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아 기네비어와의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오늘의 그는 끝까지 노력했다. 단절된 사랑 앞에서 체념해버렸던 25일과는 달랐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애원했고 애절했다.
무정한 눈의 그녀가 시선을 깊이 내리깔고 도통 봐주지 않자, 허리를 숙여 눈맞춤을 구한 것이 첫 번째 노력이었다. 무거운 갑옷을 애써 가누어가며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낮추었는데도 그녀의 외면에 부딪히자 이번에는 허겁지겁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말 그대로 허겁지겁, 황급하게. 몸부림하듯. 제발 봐달라며. 오늘처럼 허둥대는 몸짓은 처음이었다. 보노라면 모를 수 없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절박한지.
그렇게 겨우겨우 시선을 맞추었는데 세상 담담한 그녀의 얼굴.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도무지 그녀에게 닿을 수 없는 걸까.. 약간의 절망이 그를 엄습했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우는데도 소용이 없는가. 고개가 천천히 무너졌다. 목숨줄처럼 움켜잡은 그녀의 두 손에 우는 이마가 닿았다.
이마를 맞추고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난 이미 용서했어, 제발, 카멜롯으로 돌아와 줘.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다. 이마를 포갠 애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ㅡ특히 민경아 기네비어에게는 ‘정해진 운명’을 따라 그에게 이별의 역사를 지워주어야만 하는 사명이 있었다.
그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단호함은 부연 없이도 그에게 ‘안된다’고 전하고 있었다. 울어도 소용없다고, 돌이킬 수 없다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언젠가 노을 지는 카멜롯에서와같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러나 도닥임이 아니었다. 그를 진정시키려는 손길일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허락한 그와 그녀의 거리는. 그가 살며시 가슴 위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보았지만 그녀의 거절에 부딪혔다. 어렵사리 마주 잡은 손이 금세 빠져나갔다. 닿으면 빠져나가고, 다가가면 멀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무정했는지. 얼마나 엄하고, 얼마나 차가웠는지.
깊이 허리 숙인 마지막 인사조차도 냉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떤 여지조차 없었다.
그래서였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로, 따라가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가 홀로 남은 것이.
그런데 너무했다. 메마른 검날조차도 무정한 하루였다. 검조차도 오늘은 울어주지 않았다. 어제는 검이 그의 울음을 가져가 주어서 그의 얼굴이 고요할 수 있었지. 울음도 웃음도 큰 풍랑을 남기지 않고 그를 비껴갔다. 그러나 오늘은 검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의 그는 울었다. 애써 웃어 보이고자 했지만, 결국 울음 번진 입꼬리를 보았다.
정상까지도 힘겨웠는데, 정상에 도달해서도 끝까지 쉬운 것 하나 없었다. 바위산 꼭대기에서 휘청, 균형을 잃을 뻔한 그는 처음 보았다. 처음으로 바위산 정상이 좁디좁아 위태로워 보였다.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곳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운명에 맞서는 일은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도 도전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7월 25일에 보았던 굳건한 어깨동무! 찰나의 용맹함이 오늘 나왔다. 살짝이지만 크앙, 한껏 용맹한 어깨동무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한참을 발라당 누워있었는데 그때 숨을 고르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배를 보았다. 오르락내리락 두 차례. 들숨 날숨, 들숨 날숨, 와 충격적 귀여움.
〈난 나의 것〉의 폭발하는 분노. 멀린과 대치할 때부터 이미 분노가 컸다. 갑자기 나타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진실이라며 늘어놓는 이에게로 성큼성큼 분노의 보폭이 얼마나 크고 격했는지. 새삼 그의 동작이 크고 넓다는 것이 느껴졌다.
노래적으로도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많았다. 어느 순간에는 울분의 숨을 삼키며 음을 터트려냈는데, 정확히 어떤 소절인지는 다시 들어봐야 해.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의 울림통은 말해 무엇할까. ‘이 땅이 날 부른다면 용기를 다 끌어모아’의 지평을 넘는 소리는 오늘도 감동적이었다. 여기 이 곧바르게 퍼지는 울림 가득한 소리의 감각에 중독된 것 같아.. 1막에서 가장 사랑하는 넘버는 리허설 때부터 〈왜 여깄어〉로 굳건히 정했는데 어느 순간 치고 올라와 버린 모양이다. 아더의 선하고 강인한 성품을 대변한다는 맥락에서는 두 넘버가 닮아있어서, 그런 점마저도 좋고.
