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상의된 연기가 아니었다.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시선을 맞추려 하는 애달픔, 이건 아더의 간절함이었다. 

 

아, 오늘의 그녀는 무릎을 꿇어 시선을 낮춘 그조차도 외면했다. 그의 눈높이가 내려가자 그녀는 고개를 틀어 하늘을 보았다. 시선은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저 위를 더듬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냥 올려다보는 그가 한없이 처량했다. 끝내 그녀와 눈맞춤 한 번 하지 못한 그가 힘없이 일어섰다. 그는 혼자 울었고, 혼자 무릎 꿇었고, 혼자 일어섰다. 

 

어제였다. 무릎 꿇은 그와 함께 무너져준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이별이 아직 눈앞에 선명하기에 더 서러웠다.

오늘의 사랑은 진작에 떠날 준비를 마치고 그에게 왔다. 그녀의 입술은 단단했고 어깨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꼿꼿한 전신에서 조용히 뺨을 가르는 눈물 한 줄기만이 그녀 또한 이별을 앞에 두고 있음을 알게 했다.

뒤늦게 아무런 준비없이 이별을 맞닥트린 그는 혼자서 끝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혼자 울고, 혼자 떨었다. 그녀는 그의 슬픔, 외로움, 두려움 그 어디에도 손 내밀어주지 않았다. 교감 없이 이루어진 이별에서 감정은 차디찬 벽에 부딪혀 외면당했다. 함께 나누는 마지막이 결코 아니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별이기에, 그녀가 보여준 매정함을 이해할 수는 있다. 순리를 따라 혼자가 되어야 하고, 실패한 사랑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 또한 아더의 운명임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 있었을까. 

이별가가 된 사랑의 세레나데는 오늘은 그저 통보일 뿐이었다.

어느 때보다 외로운 이별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갈 곳 없는 이별’을 오늘 보았다. 

 

*

 

음향이 드물게 좋았다. 난 나의 것, 내 앞에 펼쳐진 이 길ㅡ이 둘은 음향을 극복해내는 넘버이기도 하지만, 음향이 좋을 때면 무엇보다 드라마틱한 상승곡선을 타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만날 수 있었다. 단단한 소릿기둥을 이루는 그의 풍부한 소릿결을 고스란히. 특히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은 의심의 여지 없는 ‘오늘의 넘버’였다. 감정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스토리텔링 면에서도 단연코.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랜슬럿에게 술잔을 빼앗긴 아더, 두 팔 벌려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귀여워. 

 

“이럴 때마다 내 자신이 ‘정말,’ 싫어요.” 처음 듣는 억양. 귀가 쫑긋했다.

“잠깐만, 내 이름을 어떻게 알죠?” 서두의 잠깐만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또렷하게 발음하고 또렷하게 쉼표를 찍기까지.

엑스칼리버를 뽑기 위한 세 번째 시도. 오늘따라 검이 한 번에 스르릉, 가볍게 뽑혀 나왔다. 그 덕에 평소보다 훨씬 찬찬히 오랜 시간을 들여 감격했다. 미묘하지만 섬세한 그의 속도 조절이 좋았다.

 

〈검이 한 사람을〉. 랜슬럿에게로만 따로이 할애되는 아더의 이목을 보며 새삼스레 느꼈다. 아더에게 랜슬럿이라는 사람이 갖는 의미. 두려움 반, 기대 반 섞인 눈동자로 다가서는 모습에서 랜슬럿을 의지하는 마음이 선명하게 보였다. 안타까웠다.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이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를 받지 못하는 그가.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처음 귀를 기울일 때였다. 두 사람, 얼굴을 너무 바싹 붙이는 바람에 그만 머리카락끼리 엉켰다. 거의 정수리를 맞댄 수준으로 가까웠던 탓. 떨어질 땐 기네비어의 머리카락이 그의 머리칼에서부터 스르륵 떨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민경아 기네비어와의 듀엣에서 드물게 인연다운 모습을 발견한 오늘이었다. 

 

〈이렇게 우리 만난 건〉. 기네비어의 소절. 노래를 따라 자신에게로 이끌려오는 기네비어를 향하여 벅차게 반짝이는 눈이 말도 못 하게 예뻤다. B에서는 이 얼굴이 잘 보여서 참 좋다.

그런데. ㅎㅎ 기네비어와 단둘이 남아 대화를 나눌 때(운명을 믿어요?) 오늘따라 그들 너머의 랜슬럿 무리가 와글와글 시끌시끌했다. 〈왜 여깄어〉에서 모르가나가 자신을 ‘모르가나 펜드라곤’으로 소개할 때 카멜롯을 휘감는 웅성거림 역시 훨씬 또렷해졌다. 이래저래 마이크의 음량 조절이 전반적으로 있었던 모양.

