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샤토니 스무 번째 공연

 

뱃속부터!

그래도 늘 첫 번째 구호는 별말 없이 받아주는 토니였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부터 만만치 않았어요. 

불끈 손바닥 내미는 리프를 향해 ‘하지 마’라며, 나직하게 엄포했거든요. 물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리프의 장단에 결국은 맞춰주었지만요. 

 

“너 없으면 진짜 안 돼.”

리프가 절실한 만큼 토니도 완강해요. 아무렴, 더는 사고 치지 않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은 토니니까요. 제 옆으로 바싹 붙어 앉는 리프를 피해 몸을 슬쩍 빼는데,

“어디 가.”

그런 토니를 놓칠세라 리프가 또 바짝 따라 앉으며 아예 어깨동무까지 걸어요. 

“왜 이래 이거.”

제 어깨에 얹힌 리프의 팔 한 번 리프 한 번 보고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토니가 훌쩍 일어나 버리면, 덩그러니 남은 리프가 반쯤은 시무룩하게 또 반쯤은 오기로 똘똘 뭉치고요. 

 

오늘 가장 새로웠던 건 토니의 반허락에 가까운 질문이 떨어졌을 때예요. 

“몇 시?”

오매불망 기다렸을 게 분명하면서 리프가 글쎄 튕기는 거 있죠. 

“됐어.”

툴툴대는 뒷모습을 잠시 말없이 보는 토니와 등 돌린 채로 나 삐졌다는 분위기를 모락모락 풍기는 리프의 대치는 또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보는데, 우리 마음 약한 토니가 한 수 더 물러주었어요. 

“..왓 타임.”

그것도 영어로요.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열시라 대답하는 리프의 얼굴이 해맑기 그지없었어요. 허탈하게 웃는 건 토니의 몫이었지요. 

 

그리고 대망의 뱃속부터!

“이거 싫어하지 참.”

먼저 시작해놓고 금세 철수하는 리프를 토니가 불러 세웠어요. 

“야, 야! ..뱃속부터.”

물끄러미 돌아보는 리프를 향해 이번에는 토니 쪽에서 태세 잡고 선창해 보였는데, 리프가 또 딴지를 걸지 뭐예요. 

“뭐라고? 잘 안 들려.”

결국 토니는 목소리 키워 한 번 더 선창해야만 했어요!

“뱃속부터!”

죽든 살든 얍! 

왓타임부터 잘 안 들린다까지,

“아 튕기네..”

꼭 한 번씩 튕겼던 리프와 그걸 또 받아주는 오늘의 토니였어요. 

 

 

Something’s coming

와, 6일도 그렇고 요즘 무슨 일이지요. 노래 안에서 오케스트라가 태동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나요? 노래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박자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모습은요? 요즘 이와 같은 광경을 만나요. 노래의 박자가 쪼개지면 오케스트라도 함께 급물살을 타고, 노래가 나긋해지면 오케스트라도 함께 온화해져요. 지휘하는 개념과는 또 달라요. 이건 마치..

왜, 사람의 눈이 담을 수 있는 영역을 가시범위라고 하잖아요. 딱 그처럼, 노래의 허용범위 안에서 오케스트라가 존재하는 것 같았어요. 이런 마법은 대체 어떻게 부리는 걸까요?

 

 

Maria도 마찬가지예요. 요즘 Maria에서 목소리와 오케스트라가 이루는 앙상블의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게다가 ‘마리아’를 어쩌면 그렇게 ‘부를 수’ 있는지. 

“끝없이 널 불러 마리아.”

특히나 여기요. 

마리아를 부드럽게 흩트려내는 날이 있는가 하면 견고하게 심장에 박아두는 날이 있는데 오늘은 후자에 가까웠어요. 마리아라는 이름을 심장에 조각하는 소리가 바로 이것일 거예요. 

 

 

Tonight

“널 만난 오늘 밤, 놀라운 세상이 태어나.”