두 넘버가 울림통의 극대화라면 〈이렇게 우리 만난 건〉은 소릿결의 향연. 해변의 모래 위로 사금을 뿌린 듯한 반짝이는 소릿결을 들을 수 있다. 마침 노을 지는 카멜롯의 정경과 무척 잘 어울려. 청각과 시각이 그 자체로 한 편의 명작을 만들어낸다. 정말 소중해.
〈왜 여깄어?〉. 역시 멀린이 문제다. 모르가나의 눈앞에서 아더에게 ‘왕이 될 운명’이라니. 모르가나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려버렸다. 자신에게 벽을 치기만 하는 멀린에게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얼굴이 되었던 모르가나가, 저 대목에 이르러서는 얼굴을 뒤틀어 피식 웃어버렸다. 네가 소중히 여기는 그 운명을 다 부숴주겠다는 것처럼. 이어 철저하게 가면을 쓴 슬픈 얼굴로 아더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는데, 누이의 슬픈 얼굴 아래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 알 길 없는 동생의 착한 얼굴에 안타까웠다. 단 한 순간도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남매의 재회였다.
〈기억해 이 밤〉. 어제였다. 김준현 멀린이 어엿한 왕관 장인으로 거듭났음에 기뻐하였던 것이. 그런데, 와아.. 오랜만에 만난 원조 장인 손준호 멀린이 왕관의 신기원을 열었다. 앞머리를 아예 건드리지 않고, 앞머리 뒤에서부터 왕관을 급경사지도록 완전한 대각선으로 얹어주었는데, 세상에. 이것이었다. 바로 이거였어. 이게 바로 왕관의 끝이었다. 오늘의 왕관상, 박수 드립니다.
(왕관이 대단히 대각선으로 얹어진 탓에 미끄러질 것을 염려했는지, 검을 들추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엔딩에서 오늘은 덜 추켜올렸던 건 안 비밀)
〈오래전 먼 곳에서〉. 두잔 째 마시고 헤롱헤롱, 한껏 휘청하며 기네비어와 빙그르르 턴을 주고받았다. 살짝 웃겼던 건 그도 기네비어도 똑같이 두 잔을 마셨는데, 그는 잔뜩 취해서 휘청휘청 돌고 기네비어는 너무 깔끔한 원을 그리며 돌아서.. 아더 술 너무 약한 거 아니양? 싶었어.
계단을 내려올 때도 휘청, 휘청 사람들을 헤치며 멀린에게로 날아갈 때도 비틀비틀. 한껏 섬세한 ‘여기 누구 좀 취한’ 연기.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은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다. 오늘 들은 중 가장 강하게 울분을 터트려내는 소리를 들었다. 잘라서 듣자.
〈심장의 침묵〉. “여긴 모두 폐허.” 에 이르러 두 팔을 넓게 펼쳐 폐허를 만져보려는 손동작이 무척 슬펐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검은 바다, 전부 폐허를 매만져보는 손가락에 남는 것은 오직 공허뿐. 그 참담함이 여실히 전달되었다.
〈이게 바로 끝〉이 계단을 타고 있다.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어. 치솟는 강강을 주체하지 못한다. 25일보다 26일이, 26일보다 오늘이. 검을 움켜쥐고 랜슬럿과 기네비어를 향하여 쏟아내는 높은음의 ‘이게 바로 끝’부터 파열음으로 가득했다. 끓어오르는 음절에서 분노와 절망이 뚝뚝 묻어났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움켜쥔 검날이 부들부들 흔들렸다.
“내 심장은 속았어, 배신당했어, 내 믿음이 짓밟혔어.” 칼을 쥐고 랜슬럿과 기네비어의 둘레를 그리는 격분에 막힘이 없었다. 기네비어를 향하여서는 생전 처음 보는 손짓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파득파득 떨리는 손바닥, 차마 내리누르지도, 그렇다고 선뜻 거두어들이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손을 떨었다.
저주 받았 ‘어’의 깊이 꺾는음은 분노에 또 한차례 날개를 달아주었다.
내리막길 없는 분노였다.
앞길은 다 암흑, 상처만 남은 끝없는 고통뿐. 이게 바로 끝이었다.
샤아더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