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5월 18일 (수) 뮤지컬 데스노트 삼연 관람 후기
김준수, 고은성 페어
시아준수의 뮤지컬 데뷔 이래, 12년 만에 처음 있었던 일. 피치 못한 캐스팅 변경에 이를 간 것 같은 오빠.. 오빠가 마치 생명을 태워 붉게 타오르듯 최선을 다해 공연을 하므로, 후기도 최선을 다해 써보겠습니다.
항상 내일이 없는 시아준수라지만, 돌아온 오늘의 공연에서는 ‘몸 사리지 않는다’는 게 진정 무엇인지 보여줄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무대 위로 그의 생명력이 탈탈 쏟아지다시피 했다.
비밀과 거짓말, 매우 앙칼지게 꼭꼭 씹어 정확하게 발음하는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대사 하나 허투루 흘리지 않겠다는 배우의 의지가 음절 단위로 끊어지는 어조에서 들렸다. 본인의 컨디션 여하가 관객의 관람에 일말의 영향도 미치지 않게 하겠노라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냈다. 노래도, 연기도, 두 번은 없는 사람처럼.
2막은 특히나 어떤 기적 같았다.
자력으로 색을 입힌 목소리는 오색찬란했고, 손끝까지 ‘엘’로 채운 연기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사실은 연기라고 하기에는 무색할 정도로 엘 그 자체였다.
꼭 한 번은 묘사하고 싶었던 ‘야가미 국짱님’에서는 특히나.
“엘, 라이토가 얼마나 똑똑하고 정의로운 아인지 직접 보면 놀라게 될 거야.”
여지를 두지 않는 소이치로의 단언에 그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가소로움이 고스란히 읽혔다. 한쪽 입꼬리로 가만 비죽였다가, 반 바퀴 유려하게 몸을 틀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힌 브라우니 봉투를 낚아챘다. 그가 소이치로에게 건넬 때까지만 해도 반듯하게 각 잡혀있었던 봉투는 형체를 잃고 구겨진 뒤였다.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어요.”
봉투가 천천히 그의 눈높이까지 끌어올려졌다. 구겨진 것이 소이치로의 정면에서 다시 한번 파사삭 우그러졌다.
손안에서 가차 없이 구겨진 그것은 봉투인 동시에,
“야가미 국장님.”
어떤 믿음이기도 했다.
입학식에서의 첫 대면. 왼블에서는 길막 당시의 얼굴이 보여 좋다. 라이토를 측시하는 시선의 잘생김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선이 맞물리자 순순히 양보하는 라이토를 보며 그가 픽 웃었다. 노래로는 치고받는 중이면서 길은 순순히 비켜주는 태도가 의뭉스럽다는 듯이. 지독히도 유치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이미 아는데 겉으로는 점잖게 구는 모양새가 일견 완벽한 게 오히려 라이토의 약점이다. 그 전부를 간파한 엘이 어깨로 웃으며 라이토를 지나친다.
픽 웃는 얼굴도, 어깨 써서 웃는 태도도, 지나치며 어깨 너머 라이토를 곁눈으로 확인하는 얼굴까지도 전부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다. 주머니에 여유롭게 꽂아둔 손까지 완벽하다. 입학식은 원래 잘생김을 뽐내는 곳이었지, 그럼.
삼연의 놈의 마음속으로에서 가장 벅차오르는 순간은 후반부, 테니스 라켓으로 수평선을 가르듯이 두 팔을 펼치는 그의 동작을 따라 테니스 코트 바닥에 한줄기 여명이 밝아올 때. 노래와 배우의 동작, 조명의 삼위일체가 늘 정확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데, 가히 경계선 급의 짜릿함이다. 이 부분 어떻게 보도자료로라도 박제로 남았으면..
경기가 끝난 후에는 일요일부터 고은성 라이토와 자잘한 티키타카가 생겼다. 악수를 청해오는 라이토와 갑자기 묵찌빠로 아웅다웅.
개그는 전혀 모를 것 같은 캐릭터가 빤빤하게 애드립을 넣는 데서 오는 의외의 즐거움이 관객을 빵빵 웃게하는걸, 샤엘은 너무나 잘 살려낸다.
개밥쉰내도, 테니스 시합 전 준비운동도 마찬가지. 오늘의 발차기는 강홍석 류크와 경쟁이 붙은 나머지 유독 길어져 객석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흡사 끝나지 않는 발차기 있을까 수준으로 어찌나 오래오래 의욕적이던지. 그 와중에 조금의 휘청거림도 없었던 균형감각에는 감탄을.
“내가 정말 그런 살인마로 보여?”
“네.”
