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끝〉에서 두 눈에 흡사 벼락을 꽂는 듯했던 동작. 무너지는 ‘꿈’에서 짓이기듯 반동 주어 한 번 탁 쳐낸 고개에 오늘의 드라마틱 어워드를 드립니다. 이 파괴적인 질감의 소리를 지금 고갯짓으로 찍어낸 건가? 소리가 어디에서 나온 거지? 순간적으로 눈도 귀도 얼얼했다. 리플레이 필요합니다. 시아준수 부디 참작하시어 다음 공연에서도 이 고갯짓을 허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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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작았다. 음량이 14일의 절반가량 되는 것 같았다. 다만 에코도 작고, 오케스트라 연주도 다 같이 작아서 전체적인 음향 밸런스는 나쁘지 않았다. 특정 구간에서는 오히려 평소보다 울림이 덜해 또렷하게 들리기도 했다. 특히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응당 있어야 할 웅장함은 덜했지만, 시아준수 특유의 쇳소리가 에코 입어 둥글게 말리지 않고 그 결이 올올이 살아있는 느낌을 만끽했다. 매우 소중했던 감각. 

 

오늘의 말들은 “동키야, 호테야!” 또 한 번 시아준수 바운더리 바깥의 뮤지컬 콤비. 말 이름으로 엮기에는 어느 뮤지컬 캐릭터보다도 찰떡이었다. 정말로 아더네 마구간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 아이들이었다. 

 

검의 바위에서 엑스칼리버에게 으름장 놓는 대사들도 살짝 새로워졌다. 이 완전 악물고, “너나, 그래, 그, 인상 더럽게, 무섭게 생긴 마법산지 뭔지나.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봉 대련에서는 오, 4종 세트가 전부 왔다. 기네비어에게 손뼉 짝짝 쳐주다 쌍따봉까지 연발했고, 날렵한 김턴으로 홍경수 엑터에게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낚시통으로 랜슬럿을 응징하는 시늉 후에는 그 등까지도 한 번 찰싹. 그간의 모든 오밀조밀한 디테일들이 결집한 10월 24일, 10주 차의 주 막공인 것이다. 

 

“매우 매우 대단한 사람이 분명하죠!”에는 옅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랜슬럿의 깐족거림에 분개하는 날도 있었는데, 오늘은 웃음 띤 얼굴로 사르르 풀려 있어 몹시 예뻤다.

 

아니 그런데. “대단하고, 여전히 영원한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홍경수 엑터. 어머나. 이렇게 살뜰한 애드립이 올 줄은 몰랐어요. 순간적으로 이 말을 함께 듣게 된 시아준수의 표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는데, 잔잔하게 웃는 얼굴에 큰 내색은 없었지만 그냥 보기에도 너무나 좋았다. 

 

“평범한 사람도 해낼 수 있을까요?” 기네비어가 대답을 겸하며 그의 가슴을 툭 치자 닿은 자리를 매만지며 우와아~ 세모꼴로 벌어지던 부리가 깜찍했던 것, 22일과 마찬가지였다. 이봄소리 기네비어는 랜슬럿의 어깨만 툭 쳐주기 때문에 항상 부러워하는 아더를 보게 되는데, 가슴 팡 맞고 감격 입은 입술에서 “드디어 나에게도!” 차례가 왔다며 기뻐하는 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우리 만난 건〉 화음 쌓는 음이 너무나 고운 결의 안개였다. 특히 “알 것만 같아, 사실 완벽히 같아.” 소리가 어떻게 이렇지. 이게 악기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라니. 시아준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악기는 역시 사람의 소리를 본떠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왜 여깄어?〉 샤장일 때, 이 펜드라곤 남매에게서 좋아하는 그림이 있다. 장은아 모르가나의 앙상한 손목을 도탑게 감싸 쥐는 아더의 다정한 두 손. 오랜 시간 수도원에 방치되었음이 훤히 보이는 모르가나의 손목에, 엑터의 보살핌 속에서 피어난 아더라는 온기가 닿는 장면을 좋아한다.