난간에 혼자 남은 토니는 항상 감탄을 불러일으켜요. 양팔에 무게중심을 실어 꿈꾸는 자세로 기대어서는 두 눈 반짝이는 얼굴, 그 뒤로 함께 명멸하는 공동주택의 불빛들. 어둠이 내린 밤에서 어떻게 이렇게 반짝이는 것들 투성이인지 알 수 없어요. 그야말로 놀라운 세상이에요. 장미꽃과 함께 브라보를 외치듯이 저 발코니를 향하여 제 심장을 던지고 싶었어요. 지금 제 눈앞의 토니에게서 저의 가장 놀라운 세상이 태어난 것이니까요. 

 

“부에나스 노체스.”

마리아의 밤 인사에 토니는 고백으로 화답해요. 

“응, 사랑해.”

나풀나풀 날아가는 사랑해의 목소리가 꼭 나비 같아요. 사랑을 나비 날개에 띄워 보내는 사람이 있다? 그건 바로 토니예요.

 

“떼아도로 마리아.”

6일에는 ‘안톤’이라는 풀네임을 알려주며 세상 가장 그윽한 여운을 남겼지요. 오늘은 ‘마리아’를 세상 가장 따듯한 음성에 실어 보냈어요. 사랑이 뭔지, 알 수밖에 없게끔요. 

 

참 그리고요. 

“잠깐만, 우리 언제 다시 만나?”

오랜만에 만나는 한재아 마리아. 한재아 마리아는 늘 토니가 사다리 타고 내려가는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가 불러세워서, 저만치 아래까지 내려갔던 토니가 도로묵하듯 다시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오늘 참 오랜만에 타다다닥 타고 오르는 그 모습을 봤네요. 다람쥐보다 날쌘 토니가 얼마나 심장 아프게 귀여운지 몰라요. 

 

 

닥 아저씨네 가게

맨손으로 정정당당히 하자는 토니를 저 멀리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분이 계세요. 닥 아저씨요. 갑자기 정정당당 어쩌구하는 속내가 의뭉스럽기는 하지만 동시에! 친구들을 그렇게 이끌어가는 노력이 대견한 듯 표정이 풀어져 계시더라고요. 슈랭크 경위 같은 어른도 있지만 이렇게 뒤에서 묵묵히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어른도 있어요. 그런 시선이 하나라도 토니 곁에 존재한다는 게 찰나의 위안이 되었어요. 

 

그리고요. 아저씨네 가게에서 마리아의 웨딩 가게로 장면 전환이 될 때요. 흘러가는 뉴욕의 배경이 왜 이리 애틋한지 모르겠어요. 토니와 함께 마리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일까요? 토니 마음에 저도 올라타서 덩달아 날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요. 

 

 

The Rumble

토니가 건네는 악수에 베르나르도가 코웃음을 쳐요. 

“싸움은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아.”

이 말도 베르나르도에게 닿지 않고요.

안타까웠던 건.. 사실 이 말, 마리아가 토니에게 한 말이잖아요. 어떤 싸움도 우리에게 좋지 않다는 마리아의 염려를 수용한 토니가 자신과 마리아는 물론 제트와 샤크 모두의 마법이 되어주려고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결과적으로 마리아의 바람이 곧 토니의 노력인 건데 증오에 눈멀어 그걸 몰라주는 오빠예요. 제 동생의 영혼이 토니의 영혼을 타고 모두를 위한 마법이 되어주러 온 것도 몰라봐요. 

 

게다가 김찬호 베르나르도, 6일부터 자꾸만 토니 목덜미를 아주 챱 소리 나도록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게 아니겠어요? 손바닥 안에 공기를 가득 실은 덕에 가격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했어요.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지다 못해 흉흉해지고 토니도 잠시 말을 잃어요. 화를 꾹 눌러 담는 게 토니 얼굴에서 보여요. 토니가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제트나 샤크나 할 것 없이 흥분하여 공터는 점점 소란해지고 베르나르도는 또 한 번 토니를 향해 손을 올리는데,

“하지마.”

