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공연에 대한 깊은 감사와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경의를 담아. 김준수라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한결같이, 반드시, 기필코 지켜내는 ‘가치’와 그것으로 빚어낸 아더라는 인물, 그의 극복의 서사를 지켜볼 수 있었음에 관객으로서 영광이었습니다. 

커튼콜에서 2,3층을 올려다보며 먹먹하게 웃음짓던 얼굴에, 모차르트의 천 번의 입맞춤을 전하며. 

 

2. 

오늘의 〈왕이 된다는 것〉을 대체 뭐라 말할까.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모두 끌어모아 노래하는 그였다. 혼신을 다하는 노래에서 두 명이 한 번에 보였다. 아버지도, 사랑도, 친구도 모두 잃은 채 격전을 앞둔 아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소리를 움켜쥐고 부단히 노력하는 그. 두 사람이 함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막다른 길 앞에서 아더가 먼저 나아갔다. 격전을 앞두고 끝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으며 각오를 다졌다. 무거운 걸음을 이어가는 아더의 뒤를 그가 지켰다. 오늘이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온 힘을 끌어모아 자신을 불태워 넣음으로써.

1절에서 오늘 새로이 들려준 애드립 “물러-서-지 않.으.며.” 여기 이 짧은 소절에서조차 극명하게 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스타카토를 심어서까지 굳혀가는 의지가, 각오가. 

그러니 이것은 두 사람 몫의 한 뜻 한 길 한마음의 노래였다.

영웅의 서사인 동시에 극복의 표상이었으며 또한 불굴의 여정이었다.

 

3. 

소리가.. 어제 들었던 철가루의 소리 그대로였다. 그래도 어제는 1막에서까지 이렇지 않았는데.. 가루가 된 목소리가 구심점을 찾으려 애를 쓰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의 그라면 〈난 나의 것〉에서 분노는 하되, 2막의 〈이게 바로 끝〉과 같은 금속성의 파열음을 꺼내어 쓰지 않는다. 갈라지고 찢겨나가는 주특기의 다채로운 금속성은 잠시 거두어두고, 이제 막 청년이 된 18세 소년의 여물지 않은 분노를 곧고 딴딴한 소리기둥으로 분출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미 잔뜩 긁힌 목소리가 숨겨지지 않았다. 마치 겹겹이 뒤틀린 지층이 고스란히 노출된 단층처럼. 그래서 오늘은 갈퀴 같은 할큄음을 적극 활용하여 분노를 표출했다. 긁어내고 뜯어내는 음으로 신랄하게. 

손준호 멀린과의 합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손준호 멀린은 항상 김준현 멀린보다 아더를 세게 몰아세운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아더도 격해지곤 하는데, 이런 그가 오늘의 목소리로 만든 가창과 만나니 엄청난 시너지를 이루어냈다. 어느 때보다 격정적인 〈난 나의 것〉이었다.

 

〈난 나의 것〉뿐만이 아니었다. 전반적으로도 손준호 멀린과의 공연에서는 같은 행동이나 표정도 조금 더 분명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이 유독 그랬다. 용의 불길을 다스리는 법을 막 배웠을 때였다. 멀린의 가르침을 사사받은 얼굴이 잠잠해진 불길을 음미하다가, 신기하다는 듯 살며시 웃음 지었다.

엑스칼리버를 뽑을 때도. 마지막 시도, 숨결을 느끼며 경건하게 미소지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아, 그래. 딱 한 번 보여주었던 포즈도 다시 취했다. 7월 5일에만 보여주었던, 검을 눈 아래에서 가로로 눕혀 기사의 자세를 잡아보는 그 포즈! 역시 멋있다니까.

 

이어서의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굳건한 각오가 모래사장의 알갱이처럼 변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소리를 주먹으로 뭉쳐가며, 빠져나가는 모래를 뭉치고 뭉치고 뭉치려는 모습을 두 눈으로 생생히 본 적이 있는가. 오늘이 바로 그랬다. 

이 노래의 아더가 오늘처럼 시아준수인 듯 아더인 듯 아리송했던 적이 또 있을까. 참담한 실패를 두려워하던 아더가 운명에게 오라고 당당히 말하기까지의 여정이 그 자체로 오늘의 시아준수였다.

 

한편으로 오늘의 금속성 음성과 무척 잘 어우러지는 1막의 노래가 있었으니, 〈이렇게 우리 만난 건〉. 특유의 갈래갈래로 흐드러지는 결을 시아준수가 작정하고 곱게 담금질할 때 만날 수 있는 소리, 바로 그것. 금가루를 펴서 바르면 이런 소리가 날까. 아름다웠다. 소리가, 이 소리를 빚는 웃음 머금은 얼굴이. 더블어 마침 두 사람에게로 드리워지는 노을빛과 함께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니 참, 그런데 말야.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의 가슴콩. 오늘 엄청 거대한 퍽 소리가 나는 위협적인 콩이었다. 아더, 정말 놀라서 제 가슴을 문지르며 갸웃했다.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소리에는 놀랐고 상황에는 웃었다.

