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나의 것에서 이미 느꼈다. 소리가 말해주었다. 오늘은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종연 후 엑스칼리버를 생각할 때면 불러올 단 하루의 공연ㅡ랜슬럿의 형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 기네비어의 심장을 쥐어뜯는 손길, 검날을 따라 흐르는 검의 눈물. 하물며 ‘왕관’까지도 다 가진 다신 없을 바로 오늘, 7월 28일의 엑스칼리버였다.
소리가 좋았다. 25일의 1막이 좋았고, 26일의 2막이 좋았지. 27일에 합일의 과도기를 거쳐 28일인 오늘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압도적이었다. 고르게 깔린 오케스트라의 연주층 위에 사람의 소리가 있었다. 날개 달린 사람의 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소리가 선사하는 감동은 〈난 나의 것〉에서부터 멈출 줄 모르는 풍랑 같았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의 울림통은 감격적이었다. 5연공임이 무색할 정도로 딴딴하며 건강한 소리가 좋은 음향을 만나 두 번은 없을 경지로 폭발했다. 유독 그의 ‘소릿결’이 향연이 되어 펼쳐지는 곡이 많은 이 극에서 음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음향이 어떻게 좋은 공연을 만드는지도.
음향은 선명해진 동시에 많이 증폭도 되었는데, 덕분에 조용조용 어렴풋했던 대화도 꽤 많이 들렸다. 기네비어들을 발견하고 “아는 사람이야? 예쁘다아~.” 배시시 웃는 어절이 이렇게 또렷했던 적은 처음.
감정적으로도 좋았다. 모든 배우가 자신의 배역, 그리고 상대역과 호흡하고 있었다. 배우 본인이 자신의 서사를 이해하고 완성을 이루었음이 느껴졌다. 각자의 삶에 개연성과 당위가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당위가 서로 조화롭게 맞물려 공연을 이루니, 그대로 하나의 악장이 되었다. 당장 생각나는 일면만 하더라도: 아더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던 케이, 형을 용서하지 말라던 랜슬럿, 외로움을 삼키며 내내 결혼반지를 매만지던 기네비어.. 그들 모두 실제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오늘의 배우들이 카멜롯을 세종으로 끌어왔다.
소리, 감정, 서사. 모든 것이 공명하는 공연이었다.
*
그럼 첫 곡으로 돌아가서,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의 인상적인 찰나. 팡팡 세례에 앞서 뒤로 넘어갈 때였다. 흡사 뒷구르기를 하는 것처럼 탄력적인 몸놀림으로 홱. 안무인 줄.. 신선했어.
“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다.” 다정한 타이름에 마음이 다소 풀린 아더, 아버지의 손길을 피해 훌쩍 벌렸던 거리감을 좁혀 한 걸음 아버지에게로 다가서는데 멀린의 등장.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지?! 목소리에 날을 세우며 다시 저만치로 걸어 나가 거리를 벌렸다. ‘거리감’으로 마음의 거리를 표현하는 그가 오늘따라 귀여웠다. 아이들이 할 법한 의사표현 아닌가.
“용의 불길을 다스려 용의 숨길을 가져와.” 멀린의 주문에는 그만 헛웃었다. 뭐, 뭘 하라고요? 얼척없다는 듯 어깨를 털어서, 눈썹 앞머리를 올려서.
“당신이 엑스칼리버를 뽑았다는 그분인가요?”
엑스칼리버 이야기가 나오자 으쓱, 살짝 힘이 들어가는 어깨를 보았다. 조금씩 대화자들 사이로 나서는가 싶던 그가 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엑스칼리버의 검집을 툭 내리쳤을 때는 몹시 귀여웠다. 아닌 척하면서 우쭐하는 모습이 딱 그 나이대의 소년이라, 불쑥 애틋하기도.
색슨족의 급습. 7월 27일의 그가 부상으로 쓰러졌을 때, 그날따라 랜슬럿과 기네비어의 부축이 늦어져 찬 바닥에 오래 엎어져 있었다고 했지. 오늘 그 이유를 알았다.
김소향 기네비어는 같은 장면에서, 활을 쏘고 나서는 아더쪽으로 걸어와 거리를 좁혀둔다. 너의 이교도 군주에게 전하라! 라며 일갈하는 아더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선다. 그래서 부축도 빠를 수 있었던 것. 섬세함이 느껴지는 동선이었다.
〈기억해 이 밤〉. 아니, 왕관.. 아무래도 깊은 대화를 나눈 모양이다. 김준현 멀린도 27일의 손준호 멀린과 같은 깊은 사선으로 왕관을 ‘앞머리 뒤로’ 넘겨 씌워주었다. 예뻤다. 정말 예뻤다.
결혼식. 7월 26일, 김소향 기네비어가 그의 잔을 엑터에게 넘기며, 허전해진 아더의 손을 꼭 잡아주었지. 엑터의 덕담 내내 소중하게 꼭 맞잡고 있었다. 한 쌍의 원앙이 이럴까 싶은 사랑 넘치는 모습이 좋았다. 또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 오늘도!
“모두 잔을 채워주세요!”
