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연이었다. 1막은 재미있었고, 2막은 좋았다. 왕이 된다는 것을 지나 평원에 이르러서는 이 완성도는 세막의 것일까, 그런 생각도 잠시 했던 듯하다.

 

〈찬란한 햇살〉 도입부에서 아버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적. “찬란한 햇살을 막지 못해” 두 팔 활짝 펼치는 땜삥감 오늘 유난하여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던 아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햇살이었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이종문 엑터와는 다르게 홍경수 엑터는 넘버 초반, 아더를 두 손으로 꼭 붙들고 계시는 편. 그래서 본다. 아더가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비비안에게로 가는 모습. 아버지에게 잡혀있던 어깨를 털어내는 동작이 좋아서, 이 모습을 보게 되면 기뻐요. 

 

〈원의 완성〉에서 요즘 이입되는 부분은 네 아버지가 파괴한 모든 것들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말에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아더. 마이크를 타지 않아 보통은 입 모양으로 읽어내야 하는 이 대사를 볼 때마다 절로 끄덕이게 된다. 그래, 난데없는 출생의 비밀도 버거운데 여기에 운명론이라니. 아직 우더의 혈통도 받아들이지 못한 아더 앞에 모든 것이 너무나 몰아쳐 온다. 문득 두렵고, 문득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이런 날에는 〈내 앞에 펼쳐진 길〉에서 계속 자문하는 아더가 사무치게 다가온다. 모든 의심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도 해낼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스스로를 두드려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검이 한 사람을〉 아, 오늘 웃겼던 것. 강태을 랜슬럿과의 포옹을 기억하는 시아준수, 이지훈 랜슬럿에게 폭 안기며 어제와 같이 두 발을 쭉 들어 올렸는데.. 그의 생각보다 이지훈 랜슬럿이 그를 빨리 내려놓았던 것이지. 어정쩡하게 들렸다마는 다리가 지상 위로 어정쩡하게 착지하는 게 너무 귀여웠지 뭐예요.

 

봉 대련. 기네비어와 랜슬럿 뒤편에서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아더 부자 때문에 심장을 잡게 되는 여기.

오늘도 낚시통 잡고 아버지에게 박수갈채를 받은 아더, 잔뜩 신이 나서 리플레이를 선보였다. 통을 재차 빙그르르 던졌다 받는 캐치통 재방송, 봐도 봐도 귀엽다. 이것만 한 열 번 정도 더 보고 싶어요. 

이어서 김턴을 선보인 아들에게 꼭꼭 쌍따봉 잊지 않는 아버지도 정말 좋고요. 아더가 기네비어에게 쌍따봉을 주었다면, 아더에게는 쌍따봉 주는 사랑 만발의 아버지가 있는 것이지!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샤훈일 때 좋아하는 그림은 각자 기네비어가 내민 손을 잡는 대목에: 온몸을 써서 다이빙하듯 기꺼이 맞잡는 아더와 기네비어가 톡톡 두드려야 마지못해 손을 내주는 이지훈 랜슬럿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 보는 재미가 있다. 틱틱대는 랜슬럿 건너편의 아더, 몹시도 사랑천사라니까요.

그리고 ‘매우’ 매우 어메이zing의 진폭이 특히 남달랐던 것. 오늘의 특이점.

 

성당 공터. 이지훈 랜슬럿이 그를 밀치며 앞으로 한발 나서자 등 뒤에서 주먹 꽁! 쥐어 보였는데 그만 그대로 형과 눈이 마주친 아더. 스리슬쩍 웃으며 팔을 내렸다가 형이 뒤돌자 한 번 더 주먹을 꽁 쥐었다. 이 장면에서 주먹 꽁 두 번은 또 처음이었지요?

 

〈이렇게 우리 만난 건〉 기네비어가 그에게 다가설 때면 두 눈 크게 부풀어가며 기네비어 고여 드는 얼굴. 아이 예쁘다, 정말 예쁘다. 화음으로 쌓이는 안갯빛깔 소릿결처럼 곱게 만발하는 얼굴에 넋을 잃어요.

 

〈왜 여깄어?〉 왕이 되어야만 하는 너의 운명, 완고한 멀린이 답답한 듯 뒷걸음질하는 아더. 그런 그에게로 모르가나의 소절이 꽂혀 들면(다 헛된 말일 뿐 모두를 기만한 그저 말장난) 마치 심장으로 전류가 흘러든 것처럼 고개 들고 누이에게로 이끌린다. 여기 아더의 심경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얼굴이 얼마나 섬세한지요. 

장은아 모르가나와 함께하는 마지막 합창의 어우러짐까지도 대단했다. 다른 듯 닮은 남매의 결을 이토록 조화롭게 그려내는 두 사람에게 감탄할 뿐. 

