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아홉 번째 공연
오늘의 갈망은 프롤로그에서 시작됐어요. 싸움으로 번지는 아이들의 춤을 보면서 패싸움하던 시절의 토니가 너무 궁금해지는 거예요. 대체 에메랄드 놈들 박살 내던 토니는 어땠을까요? 이제 진짜 그만하고 싶은 토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시절의 토니가 너무 보고 싶어요. 병! 칼! 총! 하는 대단히 귀중한 찰나가 있다 해도, 이 갈망을 해소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걸요.
Something’s coming
우리 박자 타기의 달인. 오늘 유난히 오케스트라랑 엇갈려서 달리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걸 다 받아내다니요. 이 넘버는 참으로 신기해서, 애초에 가창자와 연주자의 박자를 다른 세계에 두고 쌍방의 부단한 노력이 있을 때만 비로소 합일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 같아요. 특히나 오늘은 유난히 그랬네요.
Tonight
돌아온 “나만, 보면, 돼.” ♡
또박또박 어절을 분리한 말투. 역시 저는 쉼표 있는 버전에 좀 더 심장이 반응하는 거 같아요.
난간에 기댈 때 오늘의 토니는 매우 귀여웠어요. 일반적으로는 상반신이 난간에 먼저 닿고, 팔꿈치가 난간에 맞게 굽혀지면서 몸을 기대는 자세를 완성하게 되잖아요. 오늘은 반대였어요. 팔을 아예 먼저 접고 난간으로 다가갔어요. 난간에 닿지도 않았는데 팔꿈치 고이 접은 자세는 다소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 엉거주춤의 찰나가 정말이지 너무나 귀여웠어요!
물론 또 금세 이케이케 팔을 난간에 대고 움직여 로미오의 그림을 완성해냈고요.
쇼노트에게 오늘도 고해요. 아름다움을 안다면 부디 이 장면의 토니를 유형의 기록물로 영원히 남겨줘요.
Cool. 중후반부, 바닥에 선명하게 드리워지는 하얀색 큐브 조명이 오늘의 개인적인 하이라이트였어요. 하얀 틀 안에 맞게 자신을 억눌러왔던 아이들이 기어이 큐브를 깨고 만개하는 순간이 참 대단한 장관이었거든요. 그래서 또 상상하게 되었어요. 틀을 깨는 순간의 토니는 어땠을까, 하고요. 프롤로그에서부터 차올랐던 갈망에 홧홧한 불을 지핀 구간이 아닐 수 없었어요.
닥 아저씨네 가게
요 이틀 병! 칼! 총! 삼연타를 들려주더니, 오늘은 다시 변화를 넣어주었어요. 삼연타 대신 “병! 칼! 그냥 총도 쏘지 그러냐.” 하고요. 그러냐~ 넌지시 물결을 타는 음성이 잘생겼어요.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잘생겼냔 말이에요.
여기서 대뜸 찡했던 순간이 있어요. 리프가 대화에 끼어드는 액션을 말렸을 때요.
“룰은 우리가 정해.”
리프의 ‘우리’에는 늘 언제나 토니가 있다는 거. 토니랑 리프의 우정은 이런 거예요.
“겁이 나야 되나.”
입술 비죽 접어서 대장 오리가 되는 입굴이 너무 귀여워요. 볼을 살짝만 찔러봐도 쁍 소리가 날 것 같은 귀여움이에요.
그리고요. 발끝 동동 띄워서 사뿐하게 퇴장할 때,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가 또 어쩌면 이렇게 잘생겼단 말일까요.
웨딩숍.
오늘의 대자점프. 붕 뜬! 기분은 유난하게 ‘부웅!’ 뜬 기분이 되었어요. 붕을 길게 늘여 느낌을 가득 살려주었답니다.
정유지 아니타는 토니의 대사를 받아치기만 할 뿐 점프 같은 행동까지는 굳이 따라하지 않기 때문에 토니가 아니타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시간이 김소향 아니타일 때보다는 훨씬 적어요. 즉 토니가 마리아를 마주하는 시간이 좀 더 넉넉한 편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오늘 아니타가 뭐라 하든 말든(ㅋㅋ) 곧장 마리아를 보고 꽁냥대기 시작했는데요. 보다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홀린 듯이 왼손으로 마리아의 볼을 꼬집으려는 거예요. 재밌는 건 한재아 마리아의 블로킹에 1차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곧바로 양손으로 2차 볼 꼬집기를 시도하지 뭐예요. 하지만 그마저도 양손 블로킹에 막히고, 볼 꼬집기 막고 막힌 게 무슨 세상 대단한 즐거운 일이었다는 양 둘이 마주 보고 꺄르르 웃더니! 토니,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양손을 높이 들어 마리아의 머리 위에 톡 얹는 거 있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요. 정수리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손길이 유리를 어루어만지듯 조심스러워서 어휴 그래 그렇게 좋으니 싶더라고요. 참나.. 귀여워서 봐준당..