건배할 생각에 방긋 신이 난 아더의 잔을 가져가며, 김소향 기네비어가 살며시 그 손을 대신 쥐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꼭 맞잡은 손이 참 예뻤다. 그대로 계속 사랑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을.. 사랑의 한때가 짧은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두 사람 참 예뻤다.
〈혼자서 가〉. 신은 날 택했다며 짐짓 여유로운 척했지만, 실은 내내 바짝 독이 올라있었다. “너의 술주정도 이젠 다 지겨워.” 에서 얼마나 격했는지. 검을 겨눈 상체를 퍼득 숙여서 약 올리는 것 같은 순간적인 제스처에 놀랐다.
말리는 손길에 붙잡혀서 강제로 진정을 당할 때도 진정은커녕 오히려 불이 붙었는데, 생명에 대한 존중 없는 왕이라는 랜슬럿의 힐난에 두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놔! 씨!”
그대로 잡힌 몸을 격하게 틀어 빼내는데, 내가 무엇을 들었나, 무엇을 본 건가 싶었다.
심장의 침묵 인트로.
“날?”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그가 헛웃었다. 이어서 말했다.
“니가?”
원래는 뒷문장을 잇지 못하고 날? 날? 거듭 되묻기만 하고 말았는데 오늘은 정확히 랜슬럿을 지칭했어. 다소 놀랐다. 여기서 그는 항상 절망하며 울었는데.. ‘나를 막아서서라도 그녀를 지킨다고?’ 하는 되물음에 ‘내’가 막아야 하는 존재가 된 서글픔이 느껴졌는데 오늘은 달랐다. 니가 나를 막아설 수 있다고 생각하냐는 비웃음이 느껴졌다.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 그제, 어제와같이 분노를 일시에 터트려냈다가, 이어서는 음성을 꾹꾹 눌러 말했다. 위압적이면서고 위엄있게 “좀 더 조심해야 할 텐데.”
〈심장의 침묵〉. 무릎 꿇은 그가 정확히 일직선인 시야였다. 당신 손길이 그립다며 한참을 들여다보던 정수리와 미어지듯 떨구어버리던 손이 눈에 오래오래 남았다. 그 손으로 여긴 모두 폐허라며 매만지고, 그림자도 흔적도 없다며 우는데.. 아.. 자꾸만 손을 따라가게 되었다. 공허한 공간, 텅 빈 자리를 더듬는 마른 손가락으로도 그가 울고 있었다. 저 손을 아무나 잡아주기를 바랐다.
“모르가나를 믿어선 안 돼!”
멀린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걸음을 멈춰 세우고 돌아보았다. 검지로 멀린을 콕 찍는 동작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가 찬 듯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내가 믿어선 안 될 사람은 오히려 당신이겠지.”
여기서 이렇게 ‘헛웃어 보인’ 것은 오랜만.
〈이게 바로 끝〉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어미가 남달랐다. 늘 단호하게 닫아내렸던 문장인데, 어미로 내리찍었던 문장인데 오늘은 되레 올렸다. 이를 악 물어 치켜 올렸다. 일갈하듯이.
“세상이 무너져내려.”
7월 27일의 제스처가 더욱 진화했다. 기네비어의 등 뒤에서 배신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른 가지처럼 떨리던 손, 그녀를 향하여 내리누르지도 그렇다고 거두어들이지도 못한 채 파르르 떨리던 손을 주먹 쥐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주먹이 계속 떨렸다.
“저주받았어”의 꺾는음과 “이게 바로 끝”의 요동치는 음성은 더할 수 없는 강강강의 오르막길이었다. 이 넘버에, 이 분노에 끝이라는 경지가 있을 수는 있는 걸까 싶게끔.
멀린아더, 굉장히 선명한 웃음을 그렸다. ‘멀린’으로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므로 드디어 끝이라는 듯한 미묘한 후련함과 모르가나가 눈에 밟히는 회한의 눈빛을 하면서.
〈왕이 된다는 것〉. 최근 들어 가장 울컥한 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유난히 진하게 나눈 공연이었다. 결연하게 홀로 섰지만, 마음 조각들의 울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오늘의 등은 사지를 향하여, 살러 나아가는 사람의 것이었다. 생환을 장담할 수 없는 곳으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이의 뒷모습이었다.
〈전쟁터〉. 새삼 치열한 전쟁이었다. 혈투가 한창일 때 가득한 죽음의 핏빛 배경이 섬뜩할 만큼. 그러다 전황이 점점 정리되어가자 잔잔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하는데.. 평화의 물꼬가 트는 와중에 아더는 제 피붙이 같은 형을 잃어버리게 되니, 그 얄궂은 운명에 마음이 아팠다.
결국 세상에 홀로 남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많은 왕을 대신하여 하나의 왕이 나셨다고 하였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많은 공연을 대신하여 오늘, 단 하루의 엑스칼리버가 온 것이라고. 또한 많은 사랑을 대신하여 단 한 명의 시아준수가 온 것임을.
그러니 사랑해.
*
커튼콜의 입 모양: 엄기준 랜슬럿에게 “형 때문에 너무 슬펐어요.” 라 하였다던 그.
