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들어 올린 후 그와 함께 걷는 몇 걸음 동안의 웃음이 점점 분명해진다. 멈추어 서서 정면을 보면서는 꼭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울음기 짙은 얼굴의 울먹거림은 어쩔 수 없지만, 울음의 사이를 웃음이 헤집고 들어오며 반짝거렸다. 
심지어는 힘겹게 오른 바위산의 정상에서도 웃었다.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와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썹은 결연했지만 동시에 희망으로 반짝반짝했다. 이별 앞에 울었지만 슬픔은 그를 잠식하지 않았다.
오늘의 그는 곧 이어질 다음을 향한 준비가 모두 되어 있었다.

그간의 엔딩에서는 미래를 향한 희망을 보았지만, 오늘은 아더가 새로이 펼쳐나갈 미래의 모습이 훤하게 보였다.

 

*

공연적으로는 자잘한 실수가 겹쳐진 하루였다. 음향은 가득 물을 먹어 먹먹했고, 모든 배우가 릴레이로 실수를 주고받았다. 신영숙 모르가나는 대사를 거듭했고ㅡ자연의 신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어, 대신할 수 없어. 이지훈 랜슬럿은 대사를 아예 바꾸어 버렸다ㅡ수치스럽게 죽느니..

그리고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멈추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시아준수가 뮤지컬 극장에 오른 이래, 내가 그의 청중으로 있었던 10년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었다. 라이브 공연에서 배우와 오케스트라의 박자가 어긋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서로의 박자가 어긋났다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아예 멈추어 공연장 안의 모든 소리가 음소거 되어버리는 현상은.. 충격적.. 아무튼..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E구역.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시작과 함께 E를 향하여 달려오는 결의 어린 얼굴을 예고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을 만큼.

 

E의 시야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정말로 좋았던 순간은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이 곡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노래였던가. 이 곡이 선사하는 시각적 황홀함이 이랬던가.
얼핏 멀린의 시야였다. 왼블 쪽을 향하여 몸을 내디디며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아더의 옆얼굴을 보게 되는 각도였다. 반쯤은 무대 위 세상 속의 그가, 나머지 반쯤은 그 앞에서 고요에 잠긴 객석이 한꺼번에 보였다. 검푸른 배경 속의 아득한 그 옆모습을 향하여 푸른 조명이 찬란하게 부서져 내렸다.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푸른빛을 향하여 선 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 앞의 펼쳐진 길이 나의 운명이라면 난 왜 저 거대한 바위가 두려울까. 
모든 의심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물음을 거듭하며 점차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굳혀가는 손이 주먹을 쥐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노라는 지점에서는 검푸른 회오리가 그의 손을 따라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단단한 소리기둥을 타고 그의 전신을 휘감는 검푸른 불꽃을 보았다. 성큼성큼 뛰어오른 바위산 꼭대기에서 공간의 구석구석을 채워 넣던 소리가 얼마나 특별했는지. 소리를 버팀목 삼아 딛고 일어나며, ‘내’ 용기를 다 끌아모아ㅡ도약하던 아더가 얼마나 대견하였는지. 이 넘버를 위해서라도 E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E에서 본 것, 멀린에게 쏘아붙일 때의 얼굴들. 특히 ‘흑마법과 속임수의 결과’라며 일갈할 때의 분노에 찬 얼굴. 멀린이 보는 얼굴은 이랬구나. 정면의 두 눈동자가 이렇게나 또렷하게 이글이글하였구나. 경악과 혼돈이 뒤섞여 예민하게 날선 눈썹이 이랬었구나. 
한 차례의 입 모양도 읽힌 것 같았다. 낯선 이의 등장에 아직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아버지에게 ‘아는 사람이에요?’

