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스물한 번째 공연
찡얼대기 여념 없는 리프와 닥 아저씨의 간판에 집중하고 싶은 토니. 이거 멋지냐는 질문으로 관심을 돌려봐도 크게 호응이 없자, 아예 간판을 리프에게 떠넘기며 말했어요.
“아, 들어 봐 쫌.”
얼결에 간판 든 남자가 된 리프는 또 속이 타죠. 중요한 건 간판이 아니라 결전인데 그걸 토니만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어김없는 동상이몽으로 두 사람이 티키타카의 막을 열었어요.
“내가 볼 땐, 걔 식단 조절해.”
베르나르도의 몸이 쩍쩍쩍 갈라지는 이유를 규명하는 토니.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 얹은 진지한 자세로 미간까지 모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뭐든 해야될 것 아냐.”
속 터지는 리프에게 토니가 선을 그어요.
“난 손 뗐으니까 너나 좀 해 봐.”
또 사고 치기 싫은, 인생 더 꼬이기 싫은 토니 마음을 리프만 몰라요.
Something’s coming
“혹시~”
도입부는 보통 손가락으로 허공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시작해왔거든요. 어느 날에는 왼손, 어느 날에는 오른손으로, 그러다 아주 간혹 양손으로요. 그런데 오늘은 시작하며 검지로 허공을 콕 찍지 뭐예요. 오른손 검지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딱 한 번 찍었을 뿐인데, 마치 버튼을 누른 듯 그 즉시 노래가 펼쳐지는 마법을 보았고.. 황홀하게 좋았어요. 앞으로도 종종 보고 싶을 정도로요.
또 하나의 손가락 마법.
“잔잔했던 파도가~ 벅차올라”
양손으로 물결을 가르는 것처럼 손가락을 챠르르 굴리는데 허어, 그 움직임이 곧 햇빛 속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물결인 거예요. 햇살이 하루를 마감하며 바다 위로 마지막 빛을 늘어뜨릴 때, 그 빛 아래에서 산란하는 물결이 토니 손가락에서 그대로 비추어졌어요. 마법처럼요.
이토록 놀라운 마법을 부리면서 토니 역시도 신이 났었나 봐요. 날아오르듯 코너를 돌다가 턱과 살짝 충돌했거든요. 일전에 한 번 그랬던 날처럼 오늘도 휘청하는 그 즉시 손으로 코너 짚고, 지탱한 팔을 회전축 삼아 몸을 돌렸어요. 엄청 멋있게, 맵시 있게요.
댄스파티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거 아니지?”
유독 또박또박, 부드러우면서도 상냥한 말투. 마리아와의 첫 만남에서 원래도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토니인데 오늘 특히나 사근사근했어요. 귀에 사르르 감기는 음성이 너무 소중해서 뭉클하고 말았을 정도로요.
마침 여기서 이지수 마리아도 대사에 강약을 섬세하게 주어서, 두 사람 나란히 서 있으니 정말로 풋풋하고 싱그러운 청춘이었답니다.
Tonight
마리아의 두 손 꼭 붙들고, 생의 첫 사랑고백 같은 입맞춤을 손등 위에 찍으며 토니가 속삭이기를.
“나만 보면 돼.”
이때 손키스 받은 이지수 마리아의 심쿵한 듯 멎은 얼굴이 항상 참 좋아요. 토니의 입맞춤이 지나간 자리를 뚫어져라 보다가, 속삭이는 음성에 고개를 들면 그 눈가에는 토니를 향한 별빛이 가득해요. 이미 토니가 그러하듯이요.
별빛과 달빛, 이 밤에서 빛나는 건 모두 품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투나잇. 아름답지 않을 도리는 없어요.
“토니는 어떤 이름의 줄임말이야?”
아직도 6일의 그윽했던 안톤을 잊을 수가 없는데, 오늘은 또 새로운 버전이 왔어요.
“안톤?”
아니, 어미가 부드럽게 말려 날아가면서 나름의 물음표가 되지 않았겠어요? 이런 톤은 처음이라 신선했어요. 또 들을 수 있을까요?
닥 아저씨네 가게
“아저씨이!”
웃음기 완연하게 머금은 우리 토니 목소리. 한껏 신이 나서 팔랑팔랑 날아왔는데 가게에 흉흉한 분위기가 가득하니 차게 식을 수밖에요.
“병! 칼! 아니 그냥 총도 쏘지 그러냐.”
비겁하다는 힐난을 던지니,
“누가 비겁하다는 거야!”
