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일요일.

 

첫 오블! 드디어 첫 오블! 가장 기대한 건 역시 ‘내가 엘이야’의 얼굴인데 그에 앞서 맞닥트린, 생각지도 못했던 짜릿함. 아, 그렇구나. 고등학생이다의 얼굴도 오블쪽으로 돌아서며 정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큼성큼 바닥을 내려찍던 걸음이 돌연 멈추고, 방향을 틀어 반바퀴 빙그르르. 어제는 반 틈만 틀었던 몸을 오늘은 전부 다 돌려 정확하게 정면으로 오는 동안의 얼굴이 낱낱이 보였다. 오블을 전방위적으로 훑고 간 얼굴이 미약한 승리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늘게 접힌 눈에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를 깔아보면서도 이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상대에 대한 기꺼움을 숨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한동안 그 기분 좋은 모순을 음미하다, 그가 단정했다. 가슴으로 얕게 숨을 들이켜면서, 확신의 닻을 내리듯이 살짝 치켜들었던 고개를 깊이 숙이며. 

고등학생이다. 

짜릿한 시작의 선언이었다. 

 

고등학생이다의 정면.. 시름시름.. 그런데 놀랍게도 고등학생이다의 정면 못지않게 게임의 시작에서 노래적으로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순간이 또 있었으니:

“내가 상대해-주-지이-”

가성을 부드럽게 흘려내며 미끄러트릴 때.. 

“게임 한 판 즐겨-볼까-”

그는 분명 음을 늘리고 있는데 마치 내 이성의 끈을 있는 힘껏 늘려대며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오케스트라를 타고 늘렸다가, 약한 스타카토로 강점을 찍고, 다시 연주 속으로 미끄러지는 완급이 세밀했다. 아니 단지 세밀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오케가 늘어질수록 노니는 가창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경지란 말인가. 느린 박자를 타고 노는 감각이 비인간적인 사람이란 걸 익히 알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를 조-심-해-”

조심해야 할 건 그의 박자 타는 가창이었다. 안 그래도 속살대듯 부드럽게 끌어가는 구간에서 이렇게까지 박자를 타고 노닐면.. 진짜 세이렌 같단 말이에요.. 극 중 ‘악한’ 존재는 분명 키라인데, 위험신호는 엘에게서 오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비밀과 거짓말에서는 우리 비장의 딸기 모델. 소파 뒤 테이블을 한손으로 짚고 고개 넘겨 딸기 먹을 때 참 잘생겼다. 

 

추리에 임하며 넘버 내내 꽤 진지한 엘인데, 딱 한 번 즐거운 기색을 내보이는 순간이 있다. 키라의 방법을 기어이 간파해냈을 때. 우블 돌출 끝까지 와 서서,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로 가슴을 미약하게 들썩이며 픽 웃는다. 그리고 단언하기를:

“너에게 필요한 건 내-얼-굴.”

확신의 깊이만큼 넓게 흐트러지는 소릿결에 혼망해진다. 소리도 잘생겼거든요.

 

 

이어 오블의 황홀함 둘.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어요 야가미 국짱님의 얼굴 똑바로 봐서 행복했습니다. 작정하고 딜 넣는 얼굴. 소이치로.. 부럽네요. 

버튼이 눌릴 때마다, 검지 세워 톡 버튼 누르는 손짓은 경쾌하기 그지없고요. 

 

그런데 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미 눈이 돌아있다. 위험한 빛으로 형형대는 그의 눈동자를 보다 나도 모르게 수사팀의 입장이 되어 심각해졌다. 갑자기 나타난, 이런 눈을 한 사람의 뭘 믿고 같이 수사할 수 있을까?.. 멀리 있는 키라보다 가까이 있는 이 사람이 지금 더 위험해 보이는데요.

 

 

죽음의 게임. 대망의 내가 엘이야. 잘 손질해둔 달걀처럼 반질반질 웃는 얼굴로 라이토에 얼굴에 직격타 한 방. 와아. 도발하는 정면의 얼굴이 이랬군요. 동그란 눈을 짐짓 무구하게 키웠는데, 그 안에 숨겨지지 않는 즐거운 기색. 불의타를 당하는 라이토의 입장에선 대번에 돌 수밖에 없는 표정.. 사람 좋게 웃고 있다가 엘을 따라서 동공만 홱 돌아가는 라이토의 발끈하는 심정이 아주 이해가 되었다. 도발하는 엘과 도발 당하는 라이토의 얼굴의 합이 정말이지 짜릿했어요.