 

〈검이 한 사람을〉. 랜슬럿의 가사ㅡ‘그저 어린 소년일 뿐인데’ 대목에서의 아더, 정말로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엑스칼리버를 연신 들여다보는 얼굴이 그랬다.
랜슬럿의 기사 서임 장면은 오늘로써 세 명 모두를 주의 깊게 보았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랜슬럿을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는 아더에게 제 어깨를 툭툭이며 서임에 대하여 알려줄 때, 박강현 랜슬럿은 무심하고 이지훈 랜슬럿은 한번 피식 웃을 뿐이다. 엄기준 랜슬럿이 유일하게 형처럼 스윗하여 넋 놓고 있다가 아차, 하는 아더의 표정과 제일 잘 어울린다. 그때 참 보기에 좋아.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오늘의 귀여움. 아버지가 건네준 칼을 뽐내느라 귀 기울이는 자세를 취할 시간이 없었다.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여 검으로 포즈를 잡는지, 내가 기네비어였다면 민망함도 잊고 귀여워서 계속 보았을 것.
그리고 세상에. E에서 보게 되는 얼굴ㅡ정면에 가까운 얼굴이 정말이지 너무 황홀하다. 기네비어, 그러니까 오블쪽으로 향하는 얼굴을 거의 정면으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이 넘버 자체를 마치 새로 보는 것만 같았다. 기네비어의 한마디 한마디에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다 소리 없이 정답게 웃는 얼굴, 입가로 푸슬푸슬 피어나는 호감, 그녀의 동선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윤이 나는 피부. 그야말로 새로운 시야, 완전히 새로운 느낌. 비로소 베일을 벗기고 이 순간의 아더를 온전히 본 것만 같은 감각이 신선하여 즐겁기까지.

 

〈이렇게 우리 만난 건〉. E의 각도에서 몰래 보는 얼굴도 샅샅이 볼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훔쳐보는 얼굴이 이렇게 무해하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어? 무구한 얼굴이 생글생글. 호기심을 품고 반짝반짝.
기네비어 앞에서 아무 말로 상황을 무마할 때의 대사는 오늘은 존댓말이 되었다. ‘왔다고 들었습니다.’
이어 랜슬럿의 무례를 그야말로 온얼굴로 말리는 순간의 아더는 정말 너무 귀엽다. 예쁘게 생겨서는 언행도 선하기까지 해. 단번에 호감을 꿰차는 얼굴이야.
그런데.. 글쎄 오늘 목검이 부러졌다. 검이 똑 부러지는 순간 살짝 부풀며 경악하는 아더의 눈동자에서 ‘아니 저렇게까지 진심이라고?’ 갸웃하는 빛을 보았다.
노래가 시작하고서는 E에서는 거의 내내 뒷모습이라 오늘은 기네비어의 표정을 아더의 뒷얼굴 너머로 함께 보았는데.. 민경아 기네비어는 사랑에 빠지는 걸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고 있었다. 아더에게 끌리기는 하지만,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를 단속하는 얼굴을 보았다. 서너차례나. 

 

〈왜 여깄어?〉. 또 한 명의 낯선 여인. 멀린이 알아서 치료를 받게 해준다기에 대번에 믿고 맡기며 돌아서서는 아버지와 안부를 묻는 아더를 보고 느꼈다. 어느새 멀린을 저렇게나 신뢰하게 되었구나. 아버지와의 재회에 집중하던 중 멀린에 대해 아는 것 같은 모르가나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다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얼굴은.. 진작에 E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무구하던 눈동자가 충격으로 찡그려져가는 단계가 너무 생생했다. 커다란 눈동자를 충격이 베어 물어 반쪽이 된 얼굴. 살짝 벌린 입술이 말 없는 신음으로 앓기 시작하던 얼굴. 누가 꼭 그의 얼굴에 단계단계를 정하여 심어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늘의 시야에서 또 새롭게 본 것. 모르가나에게 귀 기울이며 다가서는 아더의 앞을 멀린이 ‘그야말로 다급하게’ 막아서는 것이었나. 황급히 모르가나의 앞으로 나아가 아더의 주의를 가로채는 동작에서 느껴졌다. 멀린의 초조함이.
이어 모르가나가 질세라 다시 아더의 앞으로 나설 땐 이게 무슨 아더 쟁탈전인가 싶었다.

 

〈기억해 이 밤〉. “네 그러겠습니다” 표정이 곧장 눈앞이었다. 세상에. 왕관 위에 얹은 손등도 곧장 정면이었다. 왕관을 쓰고, 엑스칼리버를 멀린에게 건네기 전에 한 차례 들어 올려 응시하는 얼굴까지도.

