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연이었다.
일단 음향이 무대 밖으로 나왔고, (부음감의) 오케스트라가 배우들을 노래 위에 태우기 시작했으며, 이야기를 엮을 줄 아는 배우들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오늘의 왜 여깄어, 오늘의 눈에는 눈, 오늘의 이게 바로 끝에 박수를. 그리고 이 모든 노래들의 위에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선 샤아더의 왕이 된다는 것에 찬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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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일까〉의 사랑스러움부터. 누웠다 일어나며 뒷머리 몇 가닥이 뽈뽈 일어나버린 아더. 민들레 홀씨처럼 존재감 가득하게 뻗친 머리가 얼마나 귀엽던지. 뒤통수에 홀씨 한 움큼 달고 무대를 누비는데 휴.. 누가봐도 사랑스러운 우리의 햇살이 틀림없었어요.
〈찬란한 햇살〉에선 디즈니 구간에서의 살랑거림 대체 뭐예요. 절망 하~지마, 포기 하~지마, 높은음을 유독 부드럽게 날려 보내는데, 살랑거리며 날아가는 소리에 깜짝. 부드럽게 흩어지는 소리가 너무 곱단해서 심장이 다 간지러웠다. 사랑해 마지않는 시아준수 고운 층의 소릿결. 정말 어여뻤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대사: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를 이렇게 명징하게 들은 날이 또 있을까. 마이크를 절반 정도만 타고 흐른 볼륨이 딱 좋았다. 앞으로도 이 정도로 쭉 들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검을 뽑고는 계속 스스로에게 놀라 벙긋대는 입 모양을 본다. “말도 안 돼..”
그런데 “평범한 사람도 해낼 수 있을까요?”에서 버벅대는 거, 어제는 대사가 엉킨 건가 싶었는데 오늘 보니 의도한 부분인가 봐. 서툴지만 순수한 매력을 어필하는 거였군요. 좋아요. 매우 귀엽고 티 없이 선해 보여요.
성당 공터의 비나이다 비나이다 외는 얼굴도 말해야지. 눈 감은 미간의 잘생김 말로는 다 못 해요.
“형 얘기한다 형!” 놀리고서는 짓궂게 아하하하하하 크게 소리 내 웃는데 (손준호 멀린처럼) 깜찍하고도 제법 얄미워서 넥슬라이스를 절로 부르는 것까지도 사랑스러웠지.
앙코르의 〈이렇게 우리 만난 건〉에서 항상 감탄하는 부분은 아더가 일어서서 걸을 때. 비틀비틀 일어나 의지력으로 버티며 걷다, 한 번씩 휘청이며 운신하는 연기를 이렇게 잘할 일? 2막에서 멀린으로 변할 때 마법진 안에서 휘청이는 연기와 쌍벽을 이루는 순간.
이 생의 마지막 왜 여깄어라 해도 좋았을 〈왜 여깄어?〉. 샤장민의 왜 여깄어는 진정 불패로군요. 이 스토리텔링은 실패가 없어요. 언제나 심장으로 직격해 들어온다.
사생아라 힐난하는 장은아 모르가나의 손끝에서 후두둑 고개 떨구고 마는 아더 모습에 마음이 미어지는 것부터가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
어제는 왈칵 감정을 토해내듯 들어갔던 ‘한평생’이 오늘은 다시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모르가나의 서글픔도, 서슬 퍼런 독기도 모두 품겠다는 것처럼. 십여 년간 엑터가 어떻게 사랑으로 보듬어 품었는지, 엑터의 품격을 받은 아이가 얼마나 다정하며 곧바르게 자라났는지 다 보여주는 여기 이 순간.
아더의 올곧음이 모르가나에게는 이용할 거리가 되고, 멀린에게는 아찔한 상심이 되는 이 넘버를 정말.. 사랑해..
대관식부터는.. 금발의 아더에 관하여 따로 쓰고 싶은데요. 과연 시간이 있을지.
음향이 무대 밖으로 도달한 것과 함께 실로 오랜만에 조화로웠던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의 음향 밸런스. 아더가! 아더의 분노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여타의 존재는 지상에서 그를 맞이하는 형상과 마침내 재회하여 기뻤다. 정말로 오랜만에 시아준수의 열창을 뒷받침하는 밸런스.
〈눈에는 눈〉의 펜드라곤 남매는 사랑입니다. 샤장 남매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또렷하면서도 인과에 지나친 과장이 없어 자연스럽다. 물 흐르듯 짜 맞춘 듯 맞물려서, 보고 있으면 짜릿해. 샤아더가 모르가나의 저주받은 진녹색을 입어가는 전개가 그림에 색을 입히는 것처럼 명료하면서 지극히 자연한 광경을 볼 때마다 전율해요.
더불어 오늘의 귀여움. 망토 자락이 칼자루에 걸려 손을 전부 덮어버렸죠. 내색 없이 손목만 좌우로 비틀어 빼내던 때, 무심한 얼굴 아래에서 바쁜 손동작이 몹시 귀여웠어요.
〈이게 바로 끝〉에서는 비명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배신을 목격하고 말도 안 돼, 거듭 중얼거리다가 소리를 왈칵 토해낸 게 모르가나의 노래를 뚫고 전달된 것만 같았다. 분명해. 고통 어린 비명이 있었어.
〈왕이 된다는 것〉은 오늘 공연의 종착점. 소리는 고풍스러웠고 의지는 상처 입었어도 굳셌다. 운명 앞에서 결국 혼자되었음에 어쩔 수 없는 쓸쓸함과 서글픔이 밀려와도, 떨릴지언정 울지는 않는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평원의 런웨이를 지나, 랜슬럿마저 그를 떠나갈 때. 형, 혀어어엉...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였다. 카멜롯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졌던 전쟁터를 지나, 전후의 평원에서 어느새 그는 형 앞의 어린 동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부름에서 많은 마음이 들렸다. 형마저. 형까지. 어째서. 제발. 가지 마. 어린 울음이 형을 붙잡고 두드려대며 채근했다. 그러나 결국 반려된 절박함에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망자의 뒷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왕이 된다는 것에서 이룩한 절정이 평원에서부터 검의 바위까지 고스란히 이어지는 엔딩을 보며 속절없이 웃었다. 이 극이 또 한 번 나를 눈물짓게 하는구나.
한 명의 왕, 그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인 아더가 있는 것처럼 하나의 극 안에 한 사람의 배우가 있어 눈물을 준다.
그 한 사람, 나에게는 언제나 김준수다.
3월 5일 공연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해낼 수 있을까요?”에서 부러 버벅이지 않았다. 버벅임이 딱히 의도했던 건 아닌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