The Rumble
아, 여기 토니를 붙들고 있는 친구가 디젤이었군요. 베르나르도를 단독 상대하기로 되어있던 그 덩치 큰 친구였어요. 그래서군요. 에메랄드 놈들 깨부술 때 토니 없었음 큰일났다 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라 묘사되었던 토니가 rumble에서 꼼짝없이 붙들려 있던 이유가 있었어요.
복수의 시간. 이야아! 오늘따라 푹찍의 기합이 엄청나서 살짝 웃어버린 건 토니에게 비밀이에요. 우렁찬 음성에서 살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이 순간 저 존재를 응징하겠다는 필살의 의지는 똑똑히 전해져서, 아 정말 지금 토니는 리프 이외의 다른 무엇은 전부 지워진 상태가 맞구나 싶더라고요.
이어서의 숨 막히는 연기. 싸늘하게 식어버린 베르나르도의 앞에서 주춤하더니, 자기 왼손을 들어 올려 보는 거 있죠. 멍하니, 안돼, 아니야 읊조리면서. 제 손으로 저질러버린 비극을 내려다보더라고요.
잠시 잠깐 왼손으로 떨어진 그 시선을 보는데, 데스노트 마지막 순간에서 자기 왼손을 내려다보는 엘 생각도 잠깐 나면서 세상에 어떻게 왼손 보는 연기도 세상 판이하게 감쪽같이 토니의 시선인지 감탄했잖아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깊이 꺼진 고개가 묵묵부답으로 참담하기에 오늘은 고개를 안 드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조명이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림처럼 느릿하게 얼굴을 드는 게 아니겠어요. 까맣게 화해버린 눈동자가 완전히 정면을 향하는 순간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어요.
토니의 눈에도, 토니를 마주하는 저의 눈에도 남은 것은 온통 어둠. 이제 이 극이 향할 미래가 우리 모두의 시야로, 일시에 스며든 거예요.
(김찬호 베르나르도에게는 오늘 좀 섭섭했어요. 이쁘장하게 생겼다고 대사를 아예 바꾼 게 아니었나요?)
이어서 2막. 마리아의 방을 찾아온 토니. 들어오기 전에 잠시 발코니에 서서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서 현실감이 느껴져서 좋아요.
Somewhere,
오늘은 또 문득요. 썸웨어의 날갯짓을 시작하는 첫 번째 요정이 치노 역의 배우라는 게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어요. 이것도 극이 의도한 부분인가요? 토니를 잡기 위해 벼르고 있는 치노가 또 한편에서는 ‘어딘가’에 도달하는 파랑새로 분해 보이는 것이요? 이 역설도 원작이 의도한 바가 맞아요? 원작이 의도한 바든 뮤지컬의 캐스팅으로 인한 우연한 역설이든, 오늘 유독 가슴을 두드리는 의미심장함이었어요.
그리고 뭐랄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어제는(12/7) 모든 것이 허상 같았거든요. 이 노래를 부른들 정해진 미래 앞에서는 다 무용하다는 생각에 꿈속에서의 낙원이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오늘은.. 썸웨어라는 어딘가를 본 것만 같았어요.
토니와 마리아가 ‘함께, 떠나’를 합창하는 막바지에 꼭 그 어딘가에 도달해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거든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근거도 없지만, 아, 그 어딘가가 존재할 수도 있구나, 하는 막연하면서도 강렬한 가능성이 오늘의 넘버에서는 느껴졌어요.
그래서 크게 답답하지 않았어요. 숨 막히게 안타깝지도 않았고요.
그저.. 닥쳐올 미래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 지금 이 순간 그 썸웨어라는 허구 같은 진실이 실재한다는 것만이, 중요했어요.
이 순간 서로의 온기에만 의지한 채 희망을 찾는 토니와 마리아도 그랬을까요?
마리아의 방, 오늘 토니는 푹잠을 잤어요. 어제는 바깥 소음에 일찍 눈을 떠서 창밖을 살펴볼 여유가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타가 문을 두드릴 때가 되어서야 겨우겨우 일어났어요. 두리번거릴 틈이 뭔가요. 들킬세라 호다닥 달려 나갔답니다.
Finale
“여기선 사랑하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대.”
어제 달랐던 느낌이 뭐였는지 정확하게 알았어요. ‘안 돼애’ 하며 어미를 투정하듯 늘리는 게 아니라, 체념하듯 툭 놓아버려요. 물 먹은 솜뭉치 같았던 질감이 파스스 흩어지는 모래성이 되었어요. 연약하고, 가냘프게요.
그 얼굴로 울면서 최선을 다해 웃어 보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아요. 노래의 문장 하나도 다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니까요.
그리고 이 둘의 참 ‘닮은 느낌’이란 걸 이제부터 실감해요.
토니에게 마지막 사랑의 인사를 전할 때 한재아 마리아 또한 안간힘을 다하여 웃어 보이거든요.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얼굴이 웃는 얼굴이기를 바라며, 안간힘을 다하는 그 마음이 정말로 닮았더라고요.
애써 애써 웃는 그 얼굴들을 때문이었겠죠.
커튼콜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함께 웃으며 퇴장하는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어요.
보고 나오는 길에 조용히 되뇌었어요. 웨사스란 극은 대체 뭘까요. 어쩌면 이렇게 마음을 울면서 웃게 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