에서는 재연 처음으로 불꽃을 목격했다. 딱히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눈앞으로 뛰어드는 반짝임. 눈으로 ‘파바박’이라는 단어를 읽은 것만 같았다.
“무-너-지-는 꿈, 이!게 바!로! 끝!”은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까. 단순히 탁성이라 가능한 게 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있는 힘껏 갈라지는 파열음이 ‘노래’가 될까?
긁는 단계를 넘어 소리를 완전히 조각낸 음이 신묘했다. 내일을 염두에 두었을 리 없는 저 소리를 엊그제도 듣고 오늘도 듣는다는 게 놀라웠다. 재연의 이게 바로 끝이 반토막 났음에도 관객들이 여전히 이 넘버에 환호하게 되는 이유를 매 공연의 그가 토해내고 있었다.
전후의 평원. 랜슬럿을 떠나보내고 기네비어와 마주한 그.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부둥켜 잡았다.
“난 다 용서했어.”
그러나,
잡히기 무섭게 빠지는 손에 내내 옅게 흐느끼던 그가 그대로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잡힌 손을 빼낸 그녀가 여지를 주지 않고 선언한 후에야 그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맥이 탁 풀리며 서글프게 흩어지는 흐느낌이 조용한 공간을 두드렸다.
모든 상실 후, 제 곁에 남은 단 하나. 검 앞으로 무너지는 육신이 굉장히 느리게 눈에 박힌다 싶었다. 엎어져 한참을 멎어있는 등에 눈을 깜빡였다. 두어 번을 시선을 고쳐 보아도 엎어진 채 굳어있는 몸이 낯설었다. 평소라면 진작 검을 다시 쥐고 몸을 일으켰을 텐데, 뜸들이는 모습이 마음을 내려앉게 했다. 삽시간에 온갖 생각이 스쳐 갔다.
두려운가. 슬프도록 지쳤나. 버거운가. 아픈가…
부득불 일어나는 모습마저도 힘겨워 보이는 오늘의 샤아더라, 차라리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무 힘든 날에는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싶다면 그래도 좋으니, 부디 편안하기를 바라노라고.
당신만은 그래도 된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러나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끝끝내 바위산에 다시 올라 검을 치켜드는 그에게 전할 수는 없어, 그저 속으로만 삼킨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