액션이 발끈해서 끼어들어요. 그런 액션을 빤히 보고 토니가 눈으로 말해요. 바로 너라고.
무언의 대답이 어찌나 소리 없이 단호한지 액션의 말문이 탁 막혀버렸지요.
“정정당당히 해.”
토니의 제안에 리프가 토니와 마주 봐요. 잠시간의 눈빛 교환. 무언의 합의가 오가고 리프가 베르나르도에게 시선 맞추면, 그 모습에 토니가 고개를 끄덕여요.
“정정당당히 하자.”
원래부터 그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베르나르도에게 리프가 악수를 청하자 씩 웃던 토니 얼굴 시원시원하게 아름다웠어요.
이어 에이랩 귀를 살펴주던 상냥한 우리 토니.
그런데요. 샤크들이 휘파람 불며 나갈 때 저번부터 도대체 에이랩과는 무슨 말을 속닥이는 건지 궁금해요. 입 모양 읽어주실 분 구해요.
슈랭크 경위의 깽판. 토니, 눈 막고 귀 막은 채로 환멸을 견뎌요. 와중에 잠시 바짓단을 정돈하기도 하더라고요. 왼쪽 오른쪽 번갈아 한 번씩, 바짓단이 애꿎게 팔랑이는데..
“다 나처럼 되는 거야.”
이게 무슨 소리람. 슈랭크 경위의 등 뒤에서 토니가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어요. 과연 그럴까? 하듯이요.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닥 아저씨도 거들죠. 난 너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면서요.
웨딩숍
한 손씩 번갈아 마리아의 볼을 향한 검지 콕이 무위로 돌아가고, 마리아에게 양손이 잡혀버렸거든요. 근데 글쎄, 양손 꼬옥 잡힌 채로 두 손을 방방 대는 토니를 보았어요. 죽었어요.
“우리 엄마는 널 보면 이것저것 물어볼 거야. 교회는 다니냐~”
하는 마리아 말에는 두 손을 꼭 맞잡고 되뇌더라고요.
교회? 교회! 접수 완료한 것 같은 토니를 보고 있으니 교회는 아직 안 다니지만, 후하 후하 깊이 심호흡하듯 되뇌는 그 비장함으로 보건대 앞으로는 이유 불문 다닐 예정이겠다 싶었어요. 어머니가 메카에 있더라도 토니는 예루살렘 방향으로 몸을 누일 기세였거든요. 그게 참 너무 귀여웠지 뭐예요. 가까운 시일 내로 성호 따라긋는 토니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Ond Hand, One Heart
마리아가 약속의 반지를 끼워줄 때, 감격하여 차오르는 토니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동그란 코끝이 더 동그랗게 뭉치고, 윗입술은 감격으로 살포시 솟아올라요. 참.. 샤토니는 어떻게 행복을 이렇게까지 형상화할까요?
원핸드에서 펼쳐지는 천상의 런웨이 끝에서는요. 토니의 눈 안에 세상에서 사랑이라 부르는 반짝이는 모든 것이 녹아있어요.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싶은데,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어요.
이 눈빛을 영구히 간직하고 싶어요. 쇼노트.. 들려요? 걸어 나오는 구간은 왼블에서, 멈추어 서서부터는 오블에서 담아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런데요. 원핸드에서 두 사람 각자 헤어지잖아요. 바래다주지는 않는 건가요? 아니면 바래다주었는데 극에서의 표현이 생략된 것일까요? 그러기에는 토니가 웨딩숍 문을 열고 나가며 빠삐하는데.. 마리아는 퇴근하지만 토니는 잡화점 일을 마무리하고 공터로 가야 해서 각자 갈길 간 걸까요? 한시라도 더 붙어있고 싶을 두 사람이 너무 산뜻하게 웨딩숍에서 빠삐한다는 점이 의외의 쿨함이라 매번 조금씩 갸웃하게 돼요. 바래다 줄 시간까지는 없는 짧은 시간 사이에 짬을 내어서라도 마리아를 만나러 온 거라면, 이해는 가요.
Tonight (Quintet and Chorus) 을 만나 대체 어떻게 이런 극이 있는지.. 감격하고 나면, 이제 1막의 종착점이에요.
The Rumble. 노래가 없어 넘버라고는 할 수 없는 이 '장면'을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야, 싸우기 싫어? 싸우게 만들어줄게.”
