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원감. 오랜만에 느껴보는 달리는 박자와 박자로 쪼는 오케스트라. 늘어지지 않는 연주가 너무나 오랜만이라 극이 새로울 정도였다. 마침 음량도 몹시 출중했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길과 이게 바로 끝의 출력이 어찌나 쟁쟁하던지. 여러모로 공연 관람에 신선한 재미를 느낀 날이었다. 

 

오늘의 말들은 “사쿠야, 란보야.” 어머 놀라워라. 주제가 갑자기 이리로 튈 줄은 몰랐는데요. 프리댄스도 말들과 콘셉트를 맞추었다. 하프천사시아 한 채 스텝 콩콩 밟다, 이지훈 랜슬럿에게 돌아서서는 꽃받침을 쨘.

 

〈찬란한 햇살〉 도입부에선 오늘따라 아버지로부터 조금 멀찍이 앉는다 싶더니.. 결국 앉은 채로 엉덩이만 살짝 들어 거리를 슬금슬금 좁히고도 모자라 아버지의 어깨에 거의 눕다시피 했다. 깊게도 누운 상체가 편안해 보여서 조금 웃었다. 

 

〈원의 완성〉에서 그를 관통하는 사명감. 그러나 곧이어 그 무거운 위업이 다른 누구 아닌 자신의 운명이라는 깨달음 앞에서 깜깜해지는 얼굴을 본다. 두 손을 내려다보며 막막해하는 표정이 묻는다. 어째서 나지? 난 지도자도, 전사도 아닌데. 왕은 더더욱이나 아닐 것인데.

 

“매우 매우 어메이징한 사람이 분명하죠!”의 웃음기가 확연해졌다. 오늘은 하핫. 아예 웃는 소리를 더하기까지. 

 

성당 공터. 랜슬럿의 등 뒤에서 주먹 꽁 쥐고 때리는 시늉하는 아더, 오랜만. 

기네비어에게 들킬세라 폭 엎드리기 위해서는 몸을 아예 날렸지. 바닥으로 낙법 하듯 엎드렸는데 쾅 소리가 어찌나 크게 나던지. 아니, 그 소리에 들켰을 것 같은데요 아더.

 

색슨족의 습격. 아스가르에게 경고하며 오랜만에 상처를 짚었다ㅡ는 잠시. 금세 떼어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강하게 일갈했다. 상처를 짚었다가 마는 동작이 어쩐지 본능적으로 손이 간 건가 싶었는데, 다음 공연의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어요. 

 

〈왜 여깄어?〉 “고통조차도 다 너의 운명일 뿐, 피할 길 없어.” 손준호 멀린의 날카롭고 뾰족한 음성을 듣는 얼굴이 흐렸다. 그늘 드리운 얼굴은 분명하게 슬퍼하고 있었다. 미처 몰랐던 비극, 그것도 너무나 가까운 피붙이의 불행을 다른 누구 아닌 멀린이 터부시하는 상황에 눈앞이 아찔한 사람처럼,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시선 내린 채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선 안 돼, 바로 할 수만 있다면.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아야 해.”

곧은 음성이 누이를 감싸고, 멀린을 향해 똑바로 쏟아졌다.

 

〈오래전 먼 곳에서〉 아버지! 아씨.. 속삭이며 타박하던 아더, 기네비어의 목소리에 구겨졌던 표정을 정돈하고 무언가 결심한 태도로 몸을 틀었다. 여기서 기네비어를 대할 때 어떤 비장미까지 느껴진 건 또 처음이네요.

이어 “우린 영원히 하나”의 고풍스러운 울림이 듣기에 얼마나 좋았는지. 소리에 풍만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면 꼭 이럴 것이었다. 새로운 아름다움이었어요.

 

〈눈에는 눈〉 “결-전의 날이 왔다”며 원에서 힘차게 내려오는 아더, 원래도 망토를 펄럭였던가? 오늘 내려오는 순간에 맞춰서 양손으로 망토를 밀쳐내어 붉은 안감이 그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차르륵 흐트러졌는데 세상에. 이렇게 근사하게 멋있을 수가.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

 

〈혼자서 가〉 “충분히! 남아있죠”에 살짝 다른 강세. 보통은 충을 딛고 히가 가장 높이 올라가곤 하였으나 오늘은 충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소리가 내려왔다. 초연 때부터 변화가 거의 없던 문장이 새로워진 셈이라 귀가 쫑긋.

 

〈심장의 침묵〉에서 오케스트라의 밀당에 맞추어 박자를 쪼개는 시아준수, 얼마나 오랜만인지. 또 얼마나 긴박하게 천재적이던지. 슬프고 처절한 아더여야 하는데, 시아준수가 멋있어서 혼났다. 왜 이렇게 노래를 잘해요. 왜 이렇게 박자 위에서 노닐 듯 존재하는 거예요.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 아더, 오늘따라 마지막 순간에만 검을 치켜올렸을 뿐 계속 색슨족을 겨누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의 검은 바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아더만 부동이었다. 다 함께 검을 움직일 때는 군무의 묘미가 있었는데, 아더 혼자 색슨족을 겨눈 자세로 움직이지 않으니 지도자스러운 여유가 폴폴.

 

오늘의 〈이게 바로 끝〉에는 중요 중요 강조 밑줄 표시. 소리의 출력이 탄탄하니 노래도 화음도 거칠 것 없이 만개했다. 아, 이 소리의 짱짱함. 파열음과 짙푸른 저음을 오가는 분노. 분노를 있는 대로 쏟아내는 것 같은데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강약의 소릿결. 이걸 생생하게 전부 받아 삼키는 감각, 이게 바로 행복. 

 

〈왕이 된다는 것〉 문장을 넘어가는 호흡이 평소보다 빨랐다. 특히 여기. 이 세상과 맞설 위대한 왕을 다 기대해 / 내 한계를 넘어 더 가볼 수 있을까. 숨도 거의 쉬지 않고 다음 악장을 향하여 곧장 전진하는 노래가 어쩐지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디로? 

출렁이는 겨-울바-람을 지나, 분노에 찬 바다를 거쳐 앞으로.

무엇을 향하여?

한계를 넘고, 의심을 지우고, 진실 앞에 바로 서는 길까지.

그 사이에서 망설임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노래도 걸음도 흡사 돌진해 나오는 모습이 그가 딛고 선 땅을 활주로처럼 보이게 했다.

고통은 있으나, 머뭇거림은 없는 길.

재연 11주 차의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건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여기 우리 사랑, 기억해”에서의 통한의 소리.

여-기의 울림, 의에서 잘게 떨리며 음 타고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자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문장이 있었다.

슬픔을 그린 그림처럼 심장이 없는 얼굴.

이를 소리로 치환하면 이런 모양일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