깜빡임도 없는 눈으로 단언한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대답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무거운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면서 웃음기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라이토!”
일생일대의 위기가 엘을 찾아왔다.
라이토의 반색보다 엘의 반응이 빨랐다. 커다란 눈동자가 허공에 궤적을 남기며 한 차례 또르르 굴러가고, 엄지가 입술 사이에 물렸다. 위기를 직감한 본능이었다.
왼블에서는 여기, 미사를 등 뒤에 둔 엘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게 정확하게 보인다. 덕분에 엘의 위기감을 즉각적으로 전해 받는다. 이 눈동자 움직임을 간직하고 싶었다.
미사를 겨냥한 오늘의 인사는 예쌈레디. 그의 계획대로 인파에 쫓겨가는 미사를 또 곁눈으로만 확인하며, 나 홀로 앵콜 안무를 톡톡 해 보이는 능청스러움이 좋다. 꼭 한 번은 쓰고 싶었어요.
생명의 가치, 미사 취조하는 엘은 삼연의 꽃이랄까.
소이치로가 평소보다 거칠었다. 꾸중할 것처럼(정말이지 삼연의 소이치로는 한참 어른이 한참 아이를 대하는 식으로 엘을 취급한다) 제 팔을 잡아끄는 손길이 무례하니, 홱 뿌리치는 엘의 동작도 자연히 커졌다. 벗어나 소이치로 반대편 무대 끝까지 종종종. 일순간 날을 잔뜩 세웠다가 한껏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 마치 제 영역을 침범당해 예민해진 고양이 같았다.
신기한 건 4월 후반 공연까지만 해도 엘의 인간성이 참혹해져 가고 있다고 느꼈는데 보다 보니 나의 역치가 낮아진 건지.. 이제는 성격 나쁜 건 잘 모르겠고 순수하게 눈 돌아간 엘과 함께 고조되어가는 내가 있다.
그럼 사신은? 라이토를! 돕고 있잖아요.
이 순간 어깨에 바싹 힘이 들어가는 게 엘인지 나인지 모를 만큼.
소이치로는 토요일에는 엘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더니 오늘은 무려 사탕 든 손을 꽉 쥐고 방향을 바닥으로 꺾어내리지 뭔가. 네 아무리 그래봤자 내게는 소용없다는 걸 어필하려는 의도 같았는데, 엘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밟히면 꿈틀은 하는구나 정도의 인상만이 엘의 얼굴을 스쳤을 뿐.
다이코쿠 부두에서의 마지막 순간. 14일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샤엘과 고은성 라이토의 주고받기가 있다.
“정의의 심판을 한 거야, 마치 신처럼.”
“유치한 살인마가 최후의 심판 놀이를 한 거겠지.”
원래의 각본대로라면 라이토가 먼저 힘주어 외치고 (마치 신처럼!!!!), 그에 대응한 엘의 느낌표가 빗발쳐 일어나야 하는데. 5월 14일의 엘이 이 대사에서 나직했던 걸 모니터해둔 걸까? 5월 15일 공연에서 고은성 라이토, 갑자기 문장에서 모든 느낌표를 소거하고 조용히 읊조리지 뭔가. 덕분에 받아치는 엘의 문장도 그 어느 때보다도 온전하고 고요한 온점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는 샤엘이 느낌표를 빼자 라이토도 힘을 빼고 소리의 균형을 맞춘 그림이 되었다. 상대역의 일거일동을 세심하게 존중해야만 나올 수 있는 밸런스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이 페어의 앞으로의 나날들이 무척 기대가 돼요.
그리고 최후의 순간. 명료하게 심장을 긁는 웃음소리와,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지난주 연이틀을 온점으로 맺었던 문장에 느낌표가 모두 되살아난 것을 보았을 때 마침내 실감했다.
2막 내리 생명력 가득한 모습을 보았지만, 변함없는 진실의 변함없는 열창을 보았고, 테니스 경기를 마친 직후부터의 숨 막히는 연기를 전부 보았음에도 비로소.
시아준수가 돌아왔음을.
기쁨이 심장을 휘감는 것은 찰나였다. 라이토가 죽어가는 무대 위에서 이미 잠든 모습을 눈으로 덧그리며 기도했다.
그의 무대를 사랑하는 신이 있다면, 그의 내일을 지켜주기를.
그의 오늘은 그 자신이 어떻게든 지켜내고야 마니까.
오늘의 그가 그러한 것처럼.
오랜만에 돌아온 김준수, 고은성 페어. 다이코쿠 부두에서의 읊조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신기하고, 놀라우며, 또 이제는 이게 오빠와만 맞춘 디테일인지까지가 세부적으로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