 

〈왜 여깄어〉. 손준호 멀린이 김준현 멀린과 가장 다르게 빛을 발한다고 여겨지는 넘버. 모르가나가 노래를 시작하며 아더에게 다가설 때, 손준호 멀린은 동공부터 떤다. 꿈틀대는 눈썹과 정처 잃은 손으로도 초조한 마음을 있는 대로 표현한다. 

그런 멀린의 염려가 무색하지 않게 아더, 모르가나의 운명을 잔뜩 안쓰러워하는 얼굴이 되어 있으면..

아더의 어깨를 부여잡고, 내 말만 들으라는 듯이 “그것이 너의 운명” 온힘을 다해 설득한다. 필사적으로 아더를 모르가나에게서 떼어놓으려 하는 멀린을, 손준호 배우가 연기할 때에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오늘의 인상 깊었던 일순간. 암전되었을 때, 어둠 속에서도 한 번 더 누나를 들여다보는 찰나의 그를 보았다. 이제 내가 함께하니 안심하라는 것만 같은 동작이었다. 따뜻했어. 

 

〈기억해 이 밤〉. “네, 그러겠습니다.” 는 이제 완전한 “네! 그러겠습니다!”가 되었다. 두 번째 대답이 특히. 청년왕의 패기와 자신감이 굳센 음성 안에서 한꺼번에 전해진다. 앳된 음성에는 서투를 수도 있는 혈기와 이제 시작하는 이의 열의가 가득하여, 한 번 믿고 따라가 보고 싶게 이끈다. 

 

〈오래전 먼 곳에서〉. 오늘도 요정가루는 그의 머리 위에 곱게 안착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기네비어와 나란히 뒤를 돌아보는 타이밍에 팔랑팔랑 떨어져나올 때조차도 그림이었다. 

엑스칼리버를 꽂는 멀린의 어깨를 토닥이면서는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말하는 입 모양을 읽었고. 

 

그나저나 기네비어의 대사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못 해요.”는 매번 나를 움찔하게 한다. 눈치 없는 기네비어 탓 반, 무섭게 굳어지는 모르가나의 표정 탓 반. 오늘도 싸늘하게 굳었다가 금세 표정관리하는 모르가나를 보았고, 심장을 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드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아는 척 섣부른 위로를 건네기보다 모르는 척 배려하는 편이 때로는 더 나을 수도 있음을 모르는 기네비어..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순간. 

 

누나와의 춤. 안 되겠다며 누나가 발을 빼자 아쉬워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가 보지만, 뺨을 감싸며 얼러주자 금세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아더, 투명하고 맑게 자란 모르가나의 사랑스러운 동생.. 펜드라곤 남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진실로 함께 행복한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멀린에게의 “너도 나가”가 나직해졌다. 끓어오르는 것을 삼키는 목소리를 꾹꾹 눌러서, 너도 나가. 가까스로 눌러 담은 화는 다음 어절에서 폭발했다. 꺼져!

즉흥이었을까, 의도한 변화일까? 이다음 공연에서 알 수 있겠지.

그나저나 신부님 너무 거세게 나가떨어지시는 거 아닌가.. 오늘따라 휙 밀쳐지시는 느낌이 특히나 강하여 놀랐네. 완전히 저 멀리로 날아가시던데 깜짝. 

 

〈혼자서 가〉. 오케가 또. 마를 넣어서까지 대사를 밀고 박자를 맞추려는 아더의 시도는 3회 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드럼이 독주하는 인트로, 대체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싸움 중 한 번, 두 사람의 칼이 닿지 않고 허공에서 비껴갔다. 챙챙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야 할 타이밍에 고요가 흘렀다. 이어 곧장 그다음의 합에서 놓친 부분을 만회하려는 것처럼 한층 거칠고 대범해진 두 사람의 싸움을 보았다. 괜스레 조마조마하였지만 박진감만큼은 넘쳤다. 

기네비어의 중재(?)로 싸움이 끝나고 아더가 퇴장할 시간. 버려둔 검을 집어들며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했다. 놓칠 뻔한 검을 재차 우당탕, 재빠르게 다시 쥐고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모습에서 랜슬럿과 대치하며 아더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몰려있는지 대번에 느껴졌다. 

 

〈이게 바로 끝〉. 오늘의 B는 랜슬럿을 찾아 등장하는 아더와 모르가나가 대각선으로 한꺼번에 담기는 시야였다. 모르가나의 손에 번진 붉은 핏빛 너머로 천진하게 묻는 아더가 보였다. 누이의 핏빛으로 일렁이는 손가락 위로 물음표를 띄운 티 없는 얼굴을 보노라니 이 모든 게 얼마나 운명의 장난 같았는지. 