 

그리고는 이제 누가 선인지 누가 악인지 알 수 없는, 순수한 승부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확실히 삼연의 엘은 ‘선’이 아니고, 정상도 아니다.

 

“버스에 뛰어들었대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키 칸조의 순직을 전하는 음성에서 열기를 느낄 때마다 흠칫한다. 동료의 죽음도 삼연의 엘에게는 수단이다. 애도에 앞선 옅은 희열을 애써 숨기지도 않는다. 문장을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고양되는 건 분명한 희열이다. 자신의 추리가 딱딱 들어맞아 가는 게 그저 즐겁죠, 엘? 

 

생명의 가치에서는 인간성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야가미 라이토를 만났죠.”

“형살 죽였잖아요.”

생글생글한 얼굴이 즐겁기도 하지. 눈은 희번덕이며 웃고, 음성은 달떠있다. 제 눈에 훤히 보이는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재밌어 죽겠는 얼굴이다. 비인도적인 방식에 대한 죄악감 같은 건 없다. 자신이 내린 결론이 맞으니, 그 과정도 정답인 게 분명한데.. 취조 대상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자 심기가 뒤틀린다.

“라이토를! 돕고 있잖아요.”

웃음기 걷힌 얼굴에 정색만이 남는다. 덩달아 공기가 언다. 입안에는 사탕을 굴리면서, 눈빛으로는 심문 대상을 난도질한다. 거짓말을 단죄하는 것처럼.

 

아들이 키라로 지목된 상황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야가미 소이치로의 ‘고통’은 신경 쓸 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진실을 떠먹여 주는데도 거부하는 눈먼 부정이 되려 어처구니 없는 감탄만 부른다. 제 어깨를 쓸며 오, 연발하는 얼굴이 낯선 소름을 일깨웠다. 어깨 떨어가며 야가미 소이치로를 비웃는 그는.. 공감능력을 상실한 사람 같았다. 인간의 감정을 머리로는 배웠으나 가슴으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게 아니고서야 사람이 이렇게 무정할 수 있을까. 까드득 사탕 삼아 짓씹어버리는 건 야가미 국장의 눈먼 부성인 동시에 제 인간성이기도 하다. 

 

이런 게 게임이라면, 이 게임은 너무 심했다.

 

그래서일까. 노트에 강제 당하는 마지막 순간의 엘은 업보를 되돌려 받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측은하기보다도, 이제까지 엘이 게임에 임하며 모두를 상처 입힌 대가를 본인이 받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그가 가차없었기에. 

 

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할 수 없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쓸쓸하고 슬픈 일이었다. 

 

그래, 이 게임은 너무 심했다.. 

 

*

 

‘누군가 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삼연의 표어가 과연 삼연 샤엘의 신념이기도 한지ㅡ에 대하여 계속 생각했다. 4월 후반에 이른 오늘까지의 소결론은,

아니 전혀.

 

삼연의 엘에게 선악이란 잣대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이 아니라, 그가 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선택한 ‘룰’일 뿐이다.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라이토의 위선 두른 사명감과 같은 건 그에게 없다. 엘은 그저 게임의 끝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게임의 끝 무렵에 정답을 쥔 자가 기왕이면 반드시 자신이기를 바라고 있다. 난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의 대가가 설사 죽음이더라도, 그건 게임을 즐긴 자가 지불할 몫인 것이다.

 

#데스노트 #엘 #김준수 #시아준수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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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2.04.25

위선은 떨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위악도 서슴지 않아 가며 소이치로를 갖고 노는 삼연의 엘은 상당히 고약해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다소 묘해진다. 문득문득 든 생각인데, 이대로만 간다면.. 성격 나쁜 순으로 치면 부동의 일등일 우리 리안이에게 조만간 좋은 친구가 생길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