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니 서른네 번째, 그리고 웨스트사이드스토리 100회차 공연.
2월 11일, 토요일. 뮤지컬의 계절에서 꼭 한 번씩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이 더없이 완전하게 조화로운 공연. 후일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추억할 때 반드시 떠올리게 될 ‘단 하루’의 공연이 왔어요.
오프닝부터 럼블, 썸웨어와 피날레까지 어느 하나 완전하지 않은 장면이 없었어요. 숨 가쁠 정도의 흡입력으로 관객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던 럼블은 물론이고(아니 어떻게 이렇게 불행으로 치닫는 단계단계가 명확하면서도 섬세한 거죠? 샤토니 연기 기승전결 뭐예요. 배우들 합 뭐예요.) 이제는 확신의 ‘그곳으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샤토니의 썸웨어, 눈물과 열연의 피날레까지 모조리 다요.
와중에 극을 행복하게 채워주는 엄청난 애드립들도 있었어요. 오늘은 이 두 가지 애드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웨딩숍부터요.
오빠가.. 토니가 쿨을 췄어요. 쿨의 줄넘기 동작을요! 하루 종일 온몸이 공중에 붕 뜬 기분이라면서! 자세 깊숙하게 낮추고 앞뒤로 줄넘기 동작을 하는 토니를 목격하는 순간의 전율이란.. 역시 바라면 다 이루어주는 시아..♡
감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토니가 쿨 추는 맵시를 가만 보던 김소향 아니타가 앵콜을 요청한 거예요. 나직하게 딱 두 마디로.
“맘보도 춰 봐.”
느닷없는 주문에 토니가 일단 갸웃했어요.
“마, 맘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눈알만 굴려 아니타를 힐긋대니 돌아온 건 엄격한 시작 구령이었고요.
“맘보, 시-작!”
물릴 수 없어졌다면 즐길 수밖에. 상황 파악을 끝낸 토니, 이내 목 한 번 자세 한 번 가다듬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와서 짠. 샤크 군단 위용찬란 파트로 짠. 그 단 몇 초의 맵시란. 단 두 차례의 땜삥감이란. 맛보기 동작에도 영혼이 실린 댄스 자아. 아, 역시 바라면 다 이루어주는 사람. 청하면 외면하는 바 없고, 무대 위의 염원이라면 무엇이든 현실로 데려와 주는 사람. 괜찮았다는 아니타의 평에 그라시아스! 하고 활짝 웃는 토니를 따라 모두가 함께 웃었어요. 오늘의 모든 행복을 쏟아부은 듯한 순간이었어요.
..라고 썼지만, 그거 아세요? 시아준수의 공연에서는 행복이 절대 한 곳에서만 피어나지 않아요. 지니가 세 가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처럼, 시아준수는 언제나 여러 겹의 행복을 두 팔 가득 안겨줘요.
그러니까 이제 오늘의 또 다른 행복에 대하여 말할 차례예요. 오프닝에서부터 대문자 제이 사랑단의 마음을 한껏 뒤흔들어 놓았던 토니의 이야기요.
“임마! 너 소속이 없으면 그냥 고아야. 비빌 언덕이 있어야지.”
리프, 특히 배나라 리프의 속사포 투정이 쏟아지는 구간.
“제트가 그냥 비빌 언덕이야?!”
원래 이 대목에서 토니는 진지한 내심으로 리프의 말문을 막곤 했어요. 또 사고 쳐서 인생 꼬이는 거 싫다고, 이젠 진짜 그만하고 싶다고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어요. 여러 말을 대신한 단 하나의 동작이 왔거든요.
대문자 제이 정신의 정수, 핑거 스냅이요.
코앞으로 들이밀어진 스냅에 리프가 속사포 페이스를 잃더니,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어요. 시끄럽던 무대가 일순간이나마 소강된 건 모두 핑거 스냅의 덕이에요. 토니가 효과 좋다며 감탄할 만큼의 위력이었어요.
위력은 관객에게도 발휘되었어요. 토니의 핑거 스냅과, 그 스냅으로 서서히 진정되어가는 리프에게서 제트의 역학적 관계가 온전하게 정립되는 듯한 짜릿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거든요.
극에서 제트에게 쿨의 기치를 학습시키는 이는 리프 혼자지만 대사로는 항상 토니와 리프가 함께 제트를 만들었다고 언급되잖아요. 토니 스스로도 ‘우리가 제트를 처음 만들었을 때의 그 느낌?’이라 말하고요. 하지만 반복되는 대사에 그칠 뿐이고, 실제로 관객이 목격할 수는 없었어요. 제트였던 시절을 청산한 게 토니의 캐릭터성이니까요. 때문에 관객은 아무리 염원해도 뮤지컬에서 제트와 함께 쿨을 추는 토니를 볼 수가 없는 것이고요.
그래서 늘 허기가 졌어요. 공연을 거듭하며 토니가 잡화점에서 핑거 스냅을 두어 번 하게 되었고, 샤크와 싸움을 앞두고 리프를 눈빛만으로 설득하는 디테일이 추가되었지만 현역 제트일 수는 없는 토니의 캐릭터성 탓에 어딘가 항상 목이 말랐어요. 토니가 직접 쿨을 출 수는 없더라도, 그에 견줄 수 있는 강력한 한방을 매번 갈구했어요.
오늘 같은,
오프닝에서 토니가 리프를 진정시키는 핑거 스냅 같은 것을요.
오늘의 스냅은 잡화점에서의 핑거 스냅과는 같은 듯 달라요. 극 안에서 핑거 스냅은 항상 리프로부터 발하여져서 제트에게 전파되는 제트의 상징이에요. 리프는 언제나 스냅의 시작점에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리프에게서 제트로 이어지는 역학 구조의 최상위에 토니가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명징하게 보여주었어요. 리프를 핑거 스냅으로 진정시키는 것으로요.
해묵은 목마름이 제트의 핑거 스냅을 더할 나위 없는 적소에 첨가해 넣는 것으로 일시에 해소되었어요. 온몸으로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함에 전율했어요.
이 얼마나 천재적인 애드립인가요. 제트에서 손 털고 싶은 토니의 현재를 해지지 않으면서, 제트였던 토니의 면면을 동작 하나만으로 눈앞에 끌어와 준 거예요. 토니와 리프, 제트의 역학 관계까지 명료하게 규명하면서요.
이 사람을 천재가 아니면 뭐라 할까요.
더불어 이 사람을 어떻게 단지 천재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일면적인 단어 하나로만 말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사람이에요. 무대 위의 시아준수는요.
오늘의 공연 또한 그래요. 오늘의 관객이 만난 것은 그저 웨스트사이드스토리라는 뮤지컬만이 아니에요. 오늘의 무대 위에는 무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애드립에 진심일 때, 더불어 새롭고 참신한 걸 못 견디게 사랑할 때 가능한 모든 순작용이 있었어요.
웨딩숍에서도, 오프닝에서도.
결국 시아준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관객을 행복하게 해주고, 나아가서는 관객의 염원을 이루어주며 극의 서사까지도 보태어 채우는지를 만난 하루였어요.
2월 11일, 100회차를 맞이한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는 이 시대의 선물 같은 배우가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