장면에서 요구되는 조화로움이 배우들이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단지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피어날 때가 있는데, 왜 여깄어의 샤장 남매가 그걸 보여준다. 

 

〈오래전 먼 곳에서〉에서 좋아하는 것은 한쪽 팔씩 예복을 받아 입으며 친구와, 아버지와 꼭 눈 맞추는 시선. 반지가 든 상자를 전해 받을 때와 돌려줄 때 짧게라도 꼭 아버지와 시선 맞추는 눈. 이 장면의 주인공은 따로 있지만, 와중에도 제 곁의 사람들을 잊지 않는 섬세한 시선 씀씀이를 좋아해요. 


〈눈에는 눈〉 오늘은 내린 아더. 막이 오르는 순간 일말의 아쉬움과 함께 안도감이 들었다. 아, 잘 아는 잘생김. 내린 아더의 익히 아는 잘생김. 오늘은 2막을 보면서 ‘들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야기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발밑에 그려지는 마법진으로 시선을 떨군 그는 처음 본다. 늘 멀린에게 시선을 고정해두었던 날들과는 다르게 오늘은 연신 발밑을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어지럽게 그려지는 마법진을 쫓던 눈이 멀린에게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왕이 된다는 것〉

“가, 너의 발밑에 땅이 흔들리고 전부 갈라져도 앞-으-로.”

굳은 음성과 함께 발끝에 힘을 실어 앞으로 크게 두 걸음. 그리하여 무대 앞까지의 걸음을 전부 맺은 그가 우뚝 섰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에 의지해 주변을 살피며 조금씩 걸음을 옮겨왔던 도입부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걸음걸이. 

아, 단단해진 이 걸음조차도 노래의 일부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손끝까지, 숨결 하나 걸음 하나까지도 왕이 될 준비를 마친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전후의 평원, 형을 붙든 채로 전에 없던 말을 외치던 아더.

“랜슬럿! 정신 차려! 랜슬럿!”

정신 차리란 비명이 무색하게 죽음이 다가왔다. 어깨를 웅크린 채 연신 웅얼대는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줄 이가 더는 없었다. 사과할 대상이 사라진 곳에 흐르는 메아리 같은 울음. 어쩐지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별. 오늘도 “상상조차 못 한 순간”에서 두 팔 벌려 허공 사이를 헤매는 시선이 잔뜩 젖어 있었다. 그래, 이 하늘 아래 대체 어디에서 이런 미래를 상상했겠는가.

“여기 우리의 사랑 기억해.”

‘사랑’이었다. 반지를 나누어 낀 두 손 위로 그의 시선이 황급하게 떨어진 순간이. 그도 그녀도 아직 같은 반지를 끼고 있음을, 그것이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징표였음을 재차 더듬어보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끝은 비극.”

비극에 스며들기 시작한 울음이 끝내 마지막 소절을 집어삼켰다.

오직 캄캄한 암흑, 오래전 먼 곳에서 상상조차 못 한 순간이었다.

 

최종장. 애써 결연하게 검을 내려긋고도 등 뒤에서 ‘한 뜻 한 길 한 맘 한 꿈’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네모꼴로 내려앉는 얼굴을 본다.

잘게 부수어지는 어깨. 흐느낌의 근원을 알 것도 같았다. 

한때는 모두와 함께 합창한 노래였건만. 열두 명의 맹세가 이제는 오직 그만의 것이 되었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검의 바위. 

다시 돌아온 시작점.

상실에 이골이 난 얼굴을 하고도, 잃어버린 것들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가 걸음을 옮겼다. 다 잃은 그의 오르막길에 이제는 그 어떤 응원도 관중도 없었다. 그저 지난 역사가 되어버린 시간만이 힘겨운 발끝에 따라붙었다.

다 올라서도 마찬가지였다. 덩그러니 텅 빈 곳. 홀로 선 그가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묵묵하게, 또한 꿋꿋하게.

합창할 이들은 비록 모두 사라지고 없었으나,

끝까지 검을 놓지 않는 그 자신이 곧 한뜻 한 길 한 맘 한 꿈의 본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