“여기서 뭐 해?”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누이의 대답에 동생이 갸웃하며 헛웃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믿을 수 없는 진실에 도리질을 거듭하던 그가 급기야는 양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바람에 뒷머리가 한껏 일어서며 단정한 얼굴이 까치집을 했다. 

결국 코너로 몰린 무릎을 꿇으며 무너지고, 모르가나가 그림자처럼 바싹 다가와 그를 감싸안는다. 누이의 손길에 땅으로 푹 꺼트렸던 동생의 고개가 서서히 들리면, 이제 펜드라곤 남매가 서로를 마주 볼 시간. 이 순간의 두 옆얼굴이 얼마나 닮았는지.. 착란의 감각 말도 못 한다. 

이어 배신을 향하여 검을 들고 달려드는 아더의 얼굴에서 모르가나의 손에 맺혀있던 붉은 빛을 보았다. 마치 그녀의 숨결을 타고 불길이 옮겨붙은 것처럼. 

그러나 차마 죽음의 응징은 하지 못한 그가 검을 떨구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억장의 숨소리를 들었다. 땅바닥에 곤들어박히며 철컹, 무겁게 내리꽂히는 검의 소리도 그보다는 덜했다. 

 

멀린을 찾는 음성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금 처창한 절규였다. “왜..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왜..” 마지막 음절을 덧붙여서까지 절박하게. 실패했다는 자조와 헛웃음 또한 격정적이었다. 한계까지 몰려있는 아더의 심정이 어둑한 공간이 팽배했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단도를 건네받고 제 흥분에 취한 모르가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입꼬리만 아주 살짝 올려 피식, 찰나의 비웃음을 지었다. 

 

〈왕이 된다는 것〉.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금세 바닥에 내리꽂히는 시선이 마음을 잡았다. 왕이 된다는 건 뭘까. 자문하는 내내 땅으로 떨군 시선이 아팠다. 들릴 줄 모르는 시선에 두려움과 망설임, 회한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자신의 책무를 알기에 외면할 수 없어 더 괴로운 심경 전부가 담겨있었다. 

시작부에서 이렇게 웅크린 듯 작은 몸의 그를 보아서일까.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 노래에서 가장 좋은 건 역시 마무리다. 주먹을 꼭 쥔 채 걸어 닫는 단단한 음성.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순간의 그. 좋으면서도 고맙고, 기쁘면서도 안타까운..

그런데 왕이 된다는 것은, 매 공연 새롭게 좋은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케스트라의 갖은 변덕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성의 고지를 찍은 심장의 침묵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완성의 오르막길을 걸어가는 이 노래를 보다 보면 묻게 된다. 이 노래의 완성은 있을까? 격점은 있어도 정점은 없는 것은 혹 그의 인생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일까.

 

〈평원에 날 묻어〉. 마이크의 음량 조절이 또 한 번 또렷하게 느껴진 부분. 거의 육성으로 들렸던 목소리들이 선명해졌다. 몇 번이고 거듭하는 ‘미안해, 미안해.’ 타격이 커졌다.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힘차게 일어났다. 7월 6일의 밤공처럼. 천천히 걸어와 바위산을 등지고 서서는 손으로 두 눈의 울음을 훔치고 입동굴을 만들어가며 웃었다. 아니 웃어 보였다. 눈앞의 운명에게, 알겠노라는 듯이. 

내 마음을 찌른 건 운명에게 건넨 웃음 직후의 얼굴이었다. 애써 밝게 지어 보인 웃음이 걷히니 수면 아래 잠겨있던 쓴웃음이 드러났다. 단단하게 자신을 여며보려 해도, 삶이 할퀴고 간 여파가 여실한 진짜 얼굴은 이러했나. 얼마나 치이고 넘어져 가며 여기까지 왔는가, 그의 시간을 돌아보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르가나가 했던 것처럼 그의 뺨을 쓸어주고 싶었는데, 그때와는 달리 그는 혼자의 힘으로 자신을 일으켰다. 모르가나도, 불길의 부추김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로. 

산의 정상에서 그를 향하여 쏟아지는 밝은 빛은 때를 기다려온 운명이 웃는 모습 같았다. 영웅이 스스로의 알을 깨고 일어서기만을 고대했지. 오랜 기다림의 끝이었다. 

 

 

샤아더 사랑해

 

*

이럴 때마다 내 자신이 ‘정말 싫어요’

잠깐만.. 내 이름을 어떻게 알죠?

저 엑스칼리버 앞에 나 맹세하리

궁합도 볼 줄 알아요?

너도 나가, 꺼져!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 검지 좀 더 조심해야 할 텐데

멀린.. 왜..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왜..

 

아, 참 갑옷은 뜯어진 부분을 구겨 접어 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