 

〈오래전 먼 곳에서〉. E에서 정면으로 만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순간의 하나. 어쩌다 보니 계속 얼굴에 대해서만 쓰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이야기는 해야한다. 중앙에서 옆얼굴을 볼 때와는 또 완전히 다르다. 정면으로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온 얼굴은 말을 잃게 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고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애틋한 듯 그윽해졌다가도 따뜻하게 상냥해지고, 사랑을 머금어 촉촉해지는 눈동자를 홀린 듯이 보았다. 이 아름다운 얼굴이 화음을 이루면 시청각적인 황홀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앗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털망토의 매듭을 스스로 푸는 거였구나. 결혼식 내내 한껏 잘생겼다가 갑자기 귀여워서 웃었네.
더불어 또 기뻤던 것. 멀린을 찾아 날아오는, 모르가나를 반갑게 포옹하는 그를 직접 맞이하는 듯한 각도여서 보았다. ‘앞으로 함께할 미래에 동생과의 춤이 있지?’ 의 들뜬 얼굴을.

 

〈눈에는 눈〉. 왼쪽 어깨가 살짝 흘러내릴 만큼이나 화를 냈다. 건드리면 바로 베어버릴 기세로 날이 서 있었다. 모르가나가 ‘아더!’를 부르며 달려올 때만 해도 그랬다. 어디 밀쳐진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검을 치켜올렸던 그를 간신히 잡아둔 건 이어진 ‘내 동생’이라는 말이었다.

 

〈혼자서 가〉. 오늘은 다시 '신은 날 택했어'가 되었다. 대사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도 이렇게 매번 달라지기도 하는 걸까? 알쏭달쏭하다.
도중에 아더가 기사들에게 붙들려 그르렁 대기 직전(어릴 때처럼 다시 붙어봐)까지는 E에서 보기에 최적인 왼블 베이스의 넘버였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네. 중앙에서는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들어 올릴 때마다 얼굴이 가려져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전부 다 샅샅이 볼 수 있었다.
이 넘버에서 요즘 들을 때마다 웃게 되는 부분은 ‘너의 술주정도 이젠 다 지겨워.’ 아더의 진심이 너무 느껴져서.

 

〈심장의 침묵〉. 느끼기로는 오케스트라의 박자가 가장 변화무쌍한 오늘의 넘버였다. 그 박자를 기어이 맞추어내는 ‘시아준수’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작부에서 박자가 빨라졌다가 급격하게 느려진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나서부터 극에서 이탈된 채 그가 노래를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가는 모습을 계속 관찰하게 되었는데, 정말이지 대단했다. 가수로서 배우로서 숙련된 재능과 열정의 그를 보는 건 기쁜 일이지만 오늘의 오케스트라가 〈심장의 침묵〉을 원래의 의도대로 객석에게 전달하였는가 생각한다면 글쎄. 이를 온전히 배우의 몫으로만 돌리는 오늘과 같은 일은 다시 없었으면 좋겠는데..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 생각지도 못한 경험. 색슨족이 발맞추어 천천히 앞으로 행진할 때, 의자가 흔들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간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스피커 옆이라 그랬던 걸까? 갸웃했지만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게 바로 살아있는 4D인가. 아니 이걸 영화관이 아닌 뮤지컬 극장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이게 바로 끝〉. 눈앞에서 만나는 흑아더가 이것이구나 싶었다. 날선 칼을 움켜쥐고 눈앞에서 번득이는 그를 말도 잃고 보았다. 흡사 내가 랜슬럿이나 기네비어가 된 것만 같았다. 그의 화를 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내가 된 것 같은 착시였다. 노래보다도 시각이 선사하는 감각에 압도되어 짜릿했다. 시야 때문인지 그의 분노에 공명한다기보다는 그의 화가 증폭되어갈수록 좋았다. 분노의 폭포를 맞는 감각이 더없이 좋았다.

 

왕이 된다는 것 leaplis.com/578537
샤아더 사랑해.

 

*

그리고 아무래도 매일 달라질 듯한 것들은 말미에 따로 적기로:
원하는 게 뭡니까
이 땅이 날 부른다면 용기를 다 끌어모아

신은 날 택했어
‘근데..’ 랜슬럿 없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