더 이상의 무례가 저질러지기 전에 토니가 그 팔뚝을 잡아채고 말해요. 베르나르도와 거리를 확 좁혀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경고하죠. 나직하지만 엄중하고도 서늘한 경고였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어요. 누르면 솟아오르는 스프링처럼 베르나르도의 도발은 멈출 줄을 몰라요. 

 

말귀가 통하지 않는 베르나르도와 대화 시도하라, 임계점에 달하는 리프 진정시키랴, 덩치로 밀고 들어오는 디젤에게 부디 ‘참아’ 하고 가라앉히랴.. 

(욱하며 앞으로 나서는 디젤의 가슴을 도독도독 눌러 진정시킬 때, 아주 정확하게 ‘참아’하는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나왔어요. 요 며칠 계속 약하게 마이크를 타던데, 계속 이렇게 작게나마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가 저 스스로도 욱해서 주먹 발끈 쥐었다가 가까스로 삭이기까지..

 

매일 매일 참 고군분투하는 토니가 오늘 특히나 짠하고도 찡했던 장면이 있어요. 

“됐어.”

됐다는 토니 한 마디에 우르르 발끈해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리프도 제트도 다 같이 토니에게 상황 맡기고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걸 보면서 토니가 얼마나 신뢰받는 리더였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리프가 판을 깨기 전까지, 설령 뒤에서 아우성을 지를지언정 제트의 누구도 난입하지는 않아요. 당장 이해는 안 가도 토니를 믿고 지켜보는 거예요..

 

그랬는데.. 

 

산산이 깨진 판. 다 부서진 노력. 정택운 리프가 힘겹게 생의 마지막 말을 남겨요. 토니 품 안에서, 

“괜찮아, 괜찮아.”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제트 모두가 혼이 쏙 나간 눈으로 리프의 고개가 툭 떨구어지는 모습을 지켜봐요. 이게 현실인지 장난인지조차 채 분간이 안 되는 찰나, 이성에 앞선 본능으로 토니가 베르나르도를 향해 돌진해요. 

 

벌어질 불행이 모두 들이닥친 직후에야 돌아온 이성, 토니가 극렬한 분노 안에 파묻혔던 이성을 건져 올린 것처럼 퍼뜩 고개를 들어요. 자기 품 안에서 죽은 리프 한 번, 제 손으로 죽인 베르나르도 한 번씩 번갈아 보는 고개의 혼란함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제 손으로 망쳐버린 게 제트인지 샤크인지, 마리아인지 자기 자신인지 특정지을 수도 없어요. 

그 순간 토니의 모든 혼란함과 좌절은 그저 단 하나의 이름이 되어 흘러요. 

 

마리아, 하고요. 

 

 

저는 1막이 차곡차곡 쌓아 rumble에서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이 서사가 왜 이렇게 숨가쁘게 좋을까요. 

촘촘하게 서사를 쌓아 올리는 극 자체가 가진 힘도 있을 테지만요. 반짝이는 순간은 누구라도 알 수 있게끔 가장 반짝이도록 표현하고, 거의 다 가졌던 행복이 자기 두 손안에서 망가져 버린 이후의 처참함은 가히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토니를 만나는 하루하루가 경이로워요. 

 

이따금 토니 안에서 엿보이는 볼프강스러움을 느낄 때면 경이는 곱절이 돼요. 그 어렸던 천재 소년이 이제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고전이 되었어요. 

 

메일 밤 아름다운 음악, 자생하는 각본 위에서 13년 동안 한결같은 열정을 간직한 배우가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만나요. 2023년 서울의,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서요. 

 

아, 세상 모두가 이 행복을 누리길 바라요. 진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