 

〈왜 여깄어?〉. 오늘 1막의 넘버. 

오랜만의 신영숙 모르가나. 멀린이 대번에 자신을 냉대하자 샐쭉해지는 눈이 아더를 표적으로 삼았다. 버림받은 누이의 가면을 쓴 얼굴로, 비수를 숨긴 채 가련하게 자신의 불행을 노래한다. 장은아 모르가나가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다면 신영숙 모르가나는 상처를 이야기할 때조차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있다. 멀린을 향할 때는 원망 어린 소리를, 아더를 향할 때는 가련하여 애처로운 소리를 꾸며내면서. 

모르가나의 불행을 안쓰러이 여긴 아더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 신영숙 모르가나는 가련하게 꾸며낸 눈을 반짝인다. 잡은 이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반드시 불행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듯한 의지가 음산하게 스쳐간다. 가면 아래 누이의 본심을 알 길 없는 아더는 노래로 약속한다. 모든 걸 바로잡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행복해질 것을. 

 

여기서 소리적으로 상황상 무척 어울렸던 장면. ‘바로잡아야 해’의 어미가 평소처럼 굳세지 못하고 끊어졌던 것. 사실 이제 막 운신을 다시 시작한 아더가 아닌가. 기네비어의 염려대로 무리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해’의 어미가 온전하게 마무리되지 못하고 끊긴 것,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아더를 실감할 수 있었던 장면. 끊어지는 소리가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이었다. 

 

〈눈에는 눈〉. 재차 말하지만 무척이나 오랜만의 신영숙 모르가나와 아더.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아더, 아더, 내 동생.”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대사라 무척 반가웠어. 더불어 오늘, 아더를 향하여 두 팔을 안쓰러이 벌리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그녀의 두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한 모습을 보았다. 살짝 비켜 올라간 입술은 자신만만했다. 나만이 너를 이해할 수 있어, 너는 나를 뿌리칠 수 없어.

거부할 수 없는 속삭임으로 누이가 다가섰다.

“용을 놓아줘.”

이어 또 하나의 좋아하는 디테일. 특유의 손짓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누이. 마치 심장 한 쪽에 봉인되어 있던 분노를 해제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길을 느낀 동생, 홀린 듯이 제 안의 걸쇠를 뜯어내는 얼굴이 된다. 그의 안에서 때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던 용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손길을 따라 화르륵 불 붙기 시작하는 아더의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용을 풀어내는 모르가나의 손끝과 아더의 점화하는 눈, 짜릿했다. 이 순간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연기의 합은 오랜만에도 완벽했다.

 

〈혼자서 가〉. 싸움이 막 끝난 후, 흥분을 가라앉히는 숨소리가 유독 길었다. 쉬이 진정되지 않는 호흡이 무척 가빴다. 거기서 느껴졌다. 케이의 염려, ‘아더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잖아.’

이어 퇴장할 때였다. 늘 기네비어를 본체만체하곤 했었는데, 오늘은 몸을 아예 틀어서까지 정확하게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잡지 말라는 듯이, 날 좀 내버려 두라는 듯이.

 

심장의 침묵 인트로. 확실하다. 분노라기보다 이제는 깊은 슬픔이다. 검은 바다, 짙은 어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상실의 슬픔 안에 있다.

“날, 날..?”

되묻는 얼굴이 거의 울다시피 했다. 아버지를 잃고, 이제는 형마저 잃어버린 듯한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 나를 믿어주는 이는 누구도 없구나.. 깊은 절망을 보았다. 

 

참, 치켜세운 검지가 돌아왔다.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 “좀 더 조심해야 할 텐데.”

 

〈심장의 침묵〉에는 오늘의 공로상을. 1막의 포문을 난 나의 것과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이 함께 열었다면, 심장의 침묵은 2막의 주춧돌이 되었다. 이 넘버에서 그가 기필코 전달하곤 했던 그 무엇도 바래지 않았다. 소리는 재료일 뿐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

“걱정 마세요. 랜슬럿은 제가 찾아보죠. 반드시 우리와 함께 싸워줄 겁니다.”

대사가 바뀐 걸까? 어조도 평소와는 달리 낮고 차분했다. 결의에 찬 굳건한 음성이 아니었다. 대사와 어조가 이렇게 한 번에 달라지다니, 이유가 뭘까. 갸웃했다.

 

〈이게 바로 끝〉. 배신을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누이와 동생의 표정이 한 번에 보였다. 웃는 누이, 충격으로 굳은 동생. 두 표정이 교차하는 장면은 극적이었으나, 받아들이기에 잔인했다. 누이의 웃음이 동생의 절망을 불러왔음이 너무나 명백하였으므로.