 

〈오래전 먼 곳에서〉 기네비어를 돌아볼 때, 살짝 결심 굳히고 몸을 마저 트는 아더가 왜 이렇게 좋을까요. 오늘은 심장을 두드리듯 왼손을 허공 중에 두어 번 통통 튕기기도 했는데, 그 떨리는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 덩달아 나도 통통.

그리고 노래. 목소리 신중하게 골라 공들여 부르는 노래, 세상 모든 것을 녹일 다감한 소리. 저는 녹았어요.

 

얼굴 넘버인 〈눈에는 눈〉이지만 오늘의 펜드라곤 남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막의 왜 여깄어에서도 두 사람만의 세계를 이룩하더니, 눈에는 눈에선.. 모르가나의 불길이 곧 아더의 숨결이고, 아더의 분노가 모르가나의 활력임이 마치 공식처럼 명징했다. 멀린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났겠지만 우더가 살아서 오늘의 펜드라곤 남매를 보았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을 것.

 

〈심장의 침묵〉 아버지의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이 꼭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부여잡고 있던 손처럼, 섬세하고 슬펐던 도입부. 이 도입부에서 피어난 노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생각했다. 아, 오늘 공연 좋구나. 시아준수의 재연 엑스칼리버가 더 갈 곳 없는 최종장의 완성을 지금 이루어내고 있구나. 

 

〈이게 바로 끝〉 늘 한 손 위로 고개를 떨구었던 그가 오늘은 무려 두 손에 얼굴을 묻고자 했다. 닥쳐든 절망이 여느 날보다 무거웠던 걸까. 얼굴을 거의 다 집어삼킨 두 손이 절망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가, 퍼뜩 내려와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어서는 놀랍도록 서슬 퍼런, 동시에 세심한 완급의 가창. 

와중에 오랜만에 ‘무너지는 ’에서 살짝 반동 준 고갯짓까지. 아, 오늘 공연 너무 좋은데.. 오늘 공연 뭐지, 이렇게 보내기 아쉬워서 어쩌지. 말을 잃고 자꾸만 찬탄케 되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위에 몹시도 아름답게 바로 섰던 〈왕이 된다는 것〉

가장 가슴에 맺히는 순간은 역시 땅이 흔들리고 전부 갈라져도 “앞-으-로.” 자세를 굳건히 하고 성큼 내딛는 ‘앞으로 두 걸음’이 왜 이렇게 슬픈지.

이 노래의 마지막 두 걸음이 1막에서부터 시작된 아더의 모든 여정의 정수이자 종착점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의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의지가 그의 발끝에 전부 있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근래 몹시도 이입되는 건 랜슬럿의 어깨에 손 탁 얹으며 서로가 서로의 등을 맡아설 때 듣게 되는, 마이크를 적시는 옅은 한숨. 어느 날에는 기진맥진하고, 어느 날에는 결연한 이 숨소리만 들으면 아더가 선 곳이 생과 사의 한복판이라는 게 실감된다. 저 치열한 사투에 서 있는 사람이 아직 어린 소년일 뿐이라, 덩달아 긴 숨을 삼키고 말아요.

 

〈평원에 날 묻어〉 망자들이 도열한 평원. 모두가 떠나가고 아더가 흐린 안개 틈으로 무너져 앉을 때의 소리들이 너무 잘 들리는 게 또 참 슬픈 요즘. 요 근래는 ‘안돼’를 연거푸 뱉더니 오늘은 그보다는 좀 더 뭉툭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제대로 된 발음이 되지 못하고 울음에 묻혀 흐려지는 단어들 끝에서 그가 안개 사이로 무너졌다. 주저앉은 그 등을 덮는 건 영영 떠나가는 이들의 노랫소리. 

더 이상 눈물 없는 그 날 오게, 더 아프지 않게… 추락한 영혼을 찾아, 그 노래 울리는 곳.

죽음으로 추락한 이들보다도 더 눈높이가 낮은 곳에서 한껏 웅크린 그의 모습이 참 쓰렸다.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에서도 숨소리. 기네비어와 마주하고, 돌아와 달라 애걸복걸하기 전. 숨을 삼키며 가까스로 호흡을 진정시키던 가슴. 떨림이 고스란히 들리던 그 숨. 숨결 하나조차도 이렇게 마음에 맺히는 아더를 어찌할까요. 

 

재연 엑스칼리버 마지막 주 (서울). 예쁜 부분은 언제나 그랬듯 마냥 예쁜데, 슬픈 부분은 마지막이라는 감회 앞에서 가눌 수 없는 눈물밭이 되고 마는 나날.

그래도 시아준수가 인터뷰를 통해 ‘아더는 또 그렇게 카멜롯을 잘 다스려 나갔으리라’는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어준 후이기에, 조금쯤은 눈물을 덜어내고 내일의 햇살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또 한 번의 공연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