베르나르도의 도발이 거의 성공한 줄 알았어요. 목덜미를 챱 내려쳤을 때도 참고, 밀쳐졌을 때도 불끈 주먹 쥐었던 걸 참아낸 토니가.. 베르나르도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들이받았을 때 유달리 길게 침묵했거든요. 말없이, 물끄러미, 주먹이 쿵 치받고 지나간 가슴을 내려다보는데.. 안간힘을 다해 화를 눌러 담는 게 눈에 선한 거예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져가는 혼란 속에서 자신의 평정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토니가 얼마나 대견하던지요.
그런 노력에 아랑곳하지 않은 비극 후,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를 찾을 때, 입 모양이 네모꼴로 내려앉으며 유난히 어린아이 얼굴이 되는 거.. 이건 사실 샤토니의 연기 반, 그 생김새 반이 이루어내는 조화잖아요. 근데 이마저도 너무나 운명적으로 천재적인 연기 같아요. 가장 여리고 가장 처절하면서도 끝없는 비통함을 표현하기에는 어린아이 얼굴만 한 게 없잖아요. 그게 이 순간의 샤토니 안에 있어요. 우리 연기 천재는 생김새마저 천재적인 거예요.
“아니게 해주세요, 제발..”
마리아의 애원이 울려 퍼지는 방. 그 안에 피 묻은 행색으로 나타난 인영. 토니예요.
차라리 절 죽여달라며 절망하는 마리아의 등 뒤에 덩그러니 토니가 서 있어요. 마리아, 부르지도 못하고 옷깃 쥐어뜯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토니.
“살인자, 살인자!”
자신을 향한 원망과 분노를 저항 없이 다 받아들이며 그저 서 있어요. 묵묵히 다 감내하다가 처음으로 하는 말이 ‘미안해’예요.
나비처럼 나풀대는 사랑해를 연발하던 그 입술로 이제는 천근만근처럼 무서운 사죄의 단어를 꺼내야 하는 거예요. 이 순간 토니의 심정을 어떻게 다 헤아릴까요..
하나 더 있어요. 토니의 살인에서 이미 발밑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는데, 거기에 오빠까지 누군가를 죽였다? 어리고 여린 가슴이 그 충격을 다 감당할 수 있을까요?
베르나르도가 리프를 죽였을 때, 까지 말하고 나서 굳어버린 마리아에게 차마 시선 두지도 못하는 우리 토니예요. 바닥에 떨어진 시선이 정처 없이 배회하며 누구도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해요. 자신의 혼란과 마리아의 충격을 모두 감당해야 해요. 그래서 떠나야만 했어요. 어딘가로, 어딘가든.
Somewhere
“함께, 떠나, 함께.”
썸웨어의 이 가사에 이르렀을 때, 삼삼오오 군집하기 시작하는 제트와 샤크.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곳으로 ‘함께 떠나는’ 것이 모두의 갈망이라는 걸 알게 해요. 그 틈에서 아이들 얼굴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 나오는 토니 모습이 얼마나 마음을 일렁이게 하던지.
하필 또 오늘 유독 어딘가로의 ‘어’를 너무 고풍스럽게 부르지 않겠어요..?
그토록 아름다운 어딘가가, 부디 토니의 손 닿는 곳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우리 토니를 위해서요.
Finale, 마리아의 품 안에서의 첫 대사.
“니가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오늘, 토니… 입안에 공기를 가득 머금고서는 문장 전체를 같은 숨 안에서 버겁게 쏟아냈어요. 어미로 갈수록 옅어지면서 날아가는 목소리가 문장을 그냥 흘려냈어요. 물이 가로 새듯, 소리가 새어나갔어요.
그 톤에서 생이 꺼져가는 중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선연한 거예요.
지켜보는 저도, 토니와 눈 마주하고 있는 마리아도 생생하게 느꼈어요.
아, 토니가 죽어가고 있구나.
사랑이 여기서 지는구나, 하고요.
죽음이 드리우는 감각을 손으로 만져본 것만 같았어요. 도대체가 죽는 연기를 이렇게까지 잘할 일일까요?
온 마음으로 토니로 살다간 시아준수를 만난, 또 하루였어요.
막공 즈음 깨달았던 것. 원핸드 부르며 왜 안 바래다주는지, 어쩜 저렇게 결혼식만 홀랑 마치고 쿨하게 각자 갈 길 가는지 갸웃했는데 아니타가 기다리고 있어서 그랬다는 걸 김소향 씨가 딱 15분 준다 무척 강조하셨던 날에야 깨달았다. 오빠 얼굴이 눈앞에 있으면 대사를 이렇게까지 흘려듣는구나 싶어서 반성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