 

다시 말하지만 오랜만의 신영숙 모르가나, 오늘 새롭게 본 것은 ‘모두 거짓말, 사실 아냐..’라며 무너진 아더를 살포시 끌어안고 짐짓 상냥하게 이마를 맞대어주는 모습. 그녀의 거짓된 상냥함에 다소 놀랐다. 이마와 이마를 맞댄 남매는 언뜻 보면 다정해 보였다. 동생을 위로해주는 누이처럼 보였으므로. 이어 신영숙 모르가나는 두 손으로 그를 잡아끈다. 장은아 모르가나가 주로 한 손만을 잡고 이끄는 것과는 달리, 두 손을 다 써서 적극적으로 아더를 움켜쥐고 의도대로 이끈다. 그런 그녀의 부추김에 아더는 속수무책이다. 모르가나가 자신을 어느 방향으로 이끄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자극적이다 싶을 만큼의 거대한 배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무너지는 꿈”의 대목. 사랑과 배신을 영구히 추방하며 그들로부터 등을 돌린 그의 침묵이 오늘따라 길었다. 정황상 오케스트라의 박자를 기다리는 것이었겠지만, 극의 상황으로는 꼭 이다음의 가사ㅡ‘무너지는 꿈’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단호하게 돌렸던 고개를 연신 기울이며 랜슬럿과 기네비어가 떠나는 모습을 흘긋이던 시선이 그 느낌을 더욱 굳혀주었다. 그 배신을 목도해놓고도 두 사람을 자꾸만 되돌아보려는 아더의 시선이 슬펐다.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흘긋이기만 하는 눈길이라 더욱. 끝내 랜슬럿도 기네비어도 결국 그를 떠나며 그림자가 되어가자, 그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는 얼굴로 그가 단언했다.

‘무너지는 꿈.’

이게 바로 끝이었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멀린에게 대답하는 대사가 또 한 번 바뀌었다.

“그래.. 그럼 난 실패한 거네.”

그래, 대답하고는 어제보다 분명한 쉼표를 주었다. 그래, 내가 그랬었지, 인정하는 것 같은 찰나의 침묵이었다. 실패했다며 자조하는 모습이 어찌나 1막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에서 참담한 운명을 지레짐작하며 망설이던 모습과 겹쳐지던지. 그때의 아더는 상상도 못 했겠지. 설혹 실패라 한들 이런 형상일 줄은 몰랐겠지. 18세 생일을 맞아 연대들과 마냥 해맑았던 모습까지 떠오르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된다는 것〉의 노래를 마치고 방패를 받아들며 각오를 굳히는 얼굴. 땅을 즈려밟으며 나아가는 등. 아, 오늘처럼 전장으로 나아가는 그가 죽음을 향하여 돌진하는 것 같았던 적이 또 있을까. 망설임도 두려움도 이제는 등뒤로 남겨둔 채 달려나가는 묵묵한 등이 이렇게나 애틋한 적 있을까. 마치 이 전쟁의 승패가 나의 삶과 직결되는 것만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게 했다. 

 

〈평원에 날 묻어〉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왜 돌아온 거야.”

랜슬럿을 끌어안으며 그가 울었다. 죽음이 임박한 자의 육신은 힘이 없었다. 늘어지는 몸을 연신 부둥켜안으며, 삶을 놓아버리려는 이를 설득했다.

“아니야, 같이 가자아.”

그 모습이 영락없이 어미 잃은 아이였다. 카멜롯으로 ‘같이 가자’는 애원은 오늘이 처음이지. 그 말 한마디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무대 위의 그는 알까. 그의 얼굴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땀과 눈물을 곧바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그는 알까.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민경아 기네비어는 김소향 기네비어와는 달리 그가 애원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붙잡을 틈을 내주지 않는다. 반드시 ‘이별’이어야만 하므로.

그러나 그런 그녀도, 오늘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우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갈 곳 몰라하며 우는 그에게로 몸을 숙여, 시린 무릎을 일으켜주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와 같았다. 칼같이 깊은 인사, 매정하게 돌아서는 등. 붙잡아볼 수조차 없는 간격으로 그녀는 멀어졌다. 그의 사랑은 올 때보다 갈 때에 더 빨랐다.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오늘도 철퍼덕,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칼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눈물로 흐렸다. 지친 육신은 어제와 같이 힘차게 일어서지 못했다. 대신 오늘의 그는 검으로 땅을 짚었다. 하지만 한 번에 일어서지 못했다. 한 차례, 헛짚어 고꾸라질 뻔 한 후에야 제대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정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금세 눈물 번지는 얼굴을 손으로 씻어내야 했다. 눈물을 급히 훔쳐내고,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마치고는 재차 웃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웃음이 되어 맺히지 않았다. 그저 웃어보이고자 한 노력만이 얼굴을 스쳐 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운명이 아버지를 앗아가며 그를 고꾸라트렸을 때 그는 분노하고 울고 좌절했다. 그때는 분노에 잠식당했다. 운명이 다시 사랑과 우정을 한 번에 깨트렸을 때에도 그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것을 다스려냈다. 

그리고 이제 운명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간 지금, 혼자된 그는 쓰게 웃었다. 분노도 울음도 좌절도 모두 녹여낸 얼굴로.

더는 운명 앞에 물러서지 않는 이, 청년이되 소년이며, 왕으로 일어섰으되 또한 한 명의 사람으로 어엿하게 거듭난 그였다. 

 

4.

샤아더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